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이 사자에게 입 맞출때
사슴이 사자에게 입 맞출때
  • 고지연(국어국문,2)
  • 승인 2014.12.09 21:01
  • 호수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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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한센병문화상-소설 부문/당선

■제7회 한센병문화상-소설 부문/당선

 “뭘 듣고 있어?”
 친구 녀석 하나가 귀에 꽂힌 이어폰 한 쪽을 자신의 귀로 갖다 댔다. 약간 몽롱한 기분에서 벗어나 천천히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호기심 가득했던 친구의 얼굴은 금세 익숙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요즘 이 노래 인기 많잖아. 노래 좋지. 영화도 봤어? 사운드트랙이 하나같이 좋은 거 있지. 한 번 더 보러갈까 생각중이야. 이제 슬슬 영화 내릴 때 되지 않았나? 아직 안 봤으면 같이 보러 가자. 내가 보여줄게. 이런 데서 고독을 즐기고만 있지 말고. 응?”
 나는 왼쪽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 한 쪽을 마저 뺐다. 여전히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이어폰을 엄지와 집게로 돌돌 돌리며 응시했다. 친구의 방해가 짜증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를 칼로 베듯 재생 정지 버튼을 누르기는 싫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음악소리에 잠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집중했다. 스피커를 손가락으로 누르니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대신 손 끝에 리듬이 심장박동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전해졌다. 친구의 시선에는 경건한 의식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 행동은 다행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며 티나지 않을 만큼 작고 미묘한 것이었다.
 “이 노래 가사 알아?”
 영화를 보러 가자는 친구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노래 가사를 물었다. 요즘 노래가사를 집중해서 듣는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게다가 팝송을 유심히 듣는 사람은 더 많지 않을 것이다.
 “Who are we? Just a speck of dust Within the galaxy?(우리는 누구인가요? 한 점의 우주먼지에 지나지 않나요?)”
 친구는 대답으로 노래 한 소절을 불러 주었다. 가사를 알고 있다. 친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니다, 가사를 모른다. 섣부른 기대였다. 그렇지만 친구는 장난스러운 가운데 나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노래 듣고 있잖아. 그대로 옮겨 부른 거야. 나 생각보다 영어 잘 듣는다니까? 우주 먼지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먼지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 너?”
 “……Yesterday I saw a lion kiss a deer.(어제 나는 사자가 사슴에게 키스하는 걸 보았죠) 이것도 들었겠네 그럼. 사자가 사슴에게 키스하는 걸 본 적 있어?”
 나는 이 노래에 빠졌다기 보다 이 가사에 사로잡혔다고 할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이 노래를 듣는 것은 유행을 좇고자 함이 아니라 이 가사를 듣기 위해서다. 노래를 듣지 않을 때에는 이 가사를 성경의 한 구절처럼 가슴에 아로 새겼다가 수백 번 떠올리며 왼다. 불가능한 일을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달콤하면서 야릇한 일인가. 더군다나 극한의 대립과 긴장 상태에서 기적과도 같은 평화가 눈 녹듯 사르르 찾아오는 순간, 이런 순간을 기도하면서 살게 된 데에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터무니없는 말로 여기는 대신 친구가 표정에서 장난기를 지우고 이어폰을 뺐다.
 “소록도라고 알지? 나병 환자들, 요즘에는 나병이라고 안 하고 한센병이라고 하는데,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이 살고 있는 터전 말이야. 여름방학에 봉사활동을 다녀왔는데…….”

