나는 곧 세상이요, 세상은 곧 나다
나는 곧 세상이요, 세상은 곧 나다
  • 임수진 기자
  • 승인 2009.11.12 00:12
  • 호수 1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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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

나는 모든 판단과 선택을 나 스스로 하지만, ‘내 생각’을 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를 둘러싼 것들이 나를 규정하고 내 생각을 구성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은 엄밀히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범인(凡人)���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 세상 사람들은 그 전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 흐름을 타고 현재를 생각해 왔다. 봉건제가 사회를 지배할 때도, 자본주의가 판을 칠 때도 그 의미를 곱씹어 보지 않은 채 그에 맞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갔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들처럼.

최근 들어 ‘실용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현실에 발 맞춰 살아가는 것이 실용적인 것이라면, 비실용적인 것은 곧 비현실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비현실적인 것은 현실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며,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고로 쓸모 없는 것이고, 그것이 다시 비실용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들에 구애받지 말고 어떻게 본질을 봐야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실용주의를 말할 때 ‘실용’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나를 둘러싼 것들의 입장에서 본 실용적인 것이어야 의미가 있다.) 사회는 나를 자신의 한 부분으로 취함으로써 체제를 유지, 재생산할 수 있도록 내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나는 어떤 것이 실용적인 것인지를 재빨리 터득하고, 그것을 향해 매진할 수 있다.

실용(實用)���이란 말이 ‘실질적인 쓸모’를 가리킨다면 실제로 쓸 수 있는 것이 실용적인 것 일텐데, 실질적인 쓸모가 있다는 그 기준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것일 게다. 본질은 사라지고, 쓰기 좋은 것만 그 자리에 남는다. 경영학은 실제 기업에서 유용하게 쓰일 것 같은데, 철학은 어딘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다른 세계의 일인 것 같아 보인다. 어렵고 힘든 순수 학문일 뿐이고, 그것은 별로 쓸데없어 보이는 ‘본질’을 희구할 뿐이다.

그렇다면 실제 세상에서 ‘쓸데없는’본질은 어디에 쓸모 있는 것인가? 고인이 된 비평가 김현(1942~1990)은 문학에 대해 “(문학은) 쓸모없다는 점에서 쓸모 있다.”고, “쓸모없는 것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고유의 존재,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본질이라고 한다면 문학도 본질을 찾는 것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무엇이든 현실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현실과 떨어져 있는 것들은, 내가 볼 때는 가장 현실적이다.

하지만 사실 자본주의 아래서는 어떤 것도 변치 않을 수 없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본질이 될 뿐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바로 이 공간, 우리 대학. 대학 역시 자본주의 사회 아래서 더 이상 본질을 찾는 곳이 아닌 듯하다. 대학의 질을 높여야 한다, 대학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며 추구하는 소위 ‘혁신’이란 것은 모두 철저히 현실에 기반한 채 이루어진다. ‘현실’이 아니라 ‘본질’을 쫓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는 대학을 보고싶다.

덧붙여, 문학, 예술, 대학, 그 어디에도 이 고민이 해결될 곳은 없다. 문제의 발로와 해결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세상이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곧 세상이요, 세상은 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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