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작) - 그곳에서도
소설(가작) - 그곳에서도
  • 신윤철(심리‧4)
  • 승인 2015.12.02 23:29
  • 호수 2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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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대문화상]
내가 지금보다도 더욱 어렸을 적, 한 때의 이야기입니다. 낮엔 파란 하늘을 보는 것이 숨을 쉬듯 자연스러웠고 밤엔 밤하늘의 모든 별빛을 내 눈동자에 모으곤 할 때였지요. 나는 사랑도 몰랐습니다. 그런 호르몬의 작용 대신 내 살갗을 감싸는 산들바람이 내 가슴을 언제나 충만하게 했으니까요.

나의 집은 풀잎들이 소곤소곤 속삭이는 산골 계곡에 있었습니다. 집 앞엔 그래도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문명인 검은 아스팔트 도로가 깔려 있었지만 그곳을 이용하는 여행자는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두어 명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이곳은 나에게 낙원이었습니다. 우리 집 검은 개 브랑이가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헐떡거릴 만큼 뜨거운 여름이 찾아오면 나는 개구리라도 된 듯 계곡물속에서 도통 나올 줄을 몰랐습니다. 넓은 계곡물에 찾아가 형과 물수제비를 뜨며 놀기도 했고요.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 고개를 계곡물에 박고 다슬기를 잡느라 등만 까맣게 타 버린 일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겨울에는 더 신났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세상을 이불로 덮어 버린 듯, 허리까지 쌓인 눈밭에서 물고기처럼 헤엄칠 수 있었거든요. 계곡물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처럼 흘러가려던 모습 그대로 사진처럼 붙잡혀 있었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린 날이면 집 앞 소나무 숲을 찾아가 자존심의 무게만큼 많은 눈을 짊어지고 있는 소나무들을 장대로 탕탕 소리가 나게 털어 주기도 했습니다. 너무 춥고 너무 시린 겨울이었지만 밤하늘의 시린 달처럼 눈에 담긴 모든 형상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봄은 너무나 달콤했습니다. 여름의 타 버릴 듯한 열정도 겨울의 머리끝이 삐쭉 일어설 정도의 아름다움도 없었지만 코끝에서 느껴지는 그 달달한 싱그러움은 내 몸을 포근히 감싸주었습니다. 내 손끝에 스치는 모든 것들이 ‘저 살아있어요!’라고 재잘재잘 떠드는 것 같았지요. 가을은 또 정말 가을이었습니다. 정말 끝이 안 보이는 높은 하늘은 너무나도 파래 바다가 하늘에 떠있는 것 같았고 바라보는 내 눈동자마저 파랗게 색칠 되었습니다. 나뭇잎들은 어떤 화가가 와서 잎사귀 하나하나에 정성껏 갖가지 색깔로 붓질 한 것처럼 너무나도 빨갛고 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난 이런 곳에 살았습니다. 이곳은 온갖 수식어가 필요 없었습니다. 단지 ‘아름답다’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온전히 낙원이었습니다.

내 학교는 읍내에 있었습니다. 내 21단 자전거를 타고 계곡 물을 따라가다 보면 거친 흙 밭도 까만 아스팔트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허벅지가 뻐근해질 때 즈음에야 난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고 나면 나는 한겨울에도 등줄기에 맺힌 땀방울 때문에 책상에 잠시 엎드려 가슴 속의 뜨거움을 토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난 허벅지의 그 뻐근함과 등줄기에 그 땀방울, 가슴 속에 뜨거움이 좋았습니다. 그것들 조차도 나에겐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었으니까요.

자전거를 타고 교문에 들어서면 나는 항상 두근거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두리번거리며 찾게 되는 여자아이가 있었거든요. 어쩌다 우연히 교문에서부터 마주치면 난 냉큼 자전거에서 내렸습니다. 처음부터 원래 내릴 생각이었다는 듯 말이죠. 그리곤 자연스럽게 자전거 핸들을 돌려 그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빨간 티에 물 빠진 청바지, 그리고 작은 운동화를 신은 그 아이에게요. 난 그 아이와 같이 올라가는 그 등굣길이 왜 그리도 좋았을까요. 웃을 때마다 세상이 하얗지는 그 표정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솜털 같은 하얀 볼에 점점이 박힌 주근깨 때문이었을까요. 어쨌든 난 그 ‘혜’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를 ‘좋아’ 했습니다. 그때 내가 알던 말 중 세상에서 가장 낯간지러운 말이 ‘좋아한다’ 라는 말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발에 밟히는 흙부터 들이쉬는 한 모금의 산소까지 모든 것을 쏟아지는 빛의 조각처럼 아름답게 느꼈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두근거림의 마법까지 생생하게 경험하며 그곳에서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어스름한 새벽빛에 눈을 비비며 페달을 밟아나갔습니다. 근 한 시간을 꼬박 밟아야 비로소 친구들과 아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태양보다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태양도 새벽의 정적과 별빛을 몰아내고 난 뒤였습니다. 내 옷은 이미 축축할 정도로 젖어있었고 다리는 딴딴해져 있었습니다. 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대충 훔치며 수돗가 옆 자전거 거치대에 내 자전거를 묶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습니다.

“일찍 왔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내 가슴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뛰어보기라도 한 듯이 콩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 너도..” 나는 말했습니다.

“와 오늘도 자전거 타고 온 거야? 걸어오는 동안 엄청 덥던데. 이야 대단하다.” 아이는 나에게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저렇게도 길게, 나는 엄두도 못 낼 말을 노래처럼 말했습니다.