 여름방학을 무료하게 보내다가 개강이 다가오니 뭐라도 하지 않고 여름을 보낸 데에 대한 후회 반, 어디라도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마음 반으로 밤새 인터넷을 유영하다 무엇이 나를 이끌게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하여 소록도에 오게 되었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같다고 하여 소록도라 불리는 이 섬은 아름답지만 슬프고 슬퍼서 더욱 사슴처럼 맑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8월의 끝자락에 찾은 이곳은 남쪽의 섬답게 유난히 찌는 듯한 덥고 습한 공기에 덮여있었다. 그러나 오는 동안의 바다가 보여주는 짙은 푸른빛이라든지 섬을 덮은 우거진 녹색의 색채와 냄새가 이를 무색하게 했다.
 처음 소록도에 도착해 맨 먼저 눈길이 갔던 것은 국립소록도병원 옆에 위치한 검시실, 감금실 건물이었다. 옛 건물이지만 고즈넉하다는 표현보다는 흉물스럽고 음산하게 느껴졌다. 오소소 소름이 벌써부터 돋는 듯한 기분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았다. 환자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손톱으로 긁어서 낸 벽과 문지방의 상처들과, 시멘트로 가리려 했으나 지워지지 않은, 앞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혈흔들이 자아내는 분위기에서 예전 한센병 환자들이 품었을 고통이 생생이 전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6천 명이 넘는 환자들이 이곳에 수용되어 격리, 감금되었다. 자유를 박탈당한 환자들에게 치료는 명분일 뿐, 그들이 감내해야 할 도저한 현실은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가 죽음이었으리라. ‘세 번 죽는다.’라는 환자사이에 사용하던 처참한 말이 있다. 문둥병으로 죽고, 죽은 뒤에 부검을 당하고, 당시 보편적이지 않았던 화장까지 해 모두 세 번 죽는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문드러진 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군수물자 충당을 위해 노동을 착취당하고 각종 생체 실험을 당했다고 한다. 남성들은 마취도 없이 강제로 단종수술을 받고, 여자들은 강제로 낙태되었다. 검시실 안에 한 가운데에 해부대가 있고 그 옆 벽면에 커다란 진열대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낙태된 태아의 표본이 한센인의 장기와 함께 알코올 병에 담겨 표본으로 만들어 진열해 놓았다고 한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도 전시가 되어있었다고 하니, 일제의 자행뿐만 아니라 우리도 사회적 편견을 가지고 잔악무도한 시선과 태도로 그들을 지옥으로 내몰았던 셈이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이곳에서 이들이 비단 세 번만 죽었겠는가. 나는 한없이 우울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갑자기 두려움과 맞닥뜨리게 되니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눈이며 코며 붉게 시큰시큰 거리는 듯했다. 나는 왜 이곳에 온 걸까, 이런 가공할 만한 폭력에 문드러진 사람들에게 과연 내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다고. 먼지같이 내가 하찮아 보였다. 아니, 차라리 먼지가 되어 이곳을 찾은 내 결심을 무르고 홀연히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친구가 방금 말했듯, 먼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유용한 존재기도 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뭘 해주려 하지 말자, 그저 많이 느끼고, 많이 받아 가자. 지옥 속에서 천국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배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돕자, 라는 다짐이 들었다. 멍하니 이곳을 찾은 이전의 마음가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문둥이 죽이고 살인 당한다,는 속담이 있어. 알아?”
 얘기를 한참 듣던 친구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내가 모른다는 기색을 보이자 친구가 말을 이어나갔다.
 “옛날에는 문둥이는 너무 하찮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겨져서 그만큼 문둥이의 죽음이 대수롭지 않았다는 거야. 대수롭지 않은 일 저지르고 큰 화를 당한다는 뜻이 들어있는 말이야. 같은 살인인데 나병 환자들은 모기 잡듯 죽여도 괜찮고, 나는 죽으면 큰일 나고. 너무 소름끼치지 않니? 예전에 들었던 말인데, 니가 소록도 얘기를 하니 다시금 생각이 났어.”
 “나병이라는 말도 요즘엔 한센병이라고 고쳐 불러. 나병은 전염력이 강한 불치병이라는 편견이 들어있는 인간모독적인 말로 인식돼서 명칭을 바꿨지만 아직도 한센병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익은 단어는 아니지.”
 “조심할게. 얘기 계속 해 줘. 그래서 넌 사자가 사슴에게 키스한 것을 보기라도 한 거야?”
 사자가 사슴에게 키스하는 것 말고,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슴이 사자에게 키스하는 장면 말이다. 처음에 이 반대의 상황을 떠올렸을 때는 이 두 가지를 놓고 무엇이 더 감동적이고 무엇이 더 가능해 보이고 더 불가능해 보이는 지를 가늠해보려 했다. 사슴이 사자에게 키스를 하는 쪽이 더 불가능하지만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그려내기에 더 아름다운 쪽이 아닐까 하고. 그러나 영양가 없는 생각은 제쳐두기로 했다. 대신에 조금 더 상상에 골몰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 사자에게 다가가 사자의 마음도 녹이는 사슴의 투명한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소록도에서 지내는 동안 동생리의 마을에서 한센인들이 사는 집을 방문해 청소도 하고 말벗도 해 드리며 지냈다. 집에 방문하면 대부분 몸이 불편하시기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정돈이 안 되어있다.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어서 떨어뜨리고 엎어 지저분하다. 벌레들과 함께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고 하수구와 같이 구석구석 손길이 필요한 곳을 청소하지 못해 냄새도 난다. 정돈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나로 하여금 청소를 하게 한다는 사실에 부담이 되셨는지 어르신들 대부분은 모두 머쓱함이 가득 배인 고마움을 표현해주셨다. 많은 것이 담겨있는 고마움이었다. 미안함도, 외로움도, 당신의 처지에 대한 속상함도. 그들의 마음이 구김 없이 보송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더욱 활기차게 설거지도 하고 이불도 빨고 가구도 들어내며 묵은 먼지들을 지워내었다. P할아버지의 댁에서 청소를 다 끝마쳤을 때, P할아버지께서 이곳의 특산품이라며 유자즙을 주셨다. 냄새부터 유달리 그윽하고 새콤한 것이 그간의 피로와 우울을 날려주는 듯 했다.
