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망루에서 내려갈 수 없다"
"아직, 망루에서 내려갈 수 없다"
  • 허좋은 기자
  • 승인 2009.12.09 12:32
  • 호수 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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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포
     
지난 1월 20일 용산에서 벌어진 비극은 300여 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유족과 철거민들이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용산 참사 현장을 기록하고 왜 이러한 비극이 빚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를 진단해 본다. <편집자주>
   

찬바람이 매섭다. 지난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불 속에 사랑하던 이들을 보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 이들에게도 겨울이 찾아왔다. 용산 한강로의 남일당 건물(남일당은 참사가 일어난 건물 1층에 있던 금은방 이름으로 문정현 신부가 이 허름한 건물을 남일당 성당이라고 부르면서 이젠 이곳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옥상에 망루를 쌓아 생존권을 부르짖었던 이들, 억울함을 풀지 못해 죽은 이의 장례조차 미루었던 남아있던 자들, 그 기다림이 어느덧 310일을 넘겼다.

용산의 비극이 시작된 것은 지난 2001년, 용산 역세권 개발 사업이 발표되고 나서다. 서울 중심부의 역세권인데다 상권이 살아있는 곳이라 땅 값은 다른 물가 지수들을 비웃듯, 쉽게 올라버렸다. 2000년 평당 5~600만원이던 지가는 2008년, 8000만원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재개발로 인한 이익은 지주들과 대형 재벌 건설사의 몫이었다. 정작 상권을 일군 세입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3~4개월 치 영업 손실 보상비와 이주비가 전부였다. 그들이 자신의 가게에 투자한 인테리어, 시행착오 비용은 계산되지 않았다. 상인들 간에 상가를 임대, 매매할 때 관행적으로 오고 가던 권리금도 제외되었다. 그들이 쥔 돈으로는 서울시내의 변변한 가게 하나 갖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용산 4구역 재개발 철거민대책위원회는 투쟁을 시작했다.

 

차분해진 슬픔

지난 10월 28일, 1심 재판부는 용산참사 피고인들 모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농성자들이 던진 화염병이 발화 원인이라는 검찰의 공소를 인정한 것이다. 남은 자들에게 또 다시 무거운 짐이 주어진 것이다.

11월 25일, 용산의 저녁은 경건했다. 바삐 걷는 직장인들과의 퇴근길을 헤집고 그곳을 찾아갔을 때, 생명평화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남일당 건물 옆 골목에는 유족들, 철거민들, 천주교인들이 용산을 잊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날 강론을 맡은 오병수 신부는 “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하고 싶지 않았던 강론”이라고 한다. 다시 맞는 초겨울 찬바람 속, 용산의 미사는 계속되었다.

다음날 다시 찾은 용산에서 유족들을 만났다. 참사가 터진지 300여일이 지난 뒤라 남일당에는 슬픔보다 차분한 공기가 가득하다. 오후 1시, 이곳을 찾았을 때 곧이어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서 열릴 이수호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 공동대표가 펴낸 시집, 《사람이 사랑이다》의 출판기념회를 위한 음식 장만이 한창이었다. 전 부치는 냄새와 어묵 국물을 우려내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불쑥 찾아온 기자를, 유족들은 간만에 본 아들 친구 대하듯 친절하게 맞아주며 해물전을 권했다.

아직 낮 시간인지라 한산한 남일당 빈소에서 유족들과 철거민들은 둘러앉아 자식들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유족들 중 고 이성수씨의 부인인 권명숙씨는 지난 10월 13일 큰아들을 군에 보냈다.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매일 썼던 일기가 시사주간지 <시사IN>의 11월 7일자에 공개되면서 애틋한 모정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좀 전부터 말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고 한대성씨의 부인 신숙자씨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권 씨는 “이 양반은 마음에 상처가 많아 말씀 잘 안하신다”고 말해 기자의 가슴을 다시금 아프게 했다.

 

용산이 싸우고, 또 싸워온 이유

용산의 철거민들은 원래 장사 밖에 몰랐던, 열심히 일하면 다 되는 줄 알던 ‘평범한 사장님’들이었다.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창숙씨는 전혀 투사 같지 않은, 단골집 ‘이모’와 같은 인상이었다. “생존권 때문에 이 일에 뛰어들었지만 그전까지 몰랐다. 파업이나 집회를 보면서 ‘왜 저 분들은 미련한 짓을 할까’라고 생각했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이 부끄럽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난 28년간 카페에서 장사를 하며 집, 가게 밖에 몰랐다던 박 씨는 이제 시청에서 노숙 투쟁까지 하는 투사가 되었다.

용산참사로 남편을 잃은 권 씨 역시 “겪어 보니 권력으로 사람 하나 죽이고 묻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왜곡되고 숨겨진 것, 뒤가 시커먼 것인데”라면서 “우리가 젊은이들 걱정 안하게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되는데”라고 말했다. 박 씨 역시 “우리의 희생으로 후손들이 더는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고, 원주민이 살 수 있는 개발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에 이 투쟁의 의미를 두었다.

철거민들이 힘든 투쟁을 지금껏 이어 온 데에는 일명 ‘남일당 성당 보좌신부’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하 사제단) 소속 신부들의 힘이 컸다. 권 씨는 “신부님 아니었다면, 못 버텼다. 말이 11개월이지, 한 달만 더 있으면 1년”이라며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유족들과 함께 싸우고 아파하고 버팀목이 되어준 신부들의 도움을 강조했다. 고 양회성씨의 부인 김영덕씨도 “우리 사회는 큰 일이 터지면 곧 잘 묻히고 마는데, 우리는 사제단 신부님들의 노고 덕에 신도, 시민들도 잊지 않고 오신다. 그 많은 분들이 현장에 오시는 것이 우리에겐 큰 힘”이라 면서도 “나야 내 일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니 이곳에 있지만, 신부님들은 추운 겨울을 다시 맞으면서도 천막에서 주무시는 것이 가슴 아프다”며 참사 후 다시 맞는 겨울보다, 다가온 추위 속에도 고통을 함께하는 신부들을 더 걱정했다.

 

다시 겨울이 와도 싸움은 계속된다

지난 1월 20일 그들은 세입자들을 무시한 용산 개발에 반대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의 외침은 공권력에 의해 불살라지고 말았다. 그날의 망루는 불살라졌으나 남은 자들은 아직 망루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25년 전 4400만원을 주고 가게를 가졌으나 이번 재개발에서 720만원의 평가를 받았다는 정옥자씨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라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칼바람을 맞으며 진행된 추모미사가 끝나고 권명숙씨는 추모객들 앞에 나와 마이크를 잡고 “‘며칠 전, 유가족들은 지치지 않았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참사 11개월째인데, 정부는 떳떳하게 유가족을 기만한다. 우리는 밟으면 밟을수록 더 단단해질 것이다”고 앞으로도 지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수많은 고층 빌딩 속 잘나가는 회사들의 사무실이 위치한 한강로 변. 근처 남일당 건물 주변과는 다른 세계다. 점심시간, 사원증을 목에 건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점심을 먹으러 나선다. 한강로 중앙의 버스정류장에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지만, 용산현장이 익숙한 듯 지나쳐 버린다. 용산역 앞은 여전히 번화하다. 용산의 아픔이 일상에 묻혀 무감각해진 오늘도 용산은 망루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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