“응... 별로 안 더워.” 나는 날씨 때문에 붉어진 건지 아이 때문에 붉어진 건지 모를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에이 거짓말. 아주 땀에 푹 젖었네. 가서 세수라도 해야겠다.” 아이의 맑은 눈동자는 나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작고 흰 손을 들어 내 이마를 쓱 하고 훔쳐 주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에 생각해 놓은 온갖 말과 생각들이 뒤섞여 버렸습니다.

“어.. 응 덥다.. 아. 세수.. 알았어” 흩어져버린 말은 조각 조각나 머릿속을 헤맸고 가까스로 입 밖을 탈출한 말들은 잔뜩 토막 나 있었습니다.

“우와 너 정말 더운가 보다 양호실 갈래? 데려다줄게” 아이는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고 나는 더는 버티기 힘들어 교실로 뛰듯이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때 슬쩍 돌아본 아이의 모습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 아이에게 항상 이랬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브랑에게 얘기할 때는 그렇게도 재잘재잘 수다쟁이면서 그 아이에게만큼은 정말 벙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뭐, 나는 좋았습니다. 말을 못한다고 해서 내 가슴이 콩닥거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아이에게 도망치듯 뛰어가 버린 나는 삐걱거리지만 반들거리는 계단을 걸어올라 교실로 갔습니다. 교실 문, 제일 높은 부분에 달린 작은 나무 팻말이 보였습니다. ‘6학년 솔반’ 내가 다니던 6학년은 단 한 반밖에 없었고 내가 사랑하는 학교는 아이들의 꿈을 숫자로 매기지 않겠다는 듯 ‘솔’이라는 향기로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나무로 된 낡은 미닫이문을 드르륵 소리가 나도록 열고 들어간 교실에는 내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읍내에 사는 도시적인 아이들도 있었고 나와 같은 리 단위의 더 시골에 사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여름이면 항상 뜨끈한 태양 아래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라 얼굴은 새까맣게 타 있었습니다. 거뭇거뭇한 낡은 책상들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주인들의 흔적을 나이테처럼 간직한 채 나란히 정렬돼 있고 겨울이면 위에 양은 도시락들이 층층이 쌓여있었을 기름 난로가 차갑게 식은 채 한구석에 치워져 있었습니다. 오래된 칠판은 버텨온 세월만큼 수많은 균열로 가득 차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수많은 지식이 가루가 되어 메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전거를 타느라 뜨거워졌는지 다른 이유로 뜨거워졌는지 모를 몸을 식히기 위해 내 책상에 엎어졌습니다. 그때 어느새 내 옆자리로 온 친구가 내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 왜 이렇게 빨개? 아까 수돗가에서 혜 만나서 그래?” 정이는 익살맞은 표정으로 나를 놀리면서 말했습니다. 정이는 내가 브랑이와 함께 제일 친한 친구였습니다. 이 학교를 통틀어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요. 정이는 항상 웃는 아이였습니다. 시골 아이답지 않게 뽀얀 순두부 같은 볼을 가지고 있었고 달리기도 잘해 여자애들뿐만 아니라 남자애들한테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 읍내에 다른 중학교 형들보다도 훨씬 잘생기고 달리기도 잘했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시험 기간만 되면 정이의 주변엔 여자, 남자애들 가릴 것 없이 언제나 바글바글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말 완벽한 정이와 그냥 모든 것이 평범한 나와 왜 그토록 친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서로 떠들고 뛰어다니는 것이 좋았으니까요.

“아니야! 그냥 조금 더워서 그래, 그나저나 첫 교시 뭐지?” 나는 당황해서 화끈거리는 얼굴을 푹 숙인 채 말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정이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은 바로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지한 내 모습에 정이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습니다.

“수학시간이야.” 나는 정이에게 눈을 흘기며 책가방에서 수학책을 꺼냈고 화제를 돌려 다른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방과 후에 할 축구 이야기라든지, 다른 초등학교에 달리기가 빠른 애가 있다 던 지 하는 얘기들로 우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습니다. 어느덧 수업은 시작됐고 나는 중간중간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하며 필담을 나누기도 하고 흘끔흘끔 아이의 모습을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모습을 정이에게 딱 걸려서 놀림 받기도 했고요. 그렇게 수업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 끝나다 보니 어느새 종례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모두가 가방을 책상위에 올려두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담임선생님이 눈이 부실 만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노파심 때문이었는지, 이것저것 당부의 말씀을 늘어놓으셨고 한두 명씩 고개를 가방에 박았습니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아이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시곗바늘이 계속 돌아가고 거의 모든 아이가 하품을 할 때쯤 선생님이 벌어진 내 입을 단번에 닫아 버릴 말을 하셨습니다.

“ 음 지금까지는 주번이 따로 없이 그냥 보는 사람이 쓰레기를 줍고 보는 사람이 칠판을 지우곤 했는데, 안 되겠다. 이번 주부터 제비뽑기로 2명씩 주번을 뽑는다.”

주번을 뽑는다는 것은 두 명이 일주일 내내 붙어 다닌다는 것이고 제비뽑기로 한다는 것은 그 아이와 내가 그 두 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너무 앞서 나간 것 같았지만 그 아이는 나에게 이미 너무 앞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한 톨의 가능성만으로도 정말 기대되고 행복했습니다.

“그럼, 말 한 김에 지금 이번 주 주번부터 뽑자.” 담임선생님은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라는 말을 중얼거리시며 반장과 아이들을 시켜 종이를 잘라 제비를 만드셨습니다.