 ‘지금이야 이렇지만 처음에 소록도에 들어올 때는 나도 당신과 같이 멀쩡한 모습이었소. 손과 발이 뭉개지는 수십 년 동안 나는 고통이라는 암담하고 참혹한 녀석을 마주대해야만 했소. 고통이 단 한 번도 무뎌진 적이 없었지만 그만큼이나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것이 하나 있소. 내 아버지요.’
 할아버지는 단단한 유자껍질 안에 노랗게 품었던 과육처럼 오래 가슴에 지니고 있던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소록도에 들어온 지는 50년도 훨씬 더 되었고 처음 들어왔을 때 그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처음 발병 사실을 앓았을 때 그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사실은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그를 떼어놓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가 꼭 지금과 같이 무더운 늦여름이었다고 한다. 멀고 험한 길이 이어지는 긴 여정이었다. 여러 날 동안 길을 걷고 또 걷고 하다가 부자가 함께 지쳐버렸다. 하루는 그들이 산속에 들어서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게 되었다. 목적이 목적인지라 잠깐의 그늘에서의 휴식도 전혀 달콤할 수가 없었다. 아이였던 할아버지는 걸음을 서두르시는 당신 아버지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잰 걸음으로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필사적으로 걷느라 완전히 고단한 상태였다. 잠이 곤히 든 할아버지의 옆으로 뭔가 둔탁한 것이 날아왔다. 무서워서 눈도 뜨지 못했다. 곁눈질로 살짝 확인해보니 못 보던 바위 하나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 뒤로 드리워진 아버지의 기척을 느끼며 할아버지는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다스리려 온 신경을 집중했다. 여기서 울면 모두에게, 모든 상황에 해를 끼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버지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자못 떨리는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깨워 얼른 가던 길을 다시 재촉했다. 한참을 더 가 소록도에 거의 다다랐을 때 쯤, 그와 그의 아버지는 드디어 현실에 가시적으로 직면했다. 배를 타고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눈썹이 빠지고, 코가 없고 손가락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아직 발병 초기라 외면적으로 멀쩡한 상태였다. 배가 물가에 도착했지만 아버지는 루비콘 강이라도 건너는 것처럼 배를 타기를 주저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두 배를 타고 가버린 후,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꺼냈다. “너를 어떻게 저곳에 보낼 수 있겠니. 하물며 저런 모습으로 평생을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니. 이런 몹쓸 운명을 너에게 안겨주어 미안하다. 이런 몹쓸 운명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 괴롭다.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평생을 서로 보내 차라리 우리 같이 죽자꾸나.”
 죽음이 뭔지 모를 나이였지만 할아버지는 그때 아버지를 이해했다고 한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게 잘 이해되지는 못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미래를 본 것 같아 아버지가 같이 죽자고 말하는 것이 밉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보다도 아버지가 훨씬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신발을 벗어두고 천천히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걸어 나갔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앞이 다 흐려질 지경이었다. 무서움에 휩싸여 뿌연 정면을 제외하고는 온 몸이 굳어버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아버지가 자신 만큼이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손이 너무나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의 높이가 제법 어린 할아버지의 턱 밑까지 찼을 때였다. 아버지는 가슴께쯤 찼으려나, 조용히 한 발 한 발 내딛던 그가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한걸음만 삐끗해도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돌아서서는 아버지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가슴을 떠밀며 완강히 악을 써댔다.
 “문둥이가 된 건 난데 아버지는 왜 죽어요! 집에 아버지만 믿고 사는 어머니들이랑 다른 형제들은요! 가세요! 저 혼자 죽을래요! 죽지 마요 아버지! 이 손 놔요!”
 자신이 원치 않는 죽음 앞에 서 있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가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죽는 것이 싫었다. 그런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그를 흐느끼며 와락 껴안았다.
