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저자 노명우를 만나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저자 노명우를 만나다
  • 장한새 기자
  • 승인 2017.02.28 19:18
  • 호수 2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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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가 혼란스럽다. 혼란 속에서 한 개인이 진실과 정의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일반’의 지식, 사고의 틀을 벗어난 통찰이 필요하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사회학적 상상력이라고 한다. <사회학적 상상력>의 저자인 미국의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즈(Mills, Charles Wright)는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개인적인 일대기와 역사 사이에서, 자아와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신적인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하며 동시에“사람들을 일깨우고, 자극하고, 가르치는일, 즉 꼭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사회학자의 의무이다”라고 말했다. 본보는 지금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고 사회학적 상상력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는 책인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책의 저자인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노명우와 지난 8일(수) 작가의 서재에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사회학자 노명우를 만나다.

 Q. 사회학자가 되기로 결정한 계기는 무엇인가?

 A. 고등학교 때는 이과였다. 남자의 경우 법대에 가는 게 아니라면 이과를, 여자는 대부분 문과를 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사회에 만연하던 습관대로 움직여 의대를 가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고3 때‘내가 의사가 되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우연치 않게 하게 됐다. 재미없을 것 같았다. 얼마 안 되는 사람 몸을 뒤지면서 평생을 산다는 생각이 드니까 갑갑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좀 더 큰 게 없을까?’하고 생각했다. 물질로 보면 우주가 가장 크지만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제일 큰 게 사회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사회학자로서 직업선택에 영향을 미쳤던 또 한 가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을 읽고 사회 정의에 대해 고민해 본 경험이다.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채 부를 갖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돈 많은 노파가 살해될 때 느껴지는 묘한 쾌감과 동시에‘인간을 죽여도 될까?’하는 도덕적인 죄책감 같은 것이 교차했다.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이라는 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 때 어렴풋이 눈떴던‘사회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탐색과 거대한 것을 향해 달려가고 싶던 나의 충동 두가지가 합쳐지니 머릿속에‘잘 모르지만 사회학과’라는 생각이 들어 180도 전환해 사회학과로 왔다.

 Q.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책은?

 A. 두 권이 있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이다. 책을 읽으면서 사람의 몸이 뜨거워질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껴봤다. 후다닥 읽었는데 뭔가 표현할 수없는 뜨거운 느낌이 몸속에서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그 날 잠에 들지 못했다.

 다른 한 권은 아드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대전환을 했던 경험이 2번이 있었는 데, 사회학과로 진학한 것이고, 두번째는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이 책을 읽으면서 박사 논문주제를 바꾼 것이다. 노동문제를 연구하던 중에 계몽의 변증법을 읽으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서 현재의 세부전공(미디어, 문화, 예술)으로 바꾸게 됐다.

 Q. 두 책의 어떤 점이 인상 깊었나.

 A.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문체’다. 텍스트가 사람을 흔들 수도 있구나 싶었다. 수사학적으로 멋있거나 미사어구를 쓴 것도 아니었는데 묘한 문체의 힘이 있었다. 원문 자체도 내지르는 시원시원한 문체다.

 아드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는 어떤 문제와 그것을 발생시키는 근원까지 파고 내려갔을 때 두려워지는 순간이 있다. 더 파고 내려갔다가 감당 못할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적당히 세상을 비판하는 건 쉽게 할 수 있다. 잊어버리면 된다. 그런데 비판의 근원을 찾아가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알게 됐을 때 차라리 모르고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약과 파란약의 비유와 같다. 빨간약을 먹어야 하는 순간에‘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계몽의 변증법>이 나에겐 빨 간약을 먹는다는 의미였다. 감당 못 할 두려움이 있으면서도 문제의 근원으로 파고들어가는 사유의 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 <세상물정의 사회학>

 Q.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쓰게 된 계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A. 사회학을 가르칠 때 2가지 방법이 있다. 미래의 사회학자를 키우기 위해 전문지식을 전수해주는 방식과, 일반 사람들이 미래에 건전한 양식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가르치는 방법이다. 근데 보통 사회학 책은 전자의 경우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균형을 맞추고 싶었다. 왜냐면 사회학을 전공했다 하 더라도 졸업하고 나서 사회학자가 되는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사회학을 써먹을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사 회학과 인연을 맺게 하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경험이 나중에 건전한 양식을 갖춘 시민 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했다.

 또 학교 안에만 있다 보니 답답했다. 대학은 사회안에 있는 하나의 기구지만 사회를 보편적으로 담고 있는 기구는 아니다. 학생들이나 교수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모두 평범한 경험으로부터 유예되어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직업생활인이 아니고, 교수들도 마찬가지기에 그런 상황이 갖고 있는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회학개론에서 노동, 직업 부분을 가르칠 때 나또한 노동이나 직업에 대한 직접경험이 없고,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기 때문에 서로가 코끼리 뒷다리긁고 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사람이 나이 들어서 공부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을 가기 위해 통제된 삶에서 살던 사람이 그 상태로 대학에 들어와서 사회학개론을 들으면 과연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때까지 부모나 학교가 해줄수 있는 최대치는 그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이다. 공부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환경, 좋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다. 격리되어왔던 사람들이 대학에 와서 사회학개론을 듣는다고 이해를 할 수도, 도움이 될 수도 없다.