“ 자 1번부터 나와서 뽑아”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의 말에 다들 약간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제비뽑기가 들은 작은 상자에 손을 넣었습니다. 이들 중에 동그라미가 그려진 제비를 기대하는 아이는 나밖엔 없는 것 같았습니다. ‘14번’ 내 번호였습니다. 내 앞에 13명의 아이가 있다는 소리였고 나는 13명의 아이 중 누군가 동그라미가 그려진 제비를 뽑는 일이 없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남들 몰래 가슴팍에 작은 십자가를 그리기까지 했습니다. 한 명, 두 명 제비를 뽑아갔고 내 차례, 나는 떨리는 손을 숨기며 최대한 나도 주번이 걸리기 싫다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작은 상자는 마치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그리스 로마신화 판도라의 상자와 같았고 그 검은 구멍은 마치 다른 세계로 이어진 통로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긴장하여 하얗고 뻣뻣해 마치 과학실의 해골 같이 변해버린 손을 그 다른 세계로 넣어 버렸습니다. 나는 고민했습니다. 손가락엔 아직 여러 개의 꺼끌꺼끌한 종이들이 있었거든요. 그 남은 종이들을 나는 짧은 시간 안에 스치며 모조리 검사했고 영원 같은 찰나의 고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정지한 시간에 나는 한 가지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한순간에 그 긴박한 공간에서 내 손을 빼내었습니다. 손안엔 꼼꼼히도 접혀 꼬깃꼬깃한 쪽지가 있었습니다. 나는 저번 기말고사 성적표라도 확인하듯 숨죽인 채 종이를 펼쳤습니다. 동그라미. 기대했던 절반의 성공이었습니다. 옆에서 내 쪽지를 구경하던 아이들은 와하하 웃으며 안됐다는 듯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내 맘속에도 마찬가지로 와하하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물론 얼굴은 울상 인체로 말이죠. 내가 제비를 뽑은 후 또다시 가위표의 행진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차례, 남들은 모두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지만 내게 그 순간은 슬로우비디오이었습니다. 아이가 그 하얀 손을 상자에 집어넣고 종이를 꺼내는 순간 내 목구멍으로 한 모금의 침이 넘어갔습니다. 아이는 자기만 보겠다는 듯 팔을 가슴 가까이 당긴 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리곤 종이를 그 고운 손으로 꼼지락거리며 펼쳤습니다. 잠시 후 아이는 고개를 들었고 아이의 눈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나를요. 그 얼굴은 내가 장담하건대 절대 싫은 티 따위는 없는 표정이었습니다, 해맑은 그 하얀 웃음을 주진 않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작은 미소가 눈가에 살짝 걸려있었으니까요.

“동그라미에요” 아이는 알다가도 모를 듯한 얼굴로 담임선생님께 말했습니다,

“좋아 그럼 둘이서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주번이다. 둘은 뒷정리하고 집에 들어가, 그럼 내일 보자!” 선생님은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고 교실을 나가셨습니다. 아이들도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와아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 뛰쳐나가 버렸고요. 정이 조차도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린 후 내 귀에 ‘좋겠다.’ 라는 말만 남기고 뛰어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파도처럼 휩쓸려 나가는 동안 나는 멍해진 얼굴로 그 아이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우연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마치 소설 속에서나 읽어봤던 장면 같았습니다. 배경도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나의 이런 행운을 축복이라도 해주는 듯, 커튼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들이 마치 나와 그 아이가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둘만 비추고 있었고 그 빛의 물결은 하늘하늘하며 우리 주변을 맴돌면서 춤추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환상과 현실 사이에 끼어 허우적대고 있을 때 아이가 말을 걸었습니다.

“칠판부터 지울래?”

“브랑아 오늘이 진짜 최고의 날 인 거같아” 나는 너무나도 들떠있었습니다. 행복이라는 호수에 풍덩 빠져 그 즐거움의 에너지를 개구리처럼 온몸으로 빨아들인 기분이었습니다. 같은 땅 위에 가만히 한시도 서 있을 수 없었고 온몸이 저릿저릿해 감전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혜랑 나랑 일주일 동안 주번이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지?” 나는 브랑의 등위에 올라가 뒤에서 브랑의 목을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브랑은 그런 내가 귀찮기라도 한 듯 고개를 휘휘 저으며 내 손을 풀려 애 썼지만 곧 포기하고 풀밭에 엎드려 내 손만 핥아댔습니다. “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말이지.. 혜랑 나랑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같이 있는 거야! 단둘이! 그리고 오후에도 마찬가지로 단둘이서 학교에 남아있는 거지. 오늘은 같이 칠판도 지웠다고 그것도 혜가 먼저 지우자고 그랬다? 좋겠지?” 나는 브랑을 껴안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재잘재잘 떠들었고 브랑은 내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내 손과 자기의 손을 혀로 핥을 뿐이었습니다. 난 곧 브랑의 침으로 손이 침 범벅이 되어버렸지만 손을 바지에 스윽 닦고 다시 브랑에게 오늘 있었던 두근거렸던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난 언제나 이런 식으로 브랑에게 학교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브랑은 내게 있어 단순한 애완견이 아닌 친구였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정이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정이에게도 못하는 말을 브랑에게는 다 할 수 있었습니다.