 “내 뜻대로 죽는 것 하나 이리 쉽지가 않구나……. 돌아가자 아들아. 얼른 물에서 벗어나자꾸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그렇게 돌아와 그는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고 아버지는 다시 그 먼 길을 홀로 돌아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자신의 병을 인정하려 애쓰며 들어온 소록도지만, 한동안 내내 울기만 하며 아버지도, 자신도,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병도, 같은 병에 걸린 나환자들도, 세상 모두를 원망하기만 했다. 몸이 문드러져 가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깊어만 가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자신에 대한 자괴였다. 동병상련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처지였으되 그는 언제 어디서나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죽을 것같이 아버지가 미우면서도,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부림치며 아버지의 얼굴을 닮아가며 늙는 동안, 그는 한 시도 아버지를 잊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아버지를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소원은 없을 것이라고 줄곧 생각했다. 어느새 부터인가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희미해지고 마음속에서 그 자취가 사라졌다. 미움이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나를 파괴해 가던 자신의 모습도 싫었고, 긴 말들로 늘어놓아 정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 깊은 한 구석에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조각들이 모여 한 덩어리로 떠올랐다. 미워하지 말아야지, 라고 애써 미움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치거나 미움을 계속 안고 있어봤자 병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버지의 시간을 좇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그 뒤로 애절하게 아버지만을 그리며 살게 되었다. 딱 한 번이라도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다면. 단 한 번도 아버지 얼굴을 잊은 적 없기에 다시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아니, 아무 이야기도 필요 없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버지를 보기만 한다면 그 순간 모든 이야기들을 눈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저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보고 싶었다 한 마디만 속삭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P할아버지는 밤이면 밤마다 절실하게 기도했다.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나는 더 이상 내 운명을 미워하지 않으니 아버지도 자식을 버린 데 대한 아픔에서 이젠 벗어나면 좋겠다고.  “그래서 아버지는 한 번도 뵙지 못하셨나요?”병으로 인해 몸이 문드러지는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주위로부터 받는 시선들, 홀대, 사회적으로 ‘나병환자’라는 말에 존재하는 인권모독일 것이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워져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 원망과 미움이 어느 날 갑자기든, 조금씩이든 사라지는 ‘순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할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오롯이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심금을 울리는 데가 있었다. “이해의 순간이 찾아드는 것도 기적이듯, 내게는 한 번의 기적이 더 일어났다네. 기도가 이루어진 거야. 아버지께서 직접 나를 찾아 오셨다네. 내가 심장이 얼마나 벌렁거렸는지 아시오?”
 수십 년의 긴 세월동안 아버지라고 자식을 버린 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았을까. 가슴에 묻은 자식은 뼛속 깊이 새겨져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발걸음이 어찌나 무거웠던지, 차라리 땅에 깊이 뿌리내리고 몸이 굳어버렸으면 좋겠다고도 아버지는 생각했다. 천근만근인 몸을 겨우 옮겨 일상으로 돌아와 아버지는 자식들을 애지중지 키웠다. 그러나 연로해진 아버지가 자식들 집을 전전긍긍하며 지내게 되었을 때, 혼신을 다해 키운 아이들의 눈치를 받았다. 그럴수록 더 품어주지 못한 소록도에 두고 온 자식이 생각이 났단다. 그래서 병환으로 고생하고 있을 자식을 찾아 무작정 소록도로 갔단다. 아버지는 자식을 보고 그대로 무너져 내려앉아 울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아요. 나직이 속삭이며 등이 굽어버린 아버지의 등을 꼭 감싸 안았다고 한다. 아버지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이 소원을 아버지가 이렇게 이뤄주셨다며 평생의 기도에 응답받았다며 아버지의 손을 꼭 붙들어 잡았다. 아버지와의 재회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평생에 아버지를 다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한들 그에게는 더 이상의 회한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었다,고 벅찼었던 감동을 담담한 어조로 전했다. 나를 버리려는 것도 모자라 죽이려고까지 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평생을 그리며 살 수 있을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꼭 안아드렸던 것처럼 나도 할아버지를 오래 꼭 껴안아드리고는 댁에서 나왔다. 사슴이 사자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내화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존재를 용서와 포용으로 끌어안는 사슴의 마음이 내 마음에 작게 꽃처럼 피어나게 된 것은, 순전히 P할아버지 덕분이다.
 
