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 인권의 시작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 인권의 시작
  •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사무국장
  • 승인 2016.06.02 16:10
  • 호수 2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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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해도 돼 - 4 성소수자 인권
장면 하나,

2010년 SBS 방송에서 방영했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드라마에 젊은 게이 커플이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극본을 쓴 작가 김수현 씨는 내놓는 작품 대부분이 대가족을 기본 배경으로 하고 있을 만큼 보수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던 터라 당시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개신교계를 비롯한 일부 동성애 반대단체는 드라마 방영을 중단하라는 신문의견 광고까지 냈다. 그때 낸 신문광고 제목은 “<인생은 아름다워>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 “며느리가 남자라니 동성애가 웬 말이냐!” 등이었다.

장면 둘,

2015년 대전광역시청과 시의회는 양성평등 조례 제정을 앞두고 지역 여성단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남성과 여성의 차별금지뿐만 아니라 성 소수자 차별금지 내용을 넣은 ‘성평등조례’로 일부 내용을 확대 수정하여 제정했다. 그러자 지역 내 개신교계에서 성 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이 동성애를 미화하고 확산시킬 수 있다며 조직적으로 조례 제정을 반대했다.

결과는 반대운동을 못 이긴 시의회가 제정 한 달 만에 성평등조례를 성 소수자 조항을 삭제한 양성평등 조례로 재개정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두 가지 장면의 공통점은 우리 사회 일부가 가진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 정서와 그로 인한 반대가 꽤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차분하게 한국 사회의 성 소수자에 대한 논란을 살펴보면 논쟁의 시작점과 문제의식, 방향성 등이 모두 심하게 뒤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언제부턴가 성 소수자라고 하면 모두 남성 동성애자(게이)라고 치부하면서 그에 대한 혐오와 반대 논리가 범람하고 있는데 사실 성 소수자의 세계는 생각보다 넓고 세밀하다.

통상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영어 앞글자를 딴 ‘LGBT’라는 단어로 성 소수자를 지칭했는데 현재는 그 범위가 더 확장되어 퀘스쳐너(Questioner, 아직 자신의 성 정체성, 성적 지향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 남녀 한 몸(Intersexual), 무성애자(Asexual)를 더한 ‘LGBTQIA’까지를 성 소수자의 범위에 넣고 있다.

지역마다 인권조례 제정을 앞두고는 어김없이 성 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에 대한 반대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의 진위와 상관없이 그 의견의 절대다수는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사례를 예로 들어 성 소수자 전체를 공격하고 있는 형국이다. 게이 외의 다른 성 소수자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매번 되풀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되짚어 봐야 할 논란 중의 하나는 과연 ‘동성애 반대’라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는가이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자체를 조직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영역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누군가로 정할 것인지는 그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지 서로 사랑하는 존재적인 현실 자체를 권력이나 법률로 강제 반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앞서 게이 커플이 등장한 드라마를 반대하는 신문광고나, 성 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이 들어간 조례를 반대하는 단체가 주장하는 내용도 동성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성적 정체성은 선천적으로 부여되며 삶의 과정에서 형성,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고유한 권한이다. 그러므로 동성애 성적 정체성은 단순히 드라마나 영화를 봤다고 생겨날 수 없으며 법률로 그들의 차별을 금지한다고 해서 갑자기 늘어날 수도 없다.

이러한 사실은 성적 소수자의 권리가 비교적 제대로 보호되고 있는 외국의 사례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며 멀리 외국까지 갈 필요 없이 수많은 논란 끝에 성 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이 포함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한 서울, 경기, 광주, 전북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례 제정 당시 미성숙한(?) 청소년들이 동성애에 물들 수 있다며 종교계를 비롯한 일부 보수단체에서 주장했지만, 해당 지자체들이 그들의 주장대로 게이나 레즈비언의 해방구가 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성 소수자들에 대한 공격의 대부분이 무지와 그에 기인한 혐오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성 소수자에 대한 불편한 진실도 간혹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가진 도덕적, 윤리적 잣대가 유독 성 소수자에게만 엄격하거나 가혹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 내국인들의 범죄에는 무감각하다가 어쩌다 한번 일어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범죄를 가지고 그들 모두를 죄인으로 대할 수 없듯이 성 소수자도 성적 정체성을 제외하고는 이성애자와 다른 것도 딱히 없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합법적인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중독성이 약한 마약류의 매매가 허용되며, 일찍이 성 소수자의 권리가 확립된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liberal) 나라로 손꼽힌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자유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16세기 수만 명이 죽어간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다른 유럽지역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의 유대인이 죽어간 2차 세계대전의 뼈저린 반성을 통해 오늘날의 관용과 자유주의 기풍을 확립한 것이다.

한국 사회가 성 소수자들을 대하는 분위기는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긍정적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정치, 종교계를 비롯한 사회 주도 계층에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부문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굳이 네덜란드와 같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현재 성 소수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그들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시적인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반기문 사무총장마저 동성애 권리를 주장하는 UN의 일관된 정책을 보면서, 불가능하리라 싶었던 동성 간의 혼인을 허용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보면서 우리 사회도 성 소수자들이 당당하게 그들의 정체성과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날이 머지않았음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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