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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당선] 오만과 편견
[294호] 2016년 11월 29일 (화) 19:33:00 양현정 (법∙4) .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던 친구에게서 몇 년 만에 연락이 왔다. 아주 가끔 들어가는 내 SNS에 “잠깐 만나자”는 댓글이 남겨져 있었다. 문자로 얘기하자는 나의 댓글에 그 친구는 “핸드폰 번호 계속 바꾸다가 정지시켰다. 밤11시에 xx아파트 공원에서 만나자”고 댓글을 달았다.

친구가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정지시켰다고 하면 대개는 의아해하며 이유를 물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 친구는 중학생 때부터 단 하루도 남자친구가 없던 날이 없었다. 매달 남자친구와의 통화료가 10만 원을 훌쩍 넘겼고, 그래서 그 친구의 아버지는 친구의 핸드폰을 자주 해지하거나 정지시키셨다. 나는 이번에도 같은 경우려니 했다.

한밤중에 만난 친구는 뭔가 불안한 표정이었다.
“왜 만나자고 했어?”
“그냥 산책이나 하자고.”
분명 산책이나 하자고 나를 부른 것은 아니었다. 몇 년 만에 갑자기 연락해서 한밤중에 사람을 불러낸 이유가 산책일리 없었다. 그래도 나는 기다려 주기로 했다. 1시간 30분이나 공원을 뱅뱅 돌고서야 친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나 이사했어. 나 이제 여기 안살아. 근데 이 동네에 볼 일이 생겨서 왔다가 네 생각이 나서…”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빨리 말해봐.”
“나 있잖아…사실 담배 피운다.”
“엥?”
“나 사실 고2 때부터 담배 피웠어. 근데 네가 담배를 너무 싫어해서 말하면 안 될 것 같더라. 안 들키려고 되게 열심히 관리했는데 티 안 났지?”

사실 흡연이 한밤중에 고백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내가 아주 유난스러운 혐연자였기 때문에 친구는 고백을 망설였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담배 냄새를 아주 싫어했다. 나는 스승의 날에도 담임선생님께 담배 좀 끊으라고 잔소리를 하는 학생이었고, 친구들 모두 내가 담배라면 질색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친구가 나에게 흡연 사실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만에 사람을 불러내어 할 고백은 아니었다.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될 충격적인 고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사실 고등학생 때 강간당했어.”
“뭐? 진짜? 언제? 누가 그랬어? 왜 그때 말 안했어? 경찰에 신고는 했어?”

너무 생각지도 못했던 고백이기에 나는 급하게 질문들을 쏟아냈다. 부끄럽게도 그때 나는‘남자를 많이 사귀더니 결국 그런 일이 생긴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경찰에 신고는 안 했어. 어차피 증거도 없었고.”
“도대체 누가 그런 거야?”
“대학생 오빠가.”
“사귀던 남자야?”
“아니 그냥 알던 오빠인데…사실 내가 좋아한 오빠였어. 오빠가 모텔에 가자고 했는데 같이 자면 사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까짓 거 야동에서 많이 봤는데 할 수 있겠지 싶은 마음에 모텔에 따라 갔어…근데 막상 들어가니까 너무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했더니 갑자기 막 때리더라. 얼마나 맞았는지 모르겠어. 얼굴을 막 맞다 보니까 기절했어. 정신 차려보니까 나는 벗겨져 있고 그 오빠는 내 위에 올라타 있고…그 다음부턴 그냥 가만히 있었어. 더 맞을까봐. 더 맞으면 죽겠구나 싶더라.”

나는 순간 인터넷에서 보았던 성폭행 사건 기사들과 거기에 달린 댓글들이 생각났다. 여자가 자기 발로 모텔에 들어갔으니 성폭행이 아니다, 여자가 꽃뱀이라 합의금을 뜯으려고 신고했다,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으니 성폭행이 아니다 같은 댓글들이 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면서 숨이 막혀왔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피해자가 바로 내 친구였기 때문이다. 왜 친구가 아무에게도 상황을 알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친구가 이 상황을 공개적으로 말했다면, 분명 누군가는 친구에게 “네 잘못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 일 있고 그 남자가 또 너한테 연락한 적 있어? 또 그러려고 하면 그땐 꼭 신고해야 돼.”
“그럴까봐 핸드폰 번호 바꾸고 정지했어. 그 이후로 다시 못 만났고.”

친구는 과거 이야기를 끝낸 후 지금은 좋은 남자친구도 사귀고 아주 잘 지낸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여러 가지 일을 했으며 현재는 취직을 해서 돈도 꽤 번다고 했다. 친구의 충격적인 고백은 꽤 밝은 분위기로 끝을 맺었다.

나는 아직도 왜 그 친구가 나를 불러내어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친구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면서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지금 불행하지 않고 괜찮게 지낸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했다. 친구는 그냥 자신에게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담담히 고백할 뿐 동정이나 충고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론 그 친구의 일이 가슴 아팠고 한편으론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울지 않고 그때의 일을 말 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있으면 남자를 무서워하고 피하는 것이 정상 아닐까? 정말 성폭행을 당했다면 왜 조금 더 조심하며 살지 않을까? 지금 정말 괜찮은 걸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몇 달 뒤 성폭행 피해자가 쓴 짧은 글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게 되었다.

“사람들은 가해자에게는 관대하고 피해자에게는 엄격하다. 피해자가 동정받기 위해서는 작은 흠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폭행 피해자가 영원히 비참한 삶을 살길 원한다. 말로는 나를 위로하고 힘내라고 하면서도 내가 행복한 것을 참지 못한다. 성폭행 피해자가 감히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피해자는 흠이 없고 항상 불행해야지만 동정과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성폭행 피해자가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보이면 사람들은 의문을 갖는다는 그 글을 읽고, 나는 친구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을 흘렸다. 친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얼마나 삐뚤어진 것이었는지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는 ‘남자를 많이 만난 여자’, ‘불쌍한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편견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친구가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정지시킨 것도, 성폭행을 당한 것도 모두 친구 때문이 아니었다. 친구가 남자를 많이 만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성폭행을 당하고도 괜찮아질 수 있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다행인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내 이해의 범위 내에서 행동할 것이라 여긴 나의 오만이 친구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편견과 오만은 늘 함께 붙어 다닌다. 내가 나만의 경험으로 ‘~한 사람은 -할 것이다’라고 편견을 갖는 것은 폭력이고 오만이다. 모든 사람이 내 이해의 범위 내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건방진 것인가! 내가 친구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문을 가졌을 때, 나는 좋은 친구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말을 쏟아낼 2차 가해자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그 친구를 위로할 준비가 다 된 것 같다. 네가 힘든 일을 겪은 것은 네 잘못 때문이 아니다. 너는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네가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위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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