  소록도를 떠나기 전 날이었던 다음 날, 나는 해가 뉘엿해질 무렵 P할아버지의 댁을 다시 한 번 찾아 할아버지를 뵈었다. 할아버지께서 반색을 하시며 나를 맞으셨다. “해가 떨어질 때가 되어가니 오늘은 어두운 집에서 시간 보내지 말고 좀 걸을텐가?”
 P할아버지의 제안으로 우리는 집을 나서 산책을 갔다. 발가락이 없어 걸음이 편치 않은 할아버지를 위해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할아버지는 소록도에서 살게 된 것이 결국에는 인생의 큰 행복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는지는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셔 이곳의 공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도 하셨다. 섬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이유는 병과 싸우며 일상을 건실하게 자신의 여건 안에서 영위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셨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발버둥 치며 살아왔다고 말을 하는 순간, 할아버지의 맑은 눈이 사슴의 크고 동그란 눈과 겹쳐보였다. 그때였다. 앞에 무엇인가 기척이 나서 걸음을 멈추고 보니 몇 걸음 떨어진 길 한 구석에 사슴이 있었다. 사슴은 가만히 서서 나를 응시했다. 나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사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놀랐나? 이 섬에서는 사슴들을 흔히 볼 수 있다네. 괜히 모양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소록도인 것은 아니라네. 이 섬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숨겨진 이유기도 하지. 가끔 운이 좋을 때는 사슴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다네. 마치 우리를 일부러 찾아와 위로해주는 것 같아.”
 “사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에요. 뭐라 말을 할 수 없는데……. 너무 아름다워요. 귀엽다는 표현 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여기서는 더 어울리는 것 같네요.” 할아버지께서 엷은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자네는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사슴이 되어 태어나고 싶다네. 소록도에 살다 세상을 떠난 한센인들, 우리 한센인들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사슴으로 태어난다고 나는 믿는다네. 사슴으로 태어나 용기를 불어넣어주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눈 맑고 털 보드라운 사슴이 되어 마음껏 소록도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그렇게 다시 한 번 한평생을 오롯이 살아보고 싶다네. 남아있는 한센인들의 곁을 저 사슴처럼 맴돌면서 말이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긴 얘기를 마치고 친구의 표정을 살폈는데 흥미 있어 하는지, 지루해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친구는 별다른 감상 없이 말이 없었고 그저 다음 수업이 있어 바삐 가봐야 한다는 말만을 남기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역시 내 경험을 오롯이 전한다 한들 누군가에게 내가 느낀 만큼 닿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이어폰을 다시 끼고 애덤 리바인의 <Lost stars>를 재생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만 친구가 집에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이 노래를 제대로 들어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하고 난 며칠 뒤 친구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친구는 그간 잠을 통 못잔 것처럼 눈이 퀭해보였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사슴과 사자가 나오는 동영상이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친구한테 물었다.
 ‘사자가 사슴에게 키스한다는 의미를 잡아먹는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이 동영상을 보여주는 거라면, 미안하지만 사양한다. 사자가 사슴 사냥하는 동영상 아니야? 동물의 왕국에서 늘 보여주는 그런 거 말이야.’