브랑은 참 멋진 개였습니다. 검고 짧은 털은 햇빛을 받으면 물고기처럼 반짝반짝 빛났고 그 커다란 덩치는 일어서면 나보다도 다섯 뼘은 더 컸습니다. 그리고 턱에 축 늘어진 가죽과 얼굴에 주름은 마치 노련한 사냥꾼을 보는 듯했습니다. 브랑은 항상 내 얘기를 잘 들어줬습니다. 마치 관심 없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내가 엄마에게 혼날 때나 다쳤을 때는 말없이 와서 얼굴을 핥아 주는 그런 멋진 친구였습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매일매일 브랑에게 달려갔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큰 주목 아래, 그늘진 잔디밭에 앉아 브랑을 끌어안고 늘어지게 자고나면 난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브랑아 그럼 나 들어갈게. 밥먹고 있어” 나는 한참 동안 떠들어 대던 수다를 그만두고 브랑의 사료를 내 마음만큼 양껏 퍼주며 말했습니다. 엄마는 브랑이에게 밥을 많이 먹이면 살만 찐다고 반만 퍼주라고 하셨지만, 엄마가 없을 땐 몰래 이렇게 밥그릇 가득 사료를 채워주곤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마치 브랑과 나만의 새로운 비밀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거든요. 그렇게 하면 브랑도 내 맘을 알고 그 윤기가 흐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밥을 맛있게 먹어치웠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습니다.

“어 브랑아 왜 그래? 입맛 없어?” 언제나 밥 먹을 때 자기 덩치값을 하던 브랑이가 오늘따라 사료 냄새만 킁킁 맡더니 고개를 휙 돌려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날 보며 살랑살랑 흔들던 꼬리도 오늘은 잔뜩 풀이 죽어있었고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윤기가 흐르던 털빛도 오늘 따라 좀 칙칙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아까는 아이의 일 때문에 너무 흥분해 브랑에게 내 얘기를 하느라 바빴었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브랑의 상태가 좀 이상했습니다.

“어디 아파?” 나는 브랑에 이마에 손을 올리며 물었지만 브랑은 언제나처럼 그 무심한 표정만 지을 뿐 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좀 걱정이 됐지만 오늘 브랑의 기분이 흐림이겠거니 하고 넘어갔습니다. 전에도 가끔 이런 적이 있었거든요. 항상 이렇게 무심한 표정을 짓지만 바늘 끝 같이 섬세한 감성을 지닌 녀석이라 내가 브랑 말고 다른 개 나 물건에 관심을 보이면 토라지곤 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너무 아이의 얘기에만 집중해서 브랑이가 기분이 좀 안 좋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이 화났구나? 미안 브랑아,,” 난 브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토라진 브랑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내 가장 친한 친구니 곧 다시 내 얼굴을 핥고 밥을 우걱우걱 맛있게 먹을 거란 생각이 든 나는 브랑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밥 맛있게 먹고 내일 봐” 브랑이는 주목 아래, 모자이크처럼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하게 된 일주일은 정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13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이 산속의 작은 마을과 학교를 초월한 어떤 미지의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B612 소행성에서 지구로 도착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요?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은 형형색색의 유리판을 눈앞에 끼워 놓은 것처럼 기묘했지만 아름다웠습니다. 혀로 느껴지는 맛과 코끝부터 내 가슴 깊은 곳을 통해 온몸으로 파고드는 모든 것들은 달콤하였습니다.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와 그 아이와 단둘이 청소를 하고 남들보다 한 시간 더 늦게 남아 그 아이와 있는 것뿐인데 단 두 시간으로 나의 스물 네 시간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그 아이에 대한 나의 말과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아이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사과처럼 빨개지고 굳어버리던 나는 이젠 자연스럽게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연필을 안 가져 왔을 때 빌려달라고 부탁까지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니까요. 그런 행복했던 일주일은 정말 빨리 흘러갔습니다. 하룻밤 사이,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사라져 버린 꿈처럼 반짝이는 순간이었지만 결과만큼은 속이 텅 빈 꿈과는 달리 꽉 차있었습니다.

주번이 끝난 후에도 나는 아이에게 한 걸음 다가간 거리를 다시 뒷걸음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내 속마음만 말한다면 ‘나와 그 아이’에서 이젠 ‘우리’라는 말을 써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주번이 끝난 후, 수업시간에 두리번거리던 내 눈이 아이와 마주칠 때문 ‘우린’ 같이 웃을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우리가 가까워질수록 정이의 장난은 훨씬 심해졌습니다. 내가 아이를 보고 웃을 때면 정이도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검지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어대곤 했습니다. 나도 지지 않고 정이의 어깨를 내 어깨로 툭툭 치며 수업이나 들으라는 무언의 눈빛을 날렸지만 그래도 정이의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다가가는 시간이었습니다. 풀잎을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나는 아이에게 여행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브랑은 여전히 조금 화나 있었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한 이후로 밥도 계속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기운이 없었습니다. 내가 장난을 쳐도 브랑은 내 얼굴을 한번 스윽 핥은 뒤 풀밭에 턱을 늘어뜨린 채 잠을 청하곤 했습니다. 처음엔 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브랑에게 맛있는 것도 많이 가져다주고 장난도 계속 쳤지만, 시간이 흘러도 삐져있는 브랑에게 나도 화가 나 버렸습니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래? 쳇! 됐어. 밥 먹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이렇게 한바탕 소리를 질러 버린 나는 브랑에게 매일 찾아가 풀밭에 엉켜 있곤 하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산책하러 가거나 계곡으로 놀러갈 때도 브랑을 빼고 놀러갔습니다. 그때의 난 가장 친한 친구가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서운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아이에게 다가간 거리만큼 브랑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이 가장 고대하는 일은 체육대회였습니다. 시골 학교인 만큼 아이들은 뛰어노는 걸 좋아했고 그런 아이들에게 온종일 뛰어놀 수 있는 체육대회는 정말 신나는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저마다 자신 있는 운동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기대되는 종목은 달리기였습니다. 우리는 체육대회가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학교에서 누가 제일 빠른지, 이번엔 누가 우승할지에 대해 점쳐봤습니다. 달리기야말로 우리 사이에서 가장 인정받는 것 중 하나였고 가장 빠른 아이는 모든 남자아이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빠른 아이는 바로 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도 달리기는 꽤 자신 있는 편이어서 정이와 종종 비교되는 몇몇 남자아이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에게 최근 들어 가장 큰 관심사는 앞서 말했던 체육대회였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번 체육대회 달리기에서도 과연 정이가 또 1등을 할 수 있을까?’ 가 맞는 말 이였습니다. 남자아이들은 모두 쉬는 시간만 되면 그 얘기를 꺼내 들었고 여자아이들도 한두 명씩 섞여 들어와 재잘 재잘 떠들어 댔습니다. 물론 나도 관심이 많았고 아무리 정이와 가장 친한 친구여도

