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의 언어
갯벌의 언어
  • 안길성(심리,2)
  • 승인 2014.12.09 20:41
  • 호수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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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가대문화상-수필 부문/당선

■제35회 가대문화상-수필 부문/당선

무의도(舞衣島)는 반도의 옆구리 인천에 붙어있는 작은 섬이다. 인천 연안에서 섬들은 물로 이어져 있고 물길로 배가 다닌다. 무의도의 북쪽으로 영종 지금의 영종도는 본래 4개의 서로 다른 섬이었다. 인천공항을 만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영종도와 용유도, 삼목도, 신불도 사이를 간척해서 현재의 영종도가 되었다.

강화와 같은 섬들이, 남쪽으로는 영흥, 대부의 섬들이 늘어서있는데 관광지도를 펴놓고 섬들을 헤아릴 때, 섬들은 출항을 기다리는 배처럼 보인다.

육지에서 무의도로 건너가려면 징검다리 밟듯 섬들을 밟고 가야한다. 육지에서 영종도까지 다시 영종도에서 잠진도까지는 다리가 놓여있어 차를 타고 가고 잠진도 선착장에서 페리보트를 타고 10분쯤을 가면 무의도가 있다.

하나개 해수욕장은 바다를 향해 돌아앉은 무의도의 명소이다. 섬의 외곽을 띠처럼 감싼 해안애(海岸崖)의 대열은 하나개에서 소실한다. 대신 그 이름처럼 하나개는 ‘큰 갯벌’이라는 뜻이다.

하나개에는 개활한 갯벌이 원해(遠海)를 향해 전진하듯 뻗어있다. 내가 늙은 봉고를 타고 도착했을 때, 바다는 썰물이었다.

조수의 생태는 신비롭다. 물은 하루에 두 번 육지를 드나드는데, 이는 지구와 달과 해의 밀고 당기는 역학관계에서 비롯되므로 우주적인 현상이다. 나는 그 우주의 작동을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으나 바다가 물을 보내고 불러가는 일은 생명의 숨 쉬는 일처럼 자연스러워 보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다는 지형(地形)이기를 벗어나 살아서 펄떡이고 있었다. 나는 모래 위에 앉아 참외를 먹으면서 물이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은 쉽게 빠졌다. 물이 불려간 자리에 갯벌이 돋아나서 비린내를 풍겼다. 신발을 벗고 갯벌의 비린내로 걸어 들어갈 때, 흙은 몸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강성한 여름의 기세에도 갯벌의 흙은 서늘했다. 발가락 사이를 덮치는 흙의 질감은 생소했다. 갯벌을 걷는 일은 시멘트나 콘크리트를 걷는 것보다 힘들다. 시멘트와 콘크리트는 근육이 생성한 추진력을 거의 완벽히 몸에게 돌려주어 몸은 편안하게 앞으로 나아가지만 갯벌에서 흙의 세립(細粒)들은 근육의 동력을 끌어당겨 쪼개고 부수어 흡수한다. 그래서 갯벌에서 30분만 걸어 다니면 장딴지가 빳빳해진다. 나는 스케이트 타듯이 발을 밀며 갯벌을 건너갔다.

여름의 갯벌은 생명의 자취로 충만하다. 썰물은 머뭇대며 불려가면서 갯벌에 구불거리는 물결의 흔적을 남기는데, 그 흔적 위로 갯지렁이가 싸놓은 똥의 타래나 밤게가 파놓은 구멍의 입구가 보였다. 그것들은 몇 발짝마다 하나씩 있었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로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돋을새김한 상형문자처럼 보였다. 나는 갯지렁이들과 밤게들이 갯벌의 언어로 인간과 소통하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갯벌의 생명들이 흘린 자취들을 따라, 호미와 갈퀴를 든 여자들이 옷걸이 모양으로 등을 구부리고 조개를 주웠다. 흙바닥을 뒤집고 긁으면 손톱만한 것부터 알이 굵은 것까지 조개가 나왔는데 주로 바지락과 동죽이었다. 그것들은 먹는 조개들이었고 여자들은 검은 비닐봉지에 조개를 싸서 차 트렁크나 아이스박스에 실었다.

