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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공단>은 왜 ‘위험한 길’ 을 가지 못했을까?
[불편하면 어때] 당연한 것을 삐뚤어지게 바라봐라
[280호] 2015년 11월 05일 (목) 00:48:45 손희정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 .
한국 여성노동사는 잔혹하다. 자본과 가부장제의 공모 아래에서 지속된 착취의 성격이 잔혹하기도 했지만, 남성 중심의 역사 인식 안에서 그것이 제대로 기록되거나 기억되지도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위로공단>(임흥순)은 이런 한국 여성노동잔혹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1970년대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에서부터 구로공단 노동자 대투쟁, 캄보디아 ‘SweatShop’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국 기업의 노동 수탈과 탄압, 그리고 항공사 승무원의 감정노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여성노동의 역사를 방대한 스펙트럼으로 펼쳐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공단>은 진부하다. 다큐가 포착하고 있는 무자비한 역사와는 무관하다는 듯 여성노동자를 가부장제의 전통적인 여성 이미지인 ‘누이와 어머니’로 묘사하면서, 스스로 아름답고 처연하게 만들어버린 한 편의 신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작품은 기존의 사회적 다큐멘터리와 달리 대단한 ‘미적성취’를 이루어냈다고 평가 받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회적 다큐멘터리가 스크린 위로 흘려보냈던 에너지는 잃어 버렸다. 그 ‘미적 성취’가 오히려 역동적인 여성 노동운동의 역사를 박제해버렸기 때문이다. <위로공단>의 진부함은 그렇게 아름답고 처연한 것으로 박제되어 버린 여성의 역사에 놓여있다.

<위로공단>은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 카메라의 안정된 이미지를 선보인다. 동요하지 않는 프레임이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담아내고, 그 인터뷰 사이사이에는 도시나 자연을 담은 정물화와도 같은 이미지들이 삽입된다. 그러나 문제는 정적인 이미지 자체가 아니다. 그 이미지가 구성하는 의미망이다. 감독은 사원, 꽃, 소녀, 숲 등의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여성 노동자를‘순수한 나의 어린 누이’ 로 신화화하고 탈문명화시킨다.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살아 숨쉬는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 태고의 숭고한 무엇인가로 탈역사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여성노동자들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자본주의라는 문명의 생산에 기여했는지, 그 문명의 부조리함이 그들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했는지, 따라서 그들이 어떻게 그에 저항하고 투쟁했는지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다큐는 형식 안에서 그런 분노의 에너지를 순응과 체념으로 대체해 버린다. 그렇게 다큐는 모순에 빠지고, 이율배반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진부함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눈을 가린 여성노동자의 모습에서도 계속된다. 시선을 박탈 당하고 시선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이미지란 얼마나 오래되고 낡은 것인가.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자. <위로공단>은 왜 여성들이 눈이 가려진 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다큐는 그들이 목격한 것, 경험한 것, 생각하고 느낀 것, 그리하여 몸으로 행동해 낸 것들에 대한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큐에는 ‘기록하는 자’로서의 남성 감독의 시점은 있되 ‘증언하는 자’인 그들의 시선은 탈각된다. 동일방직 똥물 사건을 기록했던 사진사의 증언은 그래서 가벼이 넘길 수 없다. 그는 똥물사건 당시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에 대해 “평생 이렇게 순수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감독이라는 남성 기록자의 시선이기도 하다. 똥물을 뒤집어 쓰고 악에 받쳐 투쟁할 수밖에 없었을 그 여성들의 얼굴에서 순수함을 보려는 강박. 그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기록하는 자의 지위를 누려 온 ‘남성 작가’의 강박 혹은 상상력의 일천함이다.

한편으로 <위로공단>은 20여 명의 노동자 인터뷰를 이어붙이면서도 사람 사이의 만남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다큐는 노동자와 노동자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사물을, 그리고 사건과 이미지를 연결시키고자 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이혜란)와 같은 여성노동자 투쟁에 대한 다른 기록들이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접근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삼성 반도체 산재 피해자 중 한 노동자가 항암치료 과정에서 머리카락을 잃었던 것에 대해서 고통스럽게 회고한다. 다큐는 그 인터뷰 뒤에 바로 가발 공장에서 가발이 생산되는 과정으로 카메라를 옮긴다. 그녀의 고통은 일종의 농담으로 사물화되어 버린다. 이는 다큐가 노동자의 삶 자체보다 특정한 이미지들을 포착하고 나열하는 것에 더욱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물신화되고 파편화된다.

다큐가 선보이는 여성 이미지는 가부장제 문화가 영원처럼 반복해 온 여성에 대한 신화화의 재탕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여성의 노동이 이처럼 탈역사화, 탈맥락화되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여성노동의 관계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성별중립적이지 않다. 이 악독한 체제는 여성의 노동을 부불노동이자 부차적인 노동으로 위계화함으로 기반을 다졌고, 그 위계를 통해 몸체를 불려왔다. 그러나 다큐에서는 이 문제가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큐에 ‘여성인 노동자’는 있지만,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만나는 자리에서 탄생하는 여성 노동의 특수한 성격이 포착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여성노동자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가장 급진적이면서도 주변화된 주제인 여성노동자를 가시화시키는 동시에, 그들이 ‘누이/어머니’로 그려지면서 다시 그 급진성을 안전하게 포섭하는 역할을 자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로공단>은 또 다른 잔혹사가 되어 버렸다. 기실 여성들의 노동이 가부장제 안에서 비가시화되는 것, 기록되고 기억되지 못하는 것, 그렇게 여성이 역사 안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더욱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내몰리는 것은 결국 이와 같은 신화화의 효과 중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대결해야 할 것은 기록의 불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기록하고 또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소중한 만큼 아쉬운 작품 <위로공단>을 질문의 장에 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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