체육대회 달리기 1등이라는 자리에는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이 또한 그런 내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내 웃음기 가득한 도전을 웃으면서 받아주었습니다. 내가 체육대회에서 1등을 하고 싶은 이유는 아이 때문도 있었습니다. 당당히 1등을 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뽐내고 나면 아이 또한 날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나의 머릿속은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 좋은 상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게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아이와의 설레는 일들로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어느덧 체육대회 날이 다가왔습니다. 아이들의 기대와 흥분은 최고조로 달했고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오늘은 특별히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습니다. 버스를 타려면 태양의 머리칼도 보이지 않을 만큼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오늘은 결전의 날이기에 다리를 좀 쉬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버스 안은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팔뚝에 살들이 뾰족뾰족 올라올 만큼 쌀쌀했습니다. 나는 양손으로 팔짱을 끼어 팔뚝을 비비며 버스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머릿속에 오직 ‘1등’이라는 등수만 되뇌었습니다. 버스는 새까만 공기 속을 가르며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체육 대회 날 학교는 언제나 살아있었습니다. 학교가 심장이라면 체육 대회 날 학교는 한바탕 달리기라도 한 듯 빠르고 크게 고동쳤습니다.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복도, 수돗가, 운동장 등 어디든 뛰어다니고 스탠드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열심히 붉은 목소리를 내며 응원을 하였습니다. 그런 뜨거운 학교에서 나는 정이와 함께 운동장 농구 골대에서 달리기를 위해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정이야 오늘은 꼭 이길 거야”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음 저번에도 너 그 소리 했잖아” 정이는 재밌다는 듯 그 하얀 얼굴로 씩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지면 정이에게 저번 체육대회까지 합쳐 내리 3번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했던 체육대회에서는 정말 누가 봐도 간발에 차로 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번만큼은 정말 1등에 대한 기대감이 남달랐습니다. 정이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있던 나는 아침과는 달리 푹푹 찌는 날씨에 뛰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열기에 난 수돗가에서 세수라도 할 생각으로 정이에게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수돗가로 향했습니다. 우리 학교에 수돗가에는 등나무가 자라 파란 잎들이 공중에서 얽히고 설켜 푸른 하늘 아래 파란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수도 주변도 모두 파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어 수돗가에 오면 온통 파래, 숨 쉬는 공기조차 하늘색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수도꼭지를 틀고 고개를 돌려 꼭지에 입을 가져댄 후 쏟아져 나오는 파란 물을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겼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물을 마시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한 여자아이들의 무리가 다가왔습니다. 그 아이들도 똑같이 이 진한 날씨에 지쳤는지 물을 마시러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 아이가 있었습니다. 내가 그 아이들을 바라보자 내 눈은 오직 아이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카메라가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아이 외엔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으니까요.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왔습니다.

“정이가 또 1등하겠지?” 그중 한 아이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물론이지 근데 정말 정이는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달리기도 잘하고...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아” 정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정이는 어디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종종 저렇게 이야깃거리가 필요한 여자아이들에 입에 항상 오르내렸습니다. 나는 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장 친한 친구로서 무언가 뿌듯한 느낌에 빠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습니다.

“역시 혜가 좋아할 만해 그치 혜야?” 누군가 말했습니다. 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무언가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자아이가 했던 말이 송곳처럼 내 귀를 정확히 노리고 날아와 내 고막에 파고들었습니다. 너무나 정확해 잘못 들은 거란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내 귀로 밀려오는 아이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구령대 체육 선생님의 방송처럼 내 귓가에서 계속해서 휘몰아쳤습니다. 나는 순간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담아 두질 못했습니다.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난 것 같았습니다. 떠오르는 모든 말과 생각들은 욕조에 난 구멍에 물이 빠지듯 소용돌이치며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고 아이에게 맞춰져 있던 내 카메라의 렌즈는 다시 초점을 잃고 울퉁불퉁한 유리알처럼 흐릿해졌습니다. 아이와 아이들은 그렇게 몇 마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수돗가엔 다시 나 혼자가 되었습니다. 내 앞에 수도꼭지는 여전히 파란 물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내 얼굴과 머리칼에 묻은 물은 내 볼을 타고 턱 끝에서 만나 한 방울씩 방울져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요. 나는 손을 들어 아직 틀어져 있던 수도꼭지를 힘을 주어 꽉 잠갔습니다.