나는 발을 밀면서 계속 나아가서 갯벌의 바다 쪽 경계에 이르렀다. 그곳이 하나개의 최대간조선인 듯했다. 갯벌에서 바라다보는 수평선은 내 언어적 감수성으로 형용되지 않는 오만가지 색과 소리로 바글거렸다. 나는 그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그 궁형의 선이 고등어 등짝의 완만함과 그 푸름의 그러데이션(Gradation)을 닮았다고만 생각했다. 몇 초마다 낮은 파도가 원양(遠洋)의 신호를 싣고 갯벌로 건너왔다. 장딴지에 닿는 원양의 물은 으스스해서 모래알 같은 소름이 돋았다. 나는 돌연 배를 타고 난바다로 가고 싶었다. 땅에서 오래 산 나는 먼 바다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었는데, 그곳은 내 지식이나 깜냥이 닿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었고 그러므로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일의 지지고 볶는 고충들을 거기에서라면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섬을 향해 도로 걸어올 때, 시선의 끝자락에서 섬은 숲의 초록과 해안의 흙색으로 완연했다. 해안에서 사람들은 텐트와 돗자리를 펴고 뒹굴었고, 그 뒤로 플라스틱을 기워서 지붕을 얹은 일박 7만 원짜리 방갈로들이 가지런했다. 갯벌에서 바라보는 섬은 그러했다. 그것은 사람의 세상이었다. 종과 횡으로 구획된 법칙정립적인 세계였다. 갯벌에서 노는 게 편안해서 나는 사람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불완전한 원리와 원칙이 이래라 저래라 삶을 운영하고 그러다가 고장 나고 그 통에 사람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싸우며 존엄한 가치와 고상한 정서가 이념화되고 정치화되어 길바닥에 주저앉고 저마다 화려하고 공허한 사상과 논리로 각자의 정의를 외치고 함부로 ‘진실’을 말하고 끊임없이 ‘너는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 가엾은 사람의 세계, 법칙에 대한 신뢰가 깨진 법칙정립적인 세계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것이 갯벌에서 본 인간의 세계였다. 늙은 봉고를 타고 내가 굴러온 세계. 나는 진화의 줄기를 거슬러 가서, 발가락 사이에서 꼼지락대는 미물들과 더불어 흙에 머리를 박고 살고 싶었다. 갯벌은 철저하게 개별사례적인 곳이었다. 흙 속에 들끓는 생명들은 비록 척추를 가지지 못했으나, 제각기의 삶을 스스로 영위하는 개별성의 축복을 누리고 있었고 물과 흙과 햇빛으로 자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사람이 정립한 오류투성이 법칙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았고 무의미하거나 삿된 언어로 서로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밀물과 썰물을 따라 갯벌의 언어로 소통하며 겸손하게 살 뿐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내 불완전한 모국어를 버리고 갯벌의 언어로 그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갯벌에서 머뭇대다가,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섬을 빠져나왔다. 자동차는 영종대교를 건너 외곽순환도로와 자유로를 기어서 내 고향 파주에 닿았다. 나중에 또 가려고 길을 기억해 두었다. 오는 길에 신문구독료를 독촉하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문자메시지에 찍힌 숫자들을 들여다보니깐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 실감났다. 통장에 돈을 넣고 집으로 와 발톱에 낀 흙을 파내면서 컴퓨터를 뒤적이는데 정호승의 시가 나왔다. 어떤 순간에는 지극히 평범한 시어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 시는 스미듯이 읽혔고 편안하게 번져서 위로했다. 바닷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갈무리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의 위로를 얻어 이렇게 함량미달의 글을 써놓았으니, 글을 맺는 멋쩍음은 시로 모면해야겠다. 불우한 세상의 상처받은 사람들이 위로받을 제각기의 바다를 찾기를 바란다. 가끔은 바닷가에 앉아서 시간만 죽이다 와도 상처가 아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닷가에 대하여 정호승,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 1998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수필 부문 당선 수상소감_안길성(심리,2)

이 글을 쓸 때, 세월호 유가족은 광화문에 주저앉아 밥을 굶고 있었고 일련의 무리들이 그 앞에서 보란 듯이 치킨을 먹는 소요가 있었습니다. 어김없이 국정원과 빨갱이가 들먹여졌고 소통되지 않는 완고한 언어들이 온 나라에 들끓었습니다. 그 난장판을 보면서 언어의 소통능력에 대한 저의 신뢰는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언어로써 세상과 소통하고 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을까요. 그 불통의 세상에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편입해 살아가야 할, 머지않은 막막한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썼습니다.

못난 글에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써놓고 돌아서면 부끄러운 것이어서 내놓고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남의 문체에 기대지 않고 저의 말들로 쓸 수 있을 때까지 많이 읽고 쓰겠습니다.

 

수필 부문 당선 심사평_박상민 ELP학부대학 교수

예년에 비해 투고 작품이 적었으나 좋은 글들은 더 많았던 것 같다. 대학생활의 어려움, 청년의 비애, 가족의 소중함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겪을 법한 이야기들이었지만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면서 소소한 감동을 전해 받을 수 있어 좋았다.

여러 우수작 중에서 <갯벌의 언어, 무의도>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무의도 갯벌에서의 짧은 단상이지만, 자연친화적이며 우주적인 상상력과 감수성의 무한한 깊이가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특히 빼어난 문장력은 전문 작가로 성장해도 될 듯하다. 마지막 부분에서 다른 사람의 시 전문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은 좀 의외였다. ‘글의 멋쩍음’을 시로 모면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밝혔지만, 그래서 더욱 실망스러웠다. 글의 후반부까지 끌고 갔던 팽팽한 긴장감이 한 순간에 끊어진 느낌이었다. 기존의 시 작품에서 한 두 구절만 인용하면서 끝맺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뻔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스스로의 힘으로 마무리를 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자신에게 주어진 독특한 감수성과 빼어난 문장력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길 바란다.

<엄마의 택배>는 ‘엄마의 사랑’이라는 평이한 주제를 다루었다. 엄마의 사랑과 또 엄마에 대한 사랑 모두가 진실되게 잘 드러났다. 하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의 애청자 투고를 읽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자신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소 진부한 일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감수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관계의 미학>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폼나게 살고 싶어하던 한 남자 대학생의 심리를 사실감 있게 잘 그렸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긴 문장들이 읽기 어려웠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한 것 같아 아쉬웠다. 감정과 내용 모든 면에서 좀 더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더 좋았겠다.

이 밖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스마트폰에 중독된 우리들의 일상을 깔끔하게 잘 적었으나, 시작부터 결말까지의 내용이 다소 뻔하게 전개된 것 같아 아쉬웠다. 불우한 유년의 기억과 가족의 소중함을 진지하게 되새긴 <학교 다녀왔습니다> 역시 끈적이는듯 감상적인 문장이 많아 감동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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