 친구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런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식상한 내용이라면 자기가 스마트폰으로 보내고 말지 굳이 나를 찾아왔겠느냐는 것이었다. 얼른 재생버튼이나 눌러 봐, 라며 친구를 재촉했다. 어린 사슴 한 마리가 들판을 뛰어다니고 암사자가 이를 뒤쫓는 장면이 나왔다. 잡힐 듯 잡히지 않게 계속 뛰는 둘의 모습이 생존이 걸린 쫓고 쫓기는 상황이 아닌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한참을 뛰고 난 후에, 둘의 거리가 좁혀져, 암사자가 사슴의 앞으로 가서 선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뒤에 이어질까 나도 모르게 긴장한다. 사자가 사슴에게 입을 맞춘다. 어미가 새끼 살피듯 다정하게 입을 맞춘다. 그러고 보니 사자가 사슴을 사랑스럽다는 듯 어미 사슴 못지 않게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완전히 불가능한 현실이란 없다. 어렵지만 꿈꿔왔던 현실이 발견되는 순간 속에서 해소구를 찾는다. 사자가 사슴에게 입을 맞춘다. 적대시해서 미안해, 사과의 입맞춤이다. 상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뛰어넘은 새로움의 입맞춤이다. 편견과 오해를 뛰어넘은 이해의 입맞춤이다. 오래된 깊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는 치유의 입맞춤이다. 한센병은 국가적으로 발병 위험률 3급에 해당한다. 감기나 결핵보다도 발병 위험이 적은 것이다. 유전되지도 않고, 전염되지도 않고, 불치는 더더욱 아니다. 앓고 나면 약간의 흔적이 남을 뿐인데, 병에 대한 오해로 한센병에 걸린 환우들은 괴물로 전락해 버렸다. 편견 가득한 우리의 시선이 사자였을까.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문드러지도록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사슴은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내면서 상처를 덧입어 가며 죽어가고 있었다. 아직 사슴을 물어뜯는 사자가 편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센인들을 달리 보는 개인적 시선들이 생겨나며 더 거대한 사회적 편견을 차츰 없애고 여전히 관념적으로 불치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한센병을 치유하려는 ‘사자의 입맞춤’이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더 큰 가능성이랄까, 한센인들이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고 용서하는 마음들을 지난 여름날 살펴봄으로써
‘사슴의 입맞춤’또한 보았다. 기도에서 용기를 얻어 용서로 이어진 투명한 입맞춤. 이 두 가지 입맞춤은 소록도를 떠나왔지만 내가 쭉 한센인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한센병을 넘어 내 삶이 아무이유 없이 가끔 엉키고 고통스러울 때 이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치유의 주문이 되었다. 맑은 하늘에 선선한 바람이 귓가를 스칠 때 또한, 같은 것을 떠올린다. 소록도에 다녀온 후에 노래가 나오고 그 작은 구절 하나가 내 인생의 화두처럼 작게 마음 한쪽에 그림을 그린 셈이다.
 날이 이젠 제법 차다. 친구와 이야기를 한 그 날 이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를 만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벌써 학기도 끝나 겨울을 나고 있다. 올 겨울은 날 만하구나, 입김을 호호 불면서도 나를 울게 하고 행복하게 해준 소록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출처모를 온기가 훈훈히 얼굴을 덥힌다. 집에 돌아와 잘 확인하지 않는 우체통을 무심코 쳐다보았는데 고지서나 홍보물이 아닌 다른 것이 꽂혀 있다. 뜻밖에도 친구에게서 엽서가 왔다. 사슴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사슴의 가슴에 놓인 심장이 붉디붉게 칠해져있다. 추상적으로 표현된 사슴의 뿔은 오래된 나뭇가지처럼 하늘로 이곳저곳 나있다. 마치 안테나 같기도 하다. 뿔 주변은 은은하지만 다채로운 색상으로 채워져 있다. 외로워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따뜻함이 묻어나오는 그림이다. 뒷면을 돌려 주소지를 확인하려는데 이럴 수가, 친구는 소록도에 있다. 당황하여 엽서를 읽어 내려가는 내 시선이 황급해졌다.
 ‘파울 클레의 <사슴>이라는 작품이야. 니 얘기를 듣고 난 뒤에 언젠가 도서관에서 도록을 뒤지다가 발견한 그림인데, 이 노래가 들리는 듯 하더라. 아마 네가 해준 얘기가 생각이 나서였겠지.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들 같아. 상처 입었지만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세계와 소통하고 교감하고 싶어 하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 말이야. 외롭게 혼자 서서 붉은 심장을 내보이면서 뿔이 하늘 높이 다채롭게 솟아있는 모습이 딱 그렇게 보여서 엽서만한 크기에 인쇄해서 가지고 다니다가 이제 너에게 이 그림을 보내. 너랑 얘기하고 난 후에 너랑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아 더 얘기를 나눠보지 못했지만, 네가 소록도에 다녀온 이후에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듯이 나도 그랬어. 네가 소록도의 여름을 전해주었듯이, 소록도의 겨울을 전해줄게. 일 주일만 있다 간다는 것이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 언제 섬을 나올지 모르겠어. 섬에서 나오면 베트남에 있는 한센인 마을을 방문하게 될 것 같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아껴두었다 돌아가고 봄이 올 때쯤 만나자.’
 친구가 엽서에 쓴 내용은 의외였다. 그날 얘기한 내용들이 친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친구도 사자가 사슴에게 키스하는 모습이나 사슴이 사자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보았을까. 적어도 확실한 한 가지는 우리는 가슴 속에 사슴 한 마리씩을 품고 살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자를 무서워하며 눈물을 흘리던 사슴은 이제 붉은 눈물을 닦고 춤을 춘다.