확성기에서 흘러나온 둥둥거리는 체육 선생님의 음성이 파란 하늘에 목화 같은 흰 구름과 함께 헤엄쳐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나는 출발선에 서 있었습니다. 수돗가에서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일들이 있었고 언제 내가 이곳에 이끌려 이 하얀 출발선에 서 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단지 내 옆에 다른 여러 명의 아이와 내 가장 친한 친구 ‘정’이가 서 있다는 것, 이제 곧 눈앞에 보이는 방아쇠가 당겨지면 뛰어야 한다는 것밖에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출발 준비를 의미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나와 아이들, ‘정’이는 몸을 숙이며 뛰쳐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방아쇠가 당겨지기 직전 그 짧은 순간, 나는 정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정이는 항상 그렇듯 나를 보며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보기만 해도 내 기분이 좋아져 같이 씨익 하고 웃어줬을 텐데. 나는 오늘따라 왠지 그 얼굴이 미웠습니다. 결국 난 더 이상 정이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얼굴을 홱 하고 돌려 버렸습니다. 모두가 긴장된 가운데 일순간의 정적이 흐르고 ‘탕’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갈랐습니다. 그 소리에 나의 몸은 자연스럽게 뛰어나갔습니다. 평소와는 느낌부터가 달랐습니다. 내 다리는 사슴처럼 쭉쭉 뻗어 나갔고 내 앞을 가로막던 공기들이 깜짝 놀라 내 옆을 비켜 지나가는 것들이 느껴졌습니다. 매일 매일 타고 다녔던 자전거 덕분인지 몸은 날듯이 가벼웠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새처럼 날아올라 정이와 아이가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어느새 출발선에 같이 서 있던 아이들은 사라지고 내 바로 옆엔 정이 혼자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정이는 역시 빨랐지만 정이의 얼굴에는 저번 체육대회 때 보았었던 여유 있던 얼굴과는 다른 힘든 기색이 보였습니다. 나는 정이의 표정을 보면 왠지 오늘만큼은 정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꼭 이기고 싶었습니다. 이겨야 할 새로운 이유가 생겼다고나 할까요.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이유인진 잘 모르겠지만, 그 이유가 나에겐 지금까지 가졌던 이유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달렸습니다. 점점 정이와 나의 거리가 벌어졌습니다. 거리가 벌어질수록 그 거리가 정이와 나에 관계의 거리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눈앞에 점점 결승점이 다가오고 가로로 길게 늘어진 흰 줄은 점점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1등이었습니다. 정이와 나와의 차이도 크게 벌어졌고 나는 여전히 이상하리만치 힘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행복했던 1등의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자 정이와 아이의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며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주변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응원과 환호성의 파도 속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툭 하고 튀어나왔습니다. “정이야 힘내!” 소란스러운 응원들 사이에서 저 작은 울림은 어떻게 내게 다가왔을까요? 크지도 않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결승점이 얼마 안 남은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스며들어와 작은 면도날처럼 변해 내 마음 한쪽을 스쳤습니다. 로봇같이 튼튼하게 운동장을 달리던 내 다리는 배터리가 다 되어버린 것처럼 힘이 풀렸습니다. 내 눈앞에 보이던 꿈같은 결승점은 순간 내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나는 눈을 꽉 감았고 질끈 감은 만큼 귀도 닫혔는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요. 다시 주변에 시끄럽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작게 들리던 그 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모두 정이를 향한 소리였습니다. 코끝에 운동장에 진한 흙냄새가 맴돌았습니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떴습니다. 왠지 모든 것이 까매져 있을 것 같았던 내 생각과 달리 눈앞에 보인 세상은 여전히 파랬습니다. 바다가 떠 있는 것처럼, 하늘은 여전히 파란 물결로 가득 찼고 그 위에는 하얀 조각배가 평화롭게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불쑥 한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정이었습니다. 정이는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습니다.

“괜찮아?” 갑자기 코끝이 찡했습니다. 목구멍에서 무엇이라도 나올 것 같았고 눈은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나는 잘 안 움직이는 팔을 들어 눈을 가리며 말했습니다.

