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는 아무도 시끄럽다고 안하잖아요"
"시장에서는 아무도 시끄럽다고 안하잖아요"
  • 배도현 기자
  • 승인 2014.03.06 14:06
  • 호수 2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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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17일(월) 부천동초등학교 6학년 2반에서 '행복한 청소부'라는 책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시험을 없앤다고 했을 때 학부모들의 의심이 많았다. 학부모들을 한 달에 한 번 이상 만났다. 아이들, 학부모와 함께 여행도 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수업이 즐거워졌고 학교 가는 발걸음이 즐거워지니 성격도 활발해졌다. 아이들이 바뀌니 학부모 인식도 바뀌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작지만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부천동초등학교 6학년 사례지만 필자는 질문 없는 사회의 대안으로 감히 말한다. 사회문화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 나를 바라보는 사회의 잣대가 변할 수 있다는 것에 기반 해서다. 내가 타인을 좋게 바라보려면 그 타인이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에서 사회 인식은 출발하고 있다. 우리 삶에서 사라진 질문을 사회문화 인식 개선에서 찾아봤다. 세상 인식을 달리 보려 노력했다.

개선할 문화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현 시대의 평가 잣대가 꿈 보다 스펙과 학점 중심의 문화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이 있었다. 서울대 오제연 국사학 박사는 “한국의 경우 압축 성장 과정에서 많은 부정부패, 연고주의로 인해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 모든 것을 ‘계량화’해서 양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이다. ‘양적 평가’의 기준으로서 ‘스펙’이 그만큼 강조됐던 것이다”고 말했다. 국가와 국민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회적 기준이 작동하게 방관하는 ‘나’들로부터 비롯된 문제라고 생각된다. 본교 국사학과 박광용 교수는 “대학생들이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된 이후에 눈앞의 ‘자기 앞 가림 하기’ 위한 감각적 문화가 더 급하고, 더 멀리 더 깊게 보기 위한 이성적 문화는 별로 급하지 않은 듯하다”고 했다.

우리 삶의 언어 양식이 그만큼 바뀐 터라 더 이상 ‘왜 질문하지 않냐’고 온전히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오히려 가정부터 초?중?고?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육과정에서 질문 및 토론을 옥죄지 않았는지부터 돌이켜볼 일이다. 그 인식개선 시작에 대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 장해성 교수는 “단일한 목표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취업에 대한 압박 없이 자유롭게 학문적 상상의 날개를 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역으로 질문과 수업참여가 긍정적 평가로 이어진다는 수업의 객관성과 정확한 평가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작업을 시작해야한다”고 말했다. 박광용 교수는 “한국 특유의 경쟁, 대기업 입사시험 문화가 문제”라며 “입사 시험, 경쟁 방식이 바뀐다면 상당 부분이 해결 될 것”이라고 밝혔다. 더 이상 개인 역량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는 점에 고무적이다.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공간에서부터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제안은 지속가능성 있는 담론이다.

사회문화 인식 개선 방안에 대해 고민 중, 현재 대학생 문화를 들여다봤다. 문화가 존재해야 개선할 점이 있을 것이고 없다면 그 자체로 굉장한 문제라고 여겼다. 이에 오제연 박사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대학생들만의 문화는 없다. 대학에 들어와서 대학생이 되어야만 누릴 수 있는 문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경쟁, 소비문화의 범람 이것이 오늘날 대학생들의 문화라면 문화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고 꼬집었다. 박광용 교수 역시 “현재 대학생들 문화는 잘 모르겠다고 해야 맞겠다. 과거 대학생들의 ‘생산자처럼’이라는 문구와 같은 이웃을 잘 보려는 모토가 들어설 자리가 적어졌고, ‘내 튀는 자아처럼’이라는 식의 자기를 더 잘 보이게 하는 모토가 그 자리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덧붙여 “세미나가 다양하게 활발해 진 측면이 있으나, 크게 볼 때는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소비문화라는 측면이 강해 다음 사회를 향한 지식 생산이라는 방향성은 아주 약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고 비판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문화적 자본’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상위층 자녀들이 어떻게 대학 내에서 ‘현실과 소원한 학문적 창의성’을 드러내는지 집중했다. 취업을 해야 하는 가난한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직업과 관련 없는 학문적 창의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에 반해 음악·그림·독서 등의 ‘문화적 자본’의 영향과 혜택을 받은 상위층 학생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취업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지식을 받아들였고, 대학생활도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장해성 교수가 지적한 대로 한국 20대 대학생들은 계층에 상관없이 취업과 성공의 길만 강요당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마주하고 있다. 개선할 문화가 애초에 없다는 것. 학문적 흥미를 느끼며 질문을 할 여유는 과도한 욕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 이것이 마주한 현실이었다.