 

But don’t you dare
하지만 설마 당신은
Let our best memories bring you sorrow
우리의 추억을 슬퍼하는 데 쓰진 않겠죠
Yesterday I say lion kiss a deer
어제 사자가 사슴에게 키스하는 걸 봤어요

Turn the page
페이지를 넘겨요
Maybe we’ll find a brand new ending
완전히 새로운 엔딩을 찾을지도 몰라요
Where we’re dancing
거기서 우리는 춤을 춰요
in our tears
우리의 눈물로

<Begin Again OST, ‘Lost stars’ 中>

소설 부문 당선 수상소감_고지연(국어국문,2)

 어떠한 순간에 골몰하게 되면 순간에 압도당하게 된다. ‘사자가 사슴에게 입 맞추는 순간’, ‘사슴이 사자에게 입 맞추는 순간’ 만을 상상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찾는, 혹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 속에서 가능을 찾으려는 상상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평화로워지는 경험을 했다. 크든 작든 간에, 누구에게나 가슴 속에 밀어내고 싶은 응어리들이 있을 것이다. 한센병이 주제가 되는 이야기지만, 그보다는 그 안에는 그저 존재로서 서로가 위로받고, 위로하고, 말로는 못다 할 어떤 형이상학적인 마음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특별히 한센병 문화상에 공모하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하다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내려간 고향집의 평화로운 식탁 위에서 우연히 엄마가 해주신 소록도에 관한 얘기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매체를 통해 건너건너 듣다 엄마의 입에서 직접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것이 설령 ‘남’의 이야기일지라도 흐릿한 것이 아닌 보다 느낌이 있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표면적인 아픔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소록도에 소록소록 조용히 쌓여온, 어쩌면 그래서 더 짙은 한센인들의 내면적인 비애에 관한 것을 이야기해 보고 싶은 마음이 어딘가에서 싹텄다.