“어 괜찮아.” 내 목소리는 안에서 무언가에 꽉 막힌 것을 밀고 가까스로 기어 나왔습니다. 정이는 걱정된다는 내용의 몇 마디와 잘 달렸다는 둥 말을 했지만 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일어났습니다. 저기 멀리 아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괜찮으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며 걸어갔습니다. 무거워진 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일러스트_문찬희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길게 늘어지고 잔상을 남기며 떠나갔습니다. 모든 풍경이 나와 마주 친지 얼마 안 된 것 같았지만, 어느새 내 뒤편으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까 전부터 평소에 보이던 초록빛을 잔뜩 머금은 나무들과 계곡 물, 멀리 보이는 고라니들이 왠지 일그러져 보였습니다. 내 앞을 막고 있는 버스의 창문 때문인 것 같아 창문을 열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쨌든 무언가 버스를 탄 것이 문제처럼 느껴져 다시는 버스를 타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달리기하다가 다친 상처가 갑자기 아파지기 시작했습니다. 몰랐었는데 무릎과 팔꿈치가 까져 빨갛게 안쪽 살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괜찮았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것은 가슴팍 한구석이 쥐가 난 것처럼 저리고 아픈 것이었습니다. 난 처음 느껴보는 낯선 느낌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왠지 이것도 버스를 타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날 하루는 정말 이상한 하루였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도 미워 보이고 항상 같이 장난치던 정이도 미워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아까 전부터 아려오던 가슴은 여전히 쿡쿡 쑤시고 있었습니다. 나는 집에 도착했지만 이 이상한 기분 때문에 도저히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요새 토라져 얘기도 잘 안 하던 브랑에게 다가갔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친구는 지금 브랑 밖에는 없어 보였거든요. 브랑은 평소처럼 주목 아래 풀밭에서 누워있었습니다. 브랑은 다가간 나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새 어색해진 사이 때문인지 아직까지 내게 화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브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아이를 핑계로 또는 내 자존심을 핑계로 너무 못 돌봐 주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브랑에게 다가가 브랑을 힘껏 끌어안고 풀밭에 가만히 누웠습니다. 브랑의 짧고 검은 털을 통해 따뜻한 온기가 내 드러난 살갗들을 타고 가만히 내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브랑은 고요했습니다. 원래 다른 집 개들처럼 천방지축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무심하게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이상했습니다. (오늘 내게 일어난 많은 이상한 일들은 아직 끝이 아니었나 봅니다.)브랑의 숨소리가 좀 달랐습니다. 나는 항상 브랑을 껴안고 이 풀밭에 누워 자곤 했기 때문에 브랑의 숨소리를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천천히 움직이던 브랑의 단단한 가슴은 오늘따라 이리저리 제멋대로 움직였고 미세하게 벌어진 입 사이에서도 뜨거운 공기가 쉭쉭하며 불규칙적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이건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토라졌거나 어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픔’이었습니다. 내 머릿속으로 브랑이가 지금까지 했던 행동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이상한 행동들은 단지 괴로움과 고통의 표현이었습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브랑이에게 혼자 화를 내고 무시하고 소홀했던 것이었습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이에요. 난 아까 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저릿함이 점점 더 자라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잠시 지쳐 메말라 있던 내 눈엔 다시금 물방울이 솟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브랑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습니다. 마치 유리구슬을 통해 바라본 것처럼 브랑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지고 더욱 아프게 보였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집으로 뛰쳐 들어갔습니다.

“엄마 엄마! 브랑 왜 저래? 아파!” 다급한 내 목소리에 엄마는 담담하고 조용한 말투로 브랑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엄마의 말인즉슨 브랑은 몇 주 전부터 아팠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 보여 시내에 동물 병원에 데려 갔었는데 수의사 분께서 이미 병이 너무 깊어 어떻게 손 쓸 수가 없다고 하셔서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의 말을 들은 나는 무언가에 크게 부딪힌 기분이었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머릿속에선 브랑이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의 모습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이 오래된 사진함을 쏟은 것처럼 한 번에 와르르 쏟아져 이리저리 흩날렸습니다. 내 입은 계속 엄마에게 무언가를 외쳐댔고 엄마는 그런 나를 깊게 끌어안아 줬습니다. 나는 품 안에서 서럽게 울어댔습니다.

엄마의 품 안에서 한참을 운 나는 엄마와 같이 브랑에게로 갔습니다. 브랑의 목줄이 보였습니다. 브랑은 어릴 때부터 힘이 세서 튼튼한 쇠줄로 묶어 놓았었는데 그마저도 브랑은 종종 힘으로 휘어버리거나 끊어서 우리 집 마당을 휘젓고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목줄이 노끈으로 보일 정도로 항상 건강했던 브랑에게 오늘 목줄은 매달고 있기조차 버거운 거대한 쇠사슬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조용히 브랑의 목에 걸린 목줄을 풀어주었습니다. 평소 같았더라면 목줄을 풀려고 다가오는 내 발걸음만 봐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껑충껑충 뛰어댔겠지만 오늘 브랑은 병의 아픔 속에 빠져있느라 내 손길을 느낄 겨를 따윈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브랑의 옆에 누워 다시 한 번 가만히 손을 들어 가슴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나는 브랑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잠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행복한 꿈이었습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와 나는 단 둘이 이 산속과 계곡을 뛰어다녔고 처음 보는 어떤 넓은 풀밭에서 서로 장난치며 뒤엉켜 있었습니다. 꿈속에서 그 친구는 장난기가 어리면서도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도 또한 가장 친한 친구를 응시했습니다. 친구는 내게 조심스럽게 다가왔고 나도 또한 그 친구에게 다가갔습니다. 그 친구의 얼굴은 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어느 순간 혜라는 이름의 아이로 바뀌기도 했고 브랑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바뀌었다기 보다는 그냥 그 친구는 정이이자 혜이자 브랑이었습니다.