 결국 다른 방식으로 사회학을 하고 싶었다. 사회학용어를 모른다 하더라도 사회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쓴 책이다.

 

 Q. 독자들이 이것만큼은 꼭 가져갔으면 좋겠다고생각하는 것은?

 A. 요즘은 영상과 SNS가 지배하는 시대라 사람들이 텍스트 읽기를 힘들어하고 그 맛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텍스트, 특히 사회과학 텍스트가 맛있을수도 있다는 걸 경험해보는 것이 바람의 최대치다. 그리고 독서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성찰의 토대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배운 괴물들의 사회, 책을 통해 사회를 들여보다.

 Q. 최근 국정농단 사태, 각종 비리와 유착, 갑질논란 등 우리 사회를 이끌던 전문가와 지배층이 문제되고 있다. 교수님께서 책에서 표현한‘배운 괴물들의 사회’를 보는 것 같다. 그들이 성장함과 동시에 성숙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A. 인간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닌,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태어난다고 한다. ‘미성년자’라는 단계가 있다. 아직 인간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다. 인간은 태어났을 때의 상태로부터 얼마만큼 달라졌는지를 근거로 인생의 성공을 판가름할 수있다.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갖고 있던 상태에서 그 가능성들을 빨리 실현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 교육이다. 이것이 본래 교육의 목적이다. 동시에‘교육을 왜 하는가?’‘, 학교에 왜 가는가?’라는 질문의 답이다.

 독일어 표현이 그런 면에서 교육의 의미에 잘 부합한다. 빌둥(Bildung)이라고 하는데 형성하고 만들어준 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만들어져 가는, 인간의 꼴을 갖춰가는 것이다. 칸트가 계몽을‘인간 을 미성숙의 상태에서 성숙의 상태로 바꾸어놓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인간이 되어야만 하니까 계몽이 인류의 역사 단계와 개개인의 개체발달과정 모두에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배운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 돼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면‘공부는 잘하는데 싸가지 없는 애’들이 나중에 엘리트가 된다.

교육의 목적만을 두고 보면 어떤 기능이 뛰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 아이들이 교육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교육은 인간다움을 갖추기 위한 수단이다. 우선 인간답다는 건 두 가지다. 지적능력을 갖춘다는 것과 사회적 존재로서 공감 능력을 갖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능력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교육이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다 보니 배운 괴물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Q. 미디어의 역사를 보면 처음부터 정치와 관련된 정론지로 시작해 기업의 이윤을 위한 수단으로, 대중조작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용으로 발전해왔다.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개혁은 필요해 보인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개혁해 나가야 할까.

 A. 현재 미디어의 상황을 위기라고 한다. 위기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 들은 미디어의 위기를‘비판적 기능의 상실’로 본다. 이 문제는 미디어만의 책임이 아니다. 사람들이 비판적 뉴스를 안 좋아하면 비판적 뉴스를 생산하지 않는다. 시장논리에 따르는 것이다. ‘비판적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이 언론이 가지고 있는 위기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뉴스 소비자들이 더욱 더 현명해지고 계몽 되는 것이 해답이라고 본다.

 또 다른 미디어의 문제는 기자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윤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기자정신, 직업윤리, 기자다운 기자가 없다고들 흔히 말한다. 그런데 그걸 모두 기자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미디어 산업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환경은 뉴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선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게 한다. 다른 패러다임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자들의 직업윤리의 쇠퇴만을 문제로 삼는다고 한다면 미디어의 문제를 기자라는 직업군이 만들었다고 일원적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미디어를 어떻게 개혁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쪽으로 좁혀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뉴스는 늘 프로파간다의 수단, 대중조작의 미디어였다. 그리고 기업, 권력층은 사람들의 생각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미디어를 장악하려 한다. 그래서 소비자가 능동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뉴스는 그 어떤 미디어보다 사람들의 의식을 조작하는 수단이 된다. 유일한 대응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결국 소비자들이 능동적이 되는 일이다. 아무리 프로파간다용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미디어를 활용한다 하더라도 소비자가 보도 메커니즘과 그것이 프로파간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소비자의 능동성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문제다.

 * 어떤 것의 존재나 효능 또는 주장 따위를 남에게설명하여 동의를 구하는 일이나 활동. 주로 사상이나 교의 따위의 선전을 이른다.

 청년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부모와 학교에 의해 사회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아왔다. 동시에 위험과 혼란에 대한 사고의 힘을 기를 기회를 잃었다. 한정된 장소에서 제한된 교육을 받았고, 사회를 배워왔다. 또한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혈전으로 교과서만 바라보다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성장시키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청년들은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버렸고, 우리 사회의 거대권력에 의해 조종당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 모두 드러난지금이 더 나은 세상의 건설을 위한 토대가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시각과 정의를 향한 능동성, 그리고 부정의에 굴복하지 않는 우직함과 그 우직함을 갖춘 자들의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진리와 정의를 지향하는 대학에서 그 실천이 먼저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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