한센인들을 더 이상 병 안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그저 몸과 마음이 모두 문드러지기만 하는 대신 불모의 땅을 스스로 일구었다. 뭉툭한 손으로 누구보다 고된 땀을 흘려 자신의 터전을 가꾸었을 상상을 해 보라. 그것이 바로 ‘사슴이 사자에게 입 맞추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소록도를 넘어 다른 곳에서도 조금씩, 그들의 삶을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서로 전혀 연결고리가 없을지 모르겠으나 그들은 분명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전해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에 힘입어 이야기를 썼고, 앞으로 그들이 지금처럼만 건실하게 살기를 마음 깊이 기도하고 싶다. 조금 더 욕심을 보태 행복을 직접 가꿔나가는 그들이 조금만 더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소록도와 곳곳에, 그리고 굳이 한센병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전해지면 좋겠다.

소설 부문 당선 심사평_최선경 ELP학부대학 교수

조락(凋落)의 계절, 스산함이 안팎으로 파고드는 11월 어느 날에 한센병 문화상에 응모된 9편의 작품을 만났다. 시 8편, 수필 1편. 작년에 비하면 많은 수이지만 여전히 좀 아쉬운 편수였다. 작년에 한 편도 없던 시가 8편이나 응모된 것이 반가웠지만 눈에 띄는 작품 없이, 고만고만한 작품들에서 시적 성취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무고한 죄인>, <너의 시선>, <어느 한 환자의 시>는 모두 한센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을 꼬집은 작품이었다. 한센인에게 ‘빠알간 도장’을 찍고, ‘불편한 시선’으로 상처를 할퀴는 ‘타인들의 거친 시선’에 대한 문제제기가 공통됐다. 그러나 세 편 모두 말하고자 하는 바를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 표현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시적 울림을 전달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광기의 역사>, <장미>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시어들의 과잉이 아쉬웠다. 성글고 거친 표현들을 조율하고, 불필요한 시어들을 가지치기해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과장됨 없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나의 소원>, <기쁜 거짓말>은 모두 한센인의 쓸쓸한 내면 풍경을 차분하고 담백한 어조로 묘사한 작품이었다. 앞의 시들에 비해서는 완성도가 높았으나 아직은 영글지 못한 시어들의 어설픈 조합(<인간>)이나 단조로운 시상 전개(<기쁜 거짓말>)가 아쉬움을 남겼다.  내면에 대한 성찰적 응시를 통해 ‘그림자 시간’을 포착해낸 한센인의 독백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나의 소원>을 가작으로 뽑았다. 

최우수작으로 선정한 <사슴이 사자에게 입 맞출 때>는 소록도에서 만난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으로 서술된 작품이다. 체험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지루하지 않게 풀어낸 솜씨나 ‘사슴과 사자의 입맞춤’이라는 가사의 의미를 한센인에 대한 편견의 불식과 관용으로 전화(轉化)시킨 사유의 과정이 참신하게 다가온 글이었다. 전체적인 구성의 밀도가 떨어지고 비문이 군데군데 보이는 등의 미숙함은 있지만 결국엔 사람과 세상을 보는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좋은 글을 쓰게 하는 재능이라는 생각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하였다.

올해 한센병 문화상을 심사하면서 느낀 아쉬움은 한센인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의 부재였다. 상투적인 연민에 기반한 진부한 목소리가 아니라 좀 더 개성적인 목소리가 담긴 작품들이 내년에는 많이 응모되기를 바라면서 심사평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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