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을 품고 살아가는 제주
4∙3을 품고 살아가는 제주
  • 오명진 기자
  • 승인 2017.03.29 08:04
  • 호수 2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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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을동, 관덕정… 70여년 전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보다
▲ 일러스트_정지은 기자
 지난 2014년 9월 서울시청 앞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의 노란 리본을 철거하려다 제지당한 단체가 있었다. 서북청년단􀓈. 이들은 이번 대통령 탄핵 반대 태극기집회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서북청년단은 70여 년 전 제주도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조직의 명칭이기도 하다. 당시 대문이 없던 제주의 민가에 들이닥쳐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는가 하면, 여성만 혼자 있는 상황에서는 강간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를 문제 삼으면 빨갱이로 내몰리기 일쑤였다. 도둑, 거지, 대문이 없다던 3무의 고장 제주에 대문이설치되기 시작한 때가 서북청년단의 출현 이후부터 였다고 하니 그들의 악명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심상치 않은 서북청년단의 출현을 보며 지난 1월중순 제주로 향했다. 올해 69주기를 맞는 제주4∙3의 자취를 돌아보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시국이 어수선해서일까. 전날의 거센 바람이 오늘은 세찬 눈발을 대동하여 몰아치기까지 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제주 4∙3 평화기념관이었다. 오전 10시 경이었는데, 기념관의 방문객은 우리 일행 셋밖에 없어 삭막함마저 느껴졌다. 해설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먼저 영사관에 들어섰다. 사건 발생 당시부터 진상보고서 발간, 기념공원 조성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스크린에 비춰지니 4∙3의 개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영상이 꺼지면서 잠깐 찾아온 어둠은 새삼 무거웠다. 그 어둠 속에 비극적인 역사가 더해져있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영사관을 나서면 전시관이 시작되는데, 그 시작은 4∙3 당시 제주도민들이 피난했던 곳을 재현해 놓은‘역사의 동굴’이다. 동굴을 지나면 천장에 흰 빛이 비춰지는 비문이 없는 비석,‘백비’가 놓여 있다. 4∙3 취재를 준비하면서 가졌던 의문 중 하나는‘정명(􃮅􂫳)’에 관한 문제였다. 어떤 곳에서는 4∙3을‘사건’이라 부르지만 다른 데서는‘사태’라 하기도 한다. 2003년 정부에서‘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하였으나 현재 일관되게 쓰이는것은 아니다. “사건, 사태, 항쟁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데 정확하게 명명되지는 않았어요.”질문에 대한 해설자의 답변이다. 백비를 지나니 해방 전후 시기 제주도의 상황, 4∙3의 도화선, 5ㆍ10선거 거부, 군경의 초토화 작전, 마지막으로 4∙3 이후 제주도민들이 겪은 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에 관한 전시가 이어졌다. 전시관 출구 벽면에는 방문객들의 생각이 담긴 포스트잇들이있었다“. 진실규명을하라.”아직까지도 해명되지 않은 4∙3의 실체는 존재한다.

 4∙3평화기념관에서 제주항 국제터미널 방향 버스를 타고 50여 분간 이동하고 내려 15분 정도 걸으면 화북동 해안에 위치한 곤을동 마을 터가 나온다. 지도와 유적지 안내표지판을 참고했으나 길을 헤맸다. 근처 주민 분께 묻고 나서야 곤을동 마을 터를 중심에두고뱅뱅돌았다는사실을깨달았다.‘ 곤을’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란 뜻이다. 수십 년 전 마을은 사라졌으나, 곤을은 아직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이 귀한 제주인 만큼 당시 제주 사람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었을 거다. 물이 얕게 고인 돌길을 건너 마을 터로 가니‘곤을동마을 터’라 적힌 작은 표지판이 나타난다. 여기에 한때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의 증명은, 무심코 지나칠 만큼 작은표지판 위에 새겨져있을 뿐이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경 국방경기대가 곤을동 포위. 주민들을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 명 바닷가로 데려가 학살. 가구 모두 불태움. 다음 날 인근 화북 국민학교에 가뒀던 주민 일부 모두 화북동 바닷가 연디밑에서 학살. 집터, 올레 등이 옛 모습을간직한 채 4ㆍ3의 아픔을 웅변해주고 있다.”해안마을조차 이 정도인 데 , 당 시 95% 이상 방화되었다는 중 산간 지대의 마을들은 대체 얼마나 막대한 피해였는가. 내내 불어온 차가운 바닷바람은 한층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곤을동에서 버스를 타고 30분간 시내 방향으로 이동하면 관덕정에 다다른다. 관덕정은 현재 제주 우체 국 대로변에 위치해 있는데, 서울로 치자면 광화문광장 역할을 오랫동안 감당해왔던 공간이다. 조선시대에는 여기서 군사훈련이 실시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집회 공간으로 사용되거나 시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그리고 1947년 3∙1절 기념대회 후 행진하던 제주도민들은 이 부근에서 응원경찰의 발포로 사망하기도 했고, 이는 4∙3의 도화선이 되었다. 입산했다가 잡혀온 빨치산􀓈은 이곳에서 공개 추궁되었으며, 토벌대에 사살된 유격대장 이덕구의 시신이 전시된 곳도 바로 관덕정 마당이었다. 4∙3이 발발한지 1년이 지난 1949년 4월 12일 이승만 대통령은 바로 이곳에서‘평화의 낙토 건설’을 연설하였다. 이와 같은 관덕정 앞을 버스와 승용차, 트럭, 택시가 무심히 지나친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덕정 마당은 몇 번이나 새단장을 했고, 이와 더불어 기억은 날로 바랬다. 일상속에 묻혀 버린 상황이 그 풍경 위에 겹쳐졌다.

 극우 세력은 4∙3평화기념관을‘폭도공원, 좌파양성소’라 비난한다. 반면 천주교 제주교구장강우일 주교는 지난 3월 1일 3ㆍ1절 기념 시위 70주년 컨퍼런스에서“국민 대다수가 4∙3에 대해모른다.”“, 군경에초토화된제주4∙3, 용서받지못할 반인륜적 범죄”라 발언한 바가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육 현장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국정교과서는 권위주의 시절의 시각으로 4∙3을 서술하고 있지만, 제주교육청에서 2014년 개발하여 전국 학교에 배포한 교재에서는 제주4∙3 평화 인권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직까지도 4∙3은 정리되지 못한 것이다. 4∙3이 현재의 문제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4∙3을 둘러싼 가시가 너무나 많다.

* 각주
- 서북청년단 : 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극우 반공주의 청년단체
- 빨치산(파르티잔) :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후방 등에서 활동하는 비정규군 우리나라에서는 공산게릴라를 가리키는 말로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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