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의 잔재는 역사의 망각 속에서 뿌리내린다
독재의 잔재는 역사의 망각 속에서 뿌리내린다
  • 이상화 (국사학과 석사수료)
  • 승인 2017.05.18 05:30
  • 호수 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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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의 5∙18 왜곡
▲ 이상화 (국사학과 석사수료)
​  전두환 회고록에서 문제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 씨는 회고록에서 한결같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 '폭동'이라고 표현했다. 둘째, 전 씨의 주장에 따르면 5∙18 당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양민학살은 없었다. 셋째, 전 씨는 회고록에서 5∙18 사태는 북한 특수군 600명이 매복했다가 국군을 습격한 사건이며, 이들 중 478명이 현재 북한에 있다고 주장하는 지만원씨의 주장을 인용했다. 종합하면 "광주사태는 북한군이 시민을 선동하여 무기고를 탈취해 무장하고 국군을 살해한 폭동에, 국군이 자위권을 발동한 '정당방위'로 나(전 씨)는 이 사건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위대 사진과 현재 북한 고위직에 있는 인물의 사진을 비교하면서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며 지만원 씨가 당당하게 흔들었던 자료는 분석 결과 다른 두 사진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으로 결론 났다. 미국 CIA는 1980년 5월에 북한의 개입은 물론 특별한 군사적 동향도 없었다고 못 박았다. 시민군이 무장한 것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금남로에서 국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이후임이 연구 결과로 드러났다. 시위대가 무장해서 국군을 살해해 방어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주장 또한 당시 무장헬기가 시위대 및 민간인들에게 먼저 기관총을 난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잃었다.

 게다가 5월 18일 이전부터 전쟁을 담당하는 공수부대와 특전사 등 특수부대의 시위진압을 위한 특별훈련이 시행되었던 것도 입증이 되었다. 또한 전 씨는 당시 직책과 권한으로 미루어봤을 때 군의 지휘체계 상, 군이 대대적으로 투입된 광주학살과 연관이 없을 수가 없음을 증명하는 문서 또한 여럿 등장했다. 전 씨가 광주학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95년 검찰조사와 97년 대법원 판결에서도 드러났다.

 2001년에 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 위원회에서 펴낸『5∙18민중항쟁사』에 따르면 광주학살로 인한 사망자가 161명으로 집계되었다. 물론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고 추정되지만 이 자료에 따르면 사망자 중 학생이 30명, 노동자가 35명, 운수업 및 운전기사가 12명 등 대다수가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청∙장년뿐만 아니라 아이, 학생, 여성, 노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에게서 잠입한 북한군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군부는 '계엄령 철폐', '계엄군 철수',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을 외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 노인, 남성, 여성을 가리지 않고 군홧발과 곤봉으로 두들겨 팼고, 대검으로 난자했으며, 소총과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으로 난사했다. 당시 광주학살을 목격한 혹자는 이렇게말했다. "일제때 무서운 순사도 많이 보고, 6∙25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이것은 조직적으로 계획된 군에의한 '학살'이고 '살육'이며 '인간사냥'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들을 광주에 잠입한 북한군, 혹은 북한군에 의해 선동되어 국군을 공격한 폭동으로 취급해왔다.

 1989년 12월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전 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저는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염치를 아는, 창피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기억되고 싶을 뿐입니다. 국민 여러분이 내리시는 것이라면 죽음의 약사발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전 씨는 1심 사형, 대법원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검찰 조사, 대법원 판결까지 부정하면서 자신은 피해자고, 희생자라서 억울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알고싶다> 팀에서 광주학살 당시 헬기 사격을 명령했던 3공수여단장인 최세창 준장을 인터뷰하러 갔다가 최 준장 아내를만났다. "우리가 말안해도역사의 진실은 30년, 50년 후에는 밝혀지겠지. 그렇게 편안하게 살고 있어요. 절대 거기에 대해서 뭐 연연하지 않아요. (웃음) 지나간 역사죠. 지금은 관심 없고…."

 이것이 현실이다. 가해자들은 편안하게 살고 있다. 그들에게 광주학살은 '지나간 역사'에 불과하다. 그들은 '지나간 역사'에 대해 관심 없다. 이를 담담하게웃으면서 이야기한다. 학살의 피해자들은 아직도 울고 있는데. 30년, 50년 후에는 기밀문서도 해제되고, 누가 새로이 증언을 하고, 새로운 문서가 발견되어서 최초 발포 지시자나 학살 총 책임자가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치자. 그러나 그때는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도, 사과와 배∙보상을 받고 명예회복을 받아야 할 광주학살의 생존자도 없다.

 우리는 하루빨리 상식적인 정치권력을 통해 아직 청산되지 못한 부분들이 청산 될 수 있게 압박해야 한다. 우리는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 일제 식민지와 독재 권력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 내부 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선진국이니, 경제대국이니 해도 사상누각이다. 화합과 통합이라는 그럴 듯한 말에 휘둘려 암 덩어리를 적출하지 않는다면 암세포는 온 몸에 퍼지고, 회복이 불가능하다. 상식적인 역사교육은 청산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하다.

 청산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를 열망한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런 사람들을 신군부가 '적'으로 규정해 통신과 전기와교통을 차단한 채 벌레 죽이듯 잔혹하게 학살 했다는 것, 학살 피해자들을 폭도로 규정해 자신들의 살육 행위를 정당화 한 것,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른 인식들이 아직도 경찰의 경호를 받으면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는 것, 광주학살을 왜곡∙조작∙은폐∙선동하는 세력들이 아직도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라도 더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야 하고, 후대에 전해줘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너무도 쉽게 80년 5월의 광주를 잊고 살고 있지 않은가? 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의 열망이 87년 6월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그토록 염원했던 민주화를 쟁취한 이후, 우리는 그들의 희생에 편승해 현재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그 때를, 그 피를 기억하고 있는가? 물론 먹고 사는 일에 급 급한 척박한 현실 속에서, 80년 5월의 광주를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버리며 살아가는 이들을 탓할 생각도, 나무랄 생각도 없고 나에게는 그런 권리도, 자격도 없다. 나 또한 한국 현대사를 공부한다는 대학원생임에도 불구하고 잊고 살 때가 많으니까.

 전 씨가 집권한 제5공화국 당시 3S 정책이 있었다. 섹스, 스포츠, 스크린에 대중을 열광시켜, 광주학살을 비롯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한 것이다. 이와 동일한 맥락의 움직임이2017년 현재 한국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청와대 전 비서실장 김기춘의 메모에 적혀있던‘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당장 먹고 사는 일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대중들이 정치에 신경 쓰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학살 가해자들과 가해자에 동조하는 이들이 5월의 광주를 희미하게 만들어버렸다.

 한홍구 교수가 한 말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시그널이란드라마가있었잖아요.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면서 무전이 오는데, 도청에 남았던 형들이 무전을 딱 받아서 우리에게 물어요.'어딥니까?' 우리는 대답해요. '네, 2017년 대한민국입니다.' 형들이다시물어요. '일제36년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났군요. 우리는 오늘 밤에 여기서 죽지만 37년 뒤 대한민국은 좋은 사회 됐지요? 전두환은 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물음에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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