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작) - 우리가 잠든 사이에
수필(가작) - 우리가 잠든 사이에
  • 이지현(동아시아언어문화학부‧1)
  • 승인 2015.12.02 20:49
  • 호수 28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센병문화상]

한센병 (Hansen’s disease): 나균에 의한 감염증으로 나균이 피부, 말초 신경계, 상부 기도를 침범하여 병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만성 전염성 질환

나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은 노르웨이의 의사인 한센이 처음으로 발견하여 한센병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양성 환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앓았던 병이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일단 병에 걸리면 점점 감각이 사라지며 치료하지 않으면 신경계의 합병증으로 인해 사지의 무감각과 근육의 병적인 증상이 발생하는 병이다. 지금이야 치료가 가능하고 전염성도 그리 강한 편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무시무시한 전염병 중 하나였다.

성경에도 한센병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이 나타나 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한센병을 하나의 죄로써 인식하였고 신의 은총 없이는 결코 완치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한 편으로는 나환자들을 직접 만지신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으며, 나환자들에 대한 종교인들의 의무로서 나환자들을 보살피는 일에 헌신하여 왔다고 한다.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이 나환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한센병을 신의 형벌이라고 여겼다.

이것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한의학에서는 이 병을 가라(痂癩), 풍병(風病), 대풍라(大風癩)라고 하였다. 몸이 문드러진다고 하여 문둥병, 또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천형병(天刑病)이라고도 불렀다. 천형병, 하늘에서 형벌을 내린다는 심한 표현을 쓸 정도로 한센병은 나쁘게 인식되어왔다. 그래서인지 환자들에게는 신체적 고통보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더 큰 아픔이었다.

사람들이 이들을 박대한 가장 큰 이유는 일단 겉모습이었다. 한센병이 발생하는 가장 흔한 부위는 팔꿈치인데 이는 약지와 소지를 갈퀴처럼 변하게 만든다. 심해지면 손가락과 발가락의 끝이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고 한다. 나균이라는 바이러스에 의한 병이기에 면역력이 좋은 사람은 자연 치유가 가능하지만 병의 후유증으로 흉하게 변해버린 모습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반감을 샀고, 병에 걸린 사람들은 사회에서 격리되어 숨어 살아야만 했다. 또한 감염이 되는 병이라는 것도 그들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했던 이유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문둥이’ 라고 비하하며 그들이 자신들의 사회로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였다. 결국 오갈 데가 없어진 환자들은 밀려나고 밀려나 한 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수용된 곳이 바로 그들의 삶의 터전인 ‘소록도’이다.

소록도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던 중, 나는 문득 한 선생님을 떠올렸다. 어느 초등학교 수업 시간, 선생님께서는 수업 도중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어느 섬에 갔던 이야기를 말이다. 섬의 이름은 ‘소록도’였다. 지인의 봉사활동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이 섬은, 지금은 소록대교라는 다리가 생겨서 출입이 간편해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배를 타고 굽이굽이 들어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일반인의 출입은 불가능했고 선생님께서는 완치가 된 환자들이 살고 있는 곳을 청소하셨다고 한다. 그들 중 한 분은 자신들을 찾아와 준 선생님께 너무나도 고맙다며 천도복숭아 하나를 쥐어주셨지만 선생님께서는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 복숭아를 드실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완치된 사람인 걸 알면서도 혹시 전염이 될까 두려웠고 그 손이 생각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천도복숭아를 보면 한센병 환자들이 생각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복숭아를 먹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담임선생님의 말씀은 어린 나의 머릿속에 맴돌며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된 지금에도 아주 가끔씩 그 이야기가 생각나곤 한다. 이렇게 글을 쓰는 동안에도 말이다.

선생님께서 방문하셨던 이 소록도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섬이다.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하여 그 이름도 小鹿島라고 한다. 조용하고, 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는 작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섬에는 슬픈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1916년 일본 조선총독부가 사회격리차원에서 소록도에 병원을 세워 한센병 환자들을 탄압한 사실이다. 일제의 탄압으로 살던 터전에서 쫓겨난 한센병 환자들은 현재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감금실에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았고, 검시실에서는 정관수술과 시체 해부를 당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강제로 격리되어 있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는데 이 때도 감염의 우려가 있어 접촉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를 보며 사람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그 장소를 수탄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군들은 1945년 해방을 맞아 자치권을 요구하던 사람들을 학살하였고 2001년에 그 유골들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500여 명이 남아 살고 있는 마을로, 이미 병은 나았지만 후유증이나 사회부적응으로 돌아갈 수 없는 환자 아닌 환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최근 소록대교가 개통되어 찾기가 더욱 쉬워졌지만 실제 환자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아름다운 경관들이 가득한 중앙정원을 많이 관광하러 가는데 사실은 한센병 환자들의 땀과 눈물로 이루어진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본은 아직까지 이러한 만행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다.