질문과 토론은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과정
질문 한다는 것은 나에게 내제되어 있는 주체를 믿고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 엄연한 공적 공간에 내 주체를 타인에게 드러냄으로 서로의 관계를 확인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결국 질문은 내 주체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 자체를 존중해준다면 그 경계는 한 순간에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토론은 어떠한가. 서로의 주체를 존중한다는 전제조건하에 이뤄져 있다. 서로의 관계를 연결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전제되어 있는 아름다운 대화방식이다. 서로를 존중하는 순간 함께 이야기하는 문제는 우리 삶과 분리된 객체가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통해 너와 내가 소통할 수 있으며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과정은 우리 삶과 세상에 조금 더 귀 기울일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있다. 서로의 존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질문과 토론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자신을 믿고 드러내는 일을 통해서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과정이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의미를 재확인 할 수 있었다. 동양은 하루하루 살아가는데서 내면의 변화를 추구했다. 이 마음의 흐름으로부터 ‘나’와 ‘우리’의 존재 의미를 찾았다. 여기서 ‘생생지덕(生生之德)’이라는 동양적 진보를 알 수 있다. 나날이 새로워지며 마음의 깊이를 더해가며 덕을 쌓는 것을 내면에서 봤다는 말인데, 유교경전 <대학>에서는 이러한 내면을 가졌을 때 지성인일수록 세계에 대하여 일정한 안목을 유지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전한다. 다만, 사회참여가 오늘날 정치인이나 법조인처럼 전문성만 인정되면 그 실력으로 자격과 권한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전문성이 ‘마음공부’로 부터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집단 자체의 수준 상승 중시
즉, 사회 변화를 꿈꾸며 동시에 ‘나’라는 주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질문과 토론 속에 존재했다. 이러한 생각 속에 질문과 토론이 일상화 된 미국 유학생들과의 대화를 거쳤고, 교육에 대한 가장 큰 차이점을 들어봤다. 고전 100권 커리큘럼을 학생들이 토론을 통해 이끌어가며 공부양이 가장 많은 미국 세인트존스대학교에 재학 중인 조한별 학생,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재학 중인 정진호(인지과학·4) 학생과의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세인트존스대학교에 다니는 조한별 학생은 “교수 대신 튜터(tutor)개념, 즉 선배의 느낌으로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에 그친다. 토론 수업이다 보니 튜터가 오지 않아도 학생들끼리 수업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수업은 학업과 기술을 익히고 닦는 수업이니깐. 이렇게 비롯된 한국과 미국의 교육과정, 정서, 인식을 전제로 하고 말한다면 주체적인 태도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은 ‘대학’이라는 공간이 필수적이며, 소위 ‘인 서울’에 대한 개념은 더욱 거세다. 그에 반해 미국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공동체 의식기반에 따라 움직이는 삶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차이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당연한 개인선택이라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재학 중인 정진호 학생 같은 경우 흥미로운 의견을 개진했다. “미국은 집단 내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보다 집단 자체의 수준이 올라가는 시너지 효과를 중시한다. 결론적으로 미국이라는 거대 집단 자체가 타 국가들 보다 더 경쟁력을 갖는 것 자체를 최종 목표로 하는 미국인인 만큼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건전한 비판을 장려하는 토론 문화는 없어서는 안 될 경쟁 과정의 일부인 것 같다. 쉽게 표현하자면 미국의 경쟁은 우주선을 화성에 보내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토론과 비판도 수용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우리 힘으로 쏘아 올리지도 못할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통해 개개인이 훈장을 받고 싶어 하는 구조 속 경쟁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토론을 통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자각하는 것이 백미인데, 그 과정이 없으니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고민 없이 남의 기술을 이용해 빨리 해내겠다는 것이 주를 이룬다. 진정한 학문은 ‘빨리’에서 찾는 것이 아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인데 말이다. 정 학생의 “단순히 말 잘하는 사람, 자료 많이 찾아온 사람이 점수 더 잘 받는 사망 유희적 토론 문화랑 무엇이 다른가”와 같은 지적은 맥락을 같이한다.

