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
아이유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
  • 손희정 (연세대학교<젠더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5.11.21 21:24
  • 호수 2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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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면 어때]
아이유가 컴백했다. 언제나처럼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말이다. 그 논란의 중심에는 <제제>라는 곡이 놓여있다. 많은 독자들을 눈물 바다에 빠트렸던 브라질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다섯 살 짜리 주인공 ‘제제’를 성적 대상화하고 “꽃을 따라” 고 적극적으로 유혹하고 있다는 죄목이다. 한국에 이 작품을 처음 소개한 출판사에서 아이유의 해석에 유감을 표하면서 문학 작품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논란은, 이제 소아성애의 대중문화적 재현에 대한 윤리적 판단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뒤따라 음원 불매 운동이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로 아이유는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출판사는 유감을 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소비자들은 음원 불매 운동을 펼칠 수 있고, 누군가들은 예술의 자유를 옹호하며 '대중 파시즘'을 비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느 이야기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이‘사건’ 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이유의 성장이 말해지고 전시되는 방식이고, 그런 맥락 안에서 아이유가‘제제’ 를 성적 대상으로 상상했다는 점이다. 아이유의 성장이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하나는 ‘소녀’에서 ‘여자’로의 성 장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돌’에서 ‘작가/아티스트’로의 성장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두 성장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유의 ‘섹슈얼리티’다. <제제>가 수록된 앨범에서 같이 소개되고 있는 <스물셋>이라는 곡에서 아이유는 말한다. “난 영원한 아이로 남고 싶어요. 아니 아니 물기 있는 여자가 될래요” 대중은 아이유가 어떻게‘국민 여동생’에서 ‘여자’로 성장할지 주목해 왔다. 아이유 역시 바로 그 지점이 스물 셋, 대중 '여'가수의 상품성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아이유에게는 어떻게 '성적 존재로, 그리하여 성인 아티스트로 거듭날 것인지'가 중요한 화두였음이 분명하다. 성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 (사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성공한 아티스트가 되는 것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지점에 한국 사회의 성규범이 놓여있다.

이때 '한국 사회의 성규범'이란 '여성의 성'에 작동하는 규범이 아니다. '아이의 성'에 작동하는 규범이다. 이 사회에서는 아이를 탈성애화시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린 스타'의 '성인 스타'로의 발돋움에는 언제나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놓이게 된다. 게일 루빈이 섹슈얼리티에 대한 그의 선구적인 작업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제도, 그리고 법은 “유년의 ‘천진무구함’과 ‘성인’의 섹슈얼리티 사이에 놓인 경계를 유지하는데 특히 흉포하다”그리고 이런 흉포함은 물론 여성의 경우에 더 과도하게 활개를 친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여성 연예인’들은‘성인 인증’을 받기 위해 이중의 성별규범에 영합해야 한다. 포르노에 가까운 ‘성인 연기’가 여성 연예인들에게 일종의 통과의례가 되는 경우들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이것이 그 동안 아이유가‘성적 주체’ 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소아성애의 대상이자 로리콤 서사의 주인공으로 과잉성애화되어 온 이유이기도 하다. 금지된 욕망이기 때문에 더욱 잘 팔리는 상품이 되는 것이다.

<제제>를 둘러싼 논란의 한 축에도 바로 이 문제가 놓여있다. 아이유는 성적 주체일 수 없었지만 언제나 과도하게 성애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 아이유가 자신의 연애를 공식화한 뒤, 스스로‘여자’ 가 되었다고, ‘성적 주체’가 되었다고 말하는 앨범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작업에서 어린아이를 성적 존재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흥미로운 도발이다. 이런 적극적 해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은 과연 소아성애인가? 아니면 한 여성이 오랜 시간 겪어 온 '사회가 해석하는 나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인가. 우리는“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던 '그런 소녀'가 아니었다” 는일종의 '항변'을, 제제에게서 '섹시함과 사악함'을 읽어내고자 했던 그 '작가적 욕망' 안에서 발견할 수 있지는 않은가.

<제제>가 소아성애를 정당화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성적 약자인 '아이들'을 성적 폭력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 이 논란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 네티즌은 이승연의 ‘종군 위안부 컨셉의 사진집’과 아이유의 <제제>를 같은 자리에 놓고 비판했고, 이 글은 공감을 얻으면서 여러 곳으로 공유되었다. 한편으로 이런 관점이 유일한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유통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이승연의 사진집은 (그 역사 인식의 부재를 지적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명백하게‘강간 판타지’ 의 재현이다. 그렇다면 <제제>는 어떨까?

물론 소아성애는 비윤리적인가, 아이들은 성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존재일까 등 이 사건을 둘러싸고 논의되어야 할 문제들은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이 논란은 결국 섹슈얼리티를 둘러싸고 ‘욕망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그리고‘그 욕망의 표현은 또 어디까지 용인될 것인가’라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는 아이유라는 상징적 기표를 경유해서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그 고정관념이 생산하는 효과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사회에도 루빈의 선언처럼 “성을 사유할 때”가 이미 오래 전에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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