다가오는 2016년에 개원 100주년을 맞이하는 국립소록도병원에는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소록도의 이미지 개선과 한센병 연구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뉴스에서는 한센병에 대한 그 동안의 오명과 편견들을 씻어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노력을 펼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국립 소록도 병원 원장인 박형철 원장은 현재 남아있는 환자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의료체계가 미비하고 적절한 치료방법이 없어 병에 걸리게 된 사람들로, 현재는 완치가 되었고 노화에 따른 만성질환과 후유증으로만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많은 봉사자들이 도움을 주셔서 병원 측에서는 이러한 도움의 손길에 많이 의존하고 있으며 봉사자의 도움이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잇달아 말씀하셨다.

소록도병원은 100주년에 맞춰 100년사 발간, 한센 역사자료 전시관 건립 등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 해소, 인권 신장을 위한 활동을 펼 예정이라고도 전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잘못되고 왜곡된 시선들과 편견들은 한센인(한센병 환자)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무수한 병에 걸리고 회복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이 분들도 무수한 질환 중 한센병에 걸렸다 나으신 분들인데 평생을 그 낙인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가슴이 아프다.”라고 말하며 가슴 아파하던 원장님의 모습은 앞으로 우리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듯하였다. 그 동안의 방송 영상 매체에서는 한센병을 나쁘고 부정적으로 묘사하였고 그 여파로 한센병에 대한 편견들이 쌓여왔다. 이 때문에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에서 많은 부분이 외면되고 폄하되어 왔다. 하지만 소록도에 남은 의료진들과 봉사자들은 소록도를 일제 치하의 산물로 남지 않게 하고자 노력하고 환자들을 성심성의껏 돌봐왔다. 그러면서도 한센병 진단이나 치료방법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이를 보도하며 바로잡아가고 있다. 소록도병원사람들은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한센협력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을 다룬 다큐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이다. 최근 소록도병원은 일본 노자와 카즈유키 감독과 ‘한센 100년 역사 기념사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였다.

이처럼 작은 움직임이라도 노력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큰 날갯짓으로 발돋움하려면 정부, 언론, 시민들의 힘이 필요하다. 정부는 그 동안 일본에서 받아 온 그들의 억압과 슬픔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며, 언론은 잘못된 인식들을 개선시킬 수 있도록 사회여론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민들은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응원해야만 한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도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며, 후손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그 안에서 일을 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도 그들을 위해 한 사람의 몫을 할 것이다. 그 시작은 비록 담임선생님의 사담이었지만 이것이 결국 한센병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 않은가. 나 또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책임을 가지고 한센병에 대해 정확하게 교육시킬 것을 다짐하였다. 그들이 잠든 사이에도 우리가 그들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일러스트‧편집_문해든 디자인 기자

한센병문화상 수필 가작 수상소감_이지현(동아시아언어문화학부‧1)

안녕하십니까. 이지현이라고 합니다. 우선 <우리가 잠든 사이에>를 좋게 봐주시고 이렇게 영광스러운 상까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생소한 분야의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도전일 수 있습니다. 전문 작가는 아니지만 이번의 저 또한 그러하였고 말입니다. 비록 계기는 지나가다 우연히 벽보를 발견한 것이지만,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써나가는 동안은 혹여나 그들에게 누가 되거나 잘못된 내용으로 상처를 안겨주진 않을까 수없이 고민하며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면서 잘못이 아닌데도 숨어 살아야 했던 그들의 안타까움에 통감하게 되었고 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의 사회적 문제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잊고 지내던 동안 사람들은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글은 ‘쓰다’는 표현보다는 ‘찬술하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그들이 한 일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고 제 글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단 한 명이라도 이분들께서 하고 계신 노력에 대해서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을 통해서 작게나마 그들을 위로하고 도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글을 쓰는 게 많이 두렵습니다. 가면 갈수록 자신감을 잃어갔었는데 “그래도 한 번 도전해보자!” 하고 도전한 작품이 상을 받게 되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한센병문화상 수상은 제가 앞으로 꿈을 펼쳐나갈 때도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상을 주신 것에 대해서는 좀 더 노력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더욱 열심히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