수업은 하나의 오케스트라와 같은 예술
사실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성장한 집단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배경을 무시한 채 결과만 보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문교육으로 우수한 프랑스의 경우도 자유롭게 사색할 수 있는 배경 덕분에 1차적 질문을 수없이 던져낼 수 있는 것일 뿐 현재 프랑스는 위대한 사상가의 계보가 끊겨가고 있는 역설적인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기반으로 우리가 공존하는 공간, 여기서 그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현장은 본교 바로 옆에 위치한 부천동초등학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현장을 이끌고 있는 박용준 선생님은 7년째 주제중심 수업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제 257호 5면 주제중심 설명 참고). 작년에 선생님과 뜻을 모아 6학년 전체가 시작했다. 시험을 없앴고 교과서를 탈피했다. 교과서 경제는 기업중심이라 다른 시선에서 바라본 책을 함께 읽으며 공유했고 마을 벼룩시장을 열기도 했다. 수익금은 독거노인에게 기부하는 등의 생활 속의 교육을 지향했다.

물론 처음에는 힘들었다고 한다. 사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사교육은 지적 호기심, 즉 고민할 수 있는 부분을 뺏는다. 그것 하나도 해나가기 벅찬 현실 속에서 주위를 관심가질 여유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에 교실에서 협동할 수 있는 있도록 틀을 만들어줘도, 자발적인 협력은 많이 떨어졌던 것이 현실이었다. 같이 아파하고 고민하고 해결해나서는 것이 개인의 역량에 국한된 문제로 그쳤기에 자발적 협력이 가장 큰 화두였다고 한다. 나를 세우고 주체성을 갖고 다른 사람과 같이 협력하고 나누는 모습을 일상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2월 17일(월) 오전 11시 6학년 2반 교실을 찾았다. 책상 구조부터 달랐다. 4명 씩 마주보는 책상 대형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으니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말을 트는 분위기가 생겨 수업시간에 질문이 많았다. 질문도 질문이지만 수업시간 내내 선생님과 학생 사이 말이 오갔다. ‘행복한 청소부’라는 동화책을 선생님이 읽고 그림을 보여주면서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수업이었다. ‘청록을 왜 초록색이라고 책에 나와 있나, 초록색은 청색이라고 하나’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옆 친구에게 물어보는 등 질문에 대해 계속 꼬리를 무는 재잘거림이 이어졌다.

수업만이 아니었다.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는 학생 전체가 모여서 이야기했다. 세부적인 것들은 선생님들의 의견, 각반 임원들이 금요일 오후에 모여 한주를 되돌아보고 다음 주 계획을 공유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소통의 구조를 만들었다. 박용준 선생님은 “학생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 학교폭력과 같은 문제도 당사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1년의 수업 변화는 학생들에게도 변화를 가져왔다. 학교폭력이 사라졌다. 물론 상대적으로 어울리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따돌리는 모습이 사라졌다. 한 예로 거칠고 학생들과 자주 부딪히는 학생이 있었다. 화가 나면 마음을 닫곤 했는데 그 학생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끌어주기 위해서 주변의 친구들도 노력했다. 문제가 생기면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는 과정이 있었다. 지금은 장난도 다 받아주고 한 마디로 부드러워졌다. 결국 따돌림 문제가 생겼을 때 마음의 문을 닫지 않고 고민하고 울면서 서로가 서로를 인식할 수 있었다. 표현하는 활동을 주로 하다 보니 본인 생각을 말하면서 자존감도 높아지는 과정 속에 타인의 얘기를 끊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변화도 생겼다.

6학년 2반 심준보 학생의 학부모 정지애씨는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아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 상황을 만들어줘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수업은 하나의 오케스트라와 같은 예술이라는 박용준 선생님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선생님은 시장 같은 분위기를 지향한단다. 이유를 들어보니 시장은 시끄럽지만 아무도 시끄럽다고 뭐라고 하지 않는 그런 분위기가 좋다고 말하셨다. 결국 각자 소리 속에 세상사는 이야기가 스며들어있기 때문 아닐까. 너와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그 지점에서 질문과 토론은 일상 속에 형성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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