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잡상인
지하철 잡상인
  • 정희정 기자, 변은샘 수습기자
  • 승인 2016.08.31 16:16
  • 호수 2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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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재조명
종로5가에서 역곡까지 17개의 역을 거쳐오는 등굣길이 더 피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잡상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내게 해코지 하는 것도 아닌데 파란색 박스를 실은 수레만 봐도 머리가 어지럽다. 대 개 잡상인들은 성량이 좋아서 같은 칸 멀리있는 곳에서도 쩌렁쩌렁하고 가까이 있으면 귀가 아프다. 정신없이 등교를 준비하고 올라탄 전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에 젖어 눈 좀 붙이려는 찰나에 꼭 등장하고야 마는 잡상인. 가끔은 포기한 마음으로 그들이 뭐라 말하는지 들어본다. 지금까지 내가 본 유형은 3가지다. 팩트만 전달하는 정직한 유형,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사기 치는 유형, 승객들과 이야기 나누는 친목도모형. 어떤 신박한 물건을 팔든 간 인상을 팍 찌푸리고 기분 나쁜 티를 내보지만 이내 저들도 한 가정의 소중한 사람들이란 생각에 시선을 창문으로 돌리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아빠겠지, 엄마겠지. 근데 어떻게 게르마늄 파스를 한 장에 100원에 팔 수 있지. 효과는 있는 건가.

신라시대 때부터 존재하던 보부상은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제 특성처럼 시대의 뒤꽁무니를 용케도 잘 쫓아 매 시대 자리했다. 지금 지하철에서 잡상인을 단속하는 모습은 비단 오늘날 뿐 아니다. 조선시대 태종이 행장이 없는 행상은 도적으로 간주해 벌을 주겠다는 기록은 지금 좇고 쫓기는 지하철 단속과 다를 것 없다. 심지어 ‘장돌뱅이’라며 주 고객인 농민들에게도 배척을 당했다는 기록은 영락없는 아침 지하철 1호선 눈칫밥 먹는 잡상인의 모습이다. 이렇게 오래 행상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가게를 차릴 밑천이나 일을 새로 배울 수 있는 젊음도 없을 때 물건을 떼다 파는 일은 가장 적은 밑천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목소리만 높이면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란 흔치 않다. 마진이 40%라 1,000원을 팔아도 400원 남지만 그게 어딘가. 그래도 몇 백년 전 그 때 다이소는 없었다. 지하철역 마다 그득히 들어선 다이소 물건들에 품질이 의심스러운 잡상인의 1,000원짜리는 외면 받는다. 아침마다 마주하는 잡상인들에 분명 기분은 상하는데 마음 한편 단속에 걸리지는 말았으면 싶다. 그들을 상인이 아닌 ‘잡’상인으로 만든 것이 분명 그들의 탓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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