셋은 같은 아이였고 동시에 다른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꿈속에서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꿈결 같은 행복한 시간이 점점 흐르고 친구는 내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인사를 하는 그 얼굴은 왠지 브랑인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곧 몸을 돌렸고 꽃내음과 풀 냄새가 가득한 숲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사라져 갔습니다. 나는 친구를 놓치지 않으려고 끝까지 달렸으나 친구는 점점 사라져갔습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내 온몸은 아침에 물안개 속에서 한참 헤매고 다닌 듯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가슴속엔 아직도 꿈에 여운이 남아 심장을 두근두근 뛰게 했습니다. 나는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나는 아까 브랑과 함께 누워있던 자리에 브랑과 그대로 있었습니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져 있었고 숨 막힐 듯 파랗게 물들어 있던 하늘은 밤의 요정이 실수로 빛의 가루를 쏟아 버린 듯 찬란한 빛의 입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달은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밝아 내 품 안에 있는 브랑의 털빛이 반짝거릴 정도였습니다. 브랑은 아까와 달리 많이 진정 되어 있었습니다. 불규칙적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뛰던 가슴은 고요한 고동만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그 평화로움은 마치 모든 세상의 것을 놓아버리고 임종을 기다리는 노인의 그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브랑을 나는 긴 낮잠 중에 꾸었던 꿈 때문에 불안한 떨림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브랑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내가 꿈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들꽃 향으로 가득한 푸른 들판에서 브랑이 떠나 고통스러워 할 때도 브랑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나는 바랑의 머리를 잡고 나의 볼을 브랑의 볼에 가져다 대었습니다. 그리고 접힌 브랑의 귀를 펴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요 며칠 사이 브랑에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던 말, 오늘 있었던 정이와 아이가 미워졌던 이야기,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까지... 나는 내가 쏟아내는 언어의 한 조각까지 어디론가 흩어질까 두려워 브랑의 귓속 가까이에서 조심스럽게 한없이 속삭였습니다. 브랑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작은 숨소리를 내뱉었고 그 숨소리는 내 귀를 간질였습니다. 우리의 대화에 방해될 만한 것들은 없었습니다. 숲 속의 풀벌레들조차 우리를 의식하고 숨죽이고 있는 듯했으니까요. 끝없이 쏟아질 것 같았던 나의 고백은 서서히 끝이 났습니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나는 브랑에게 가장 하기 싫었던 마지막 말을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꺼내었습니다.

“정말 미안해.. 잘 가” 말 속에 가시가 달린 듯 저 말은 내 목구멍을 잔뜩 할퀴며 튀어나왔습니다. 잔인하게만 느껴지는 말은 기어코 브랑에게 닿았습니다. 브랑은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마지막 힘을 다해 내 볼을 핥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 쉬더니 브랑의 마지막 영혼의 조각을 길게 내뱉었습니다. 브랑은 그렇게 서서히 눈을 감았습니다. 무언가 작은 빛의 조각이 나와 브랑을 한 바퀴 크게 휘어 감고 저 멀리 별들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나는 별빛과 달빛이 서린 어둠 속에서 숨죽여 울었습니다.

집 뒤에 작은 동산은 어제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너무나도 아름답게 녹음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나는 잠깐 동안 내 곁에 브랑이 머물었던 브랑의 몸을 내려놓았습니다. 집 바로 뒤에 있는 동산이었는데도 브랑의 커다란 몸은 나를 땀이 뻘뻘 나게 하였습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나는 들고 있던 삽을 부드러운 흙에 깊게 박아 넣었습니다.

눈물은 멎었습니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것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끝을 모르고 흐르던 내 눈물처럼요. 몸이 너무 아팠습니다. 까진 무릎과 팔꿈치는 다친 날엔 그냥 조금 쑤시는 정도였다가 날이 밝자 제대로 아려왔습니다. 나는 하얀 약 상자에서 빨간약을 꺼내어 까진 부위에 발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팠습니다. 눈물은 멎었지만, 여전히 나는 아팠습니다. 다치고 피가 흐르는 곳엔 빨간약을 발라 괜찮아졌지만 내 가슴 깊은 곳에 난 이 작은 상처는 여전히 바늘에 찔린 듯 아려왔습니다. 내 눈에 눈물은 더는 나오지 않았지만, 왠지 가슴 속을 들여다보면 내 가슴속은 눈물로 가득 차있을 것 같았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남방의 단추를 끌렀습니다. 나는 빨간 통을 열었고 내 검지를 가만히 그곳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빨갛게 젖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계속해서 가슴 한구석을 문질렀습니다. 빨간 약이 내 가슴 깊숙이 스며들 때까지요.. 하지만 약은 계속 가슴을 따라 흘러내렸습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다시 한 번 빨간 약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가슴 한쪽에 ‘아픔’이란 글자를 적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메마른 줄 알았던 내 눈에서 다시 한 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소설 부문 가작 수상소감_신윤철(심리‧4)

시간은 흐릅니다. 그렇게 물살처럼 정신없이 흘러내려 가다 잠시 웅덩이에 고일 때, 우린 흘러왔던 저기 어딘가 쯤을 바라봅니다. 그때의 내 흐름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부서지는 물살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내가 넘었던 돌덩이는 얼마나 높았는지 곱씹어 봅니다. 제 짧은 인생에서 고여있던 시기는 군대 시절이었습니다. 언젠간 돌아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던, 오히려 지금 생각하면 잔잔할 수 있어 아름다울 수 있던 그 시절 전 그 정체 속에 낙담했습니다. 그때 할 수 있던 유일한 저항이자 도피는 잠들지 않는 밤 종이에 끄적이며 상처조차 한없이 예뻤던 저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출품작 '그곳에서도'는 그때 써 내려간 저의 일기장입니다. 가대문화상을 준비하며 군 시절 저를 위로 했던 끄적거림을 다시금 정돈하게 되었습니다. 그땐 어린 시절이 그렇게 한없이 예뻐 보였는데 지금 다시 그 위로를 정돈하며 그때를 바라보니 그 힘든 시기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흐르는 물살 속에서 다시 잠시 고여 어린아이인 저와 새벽녘 작은 불빛 속에서 글을 써 내려가던 두 사람의 저를 다시 반추할 수 있게 해준 가대문화상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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