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고통의 역사가 흐르는, 아름다운 소록도
여전한 고통의 역사가 흐르는, 아름다운 소록도
  • 정희정 기자
  • 승인 2017.05.30 19:39
  • 호수 3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본보 3명의 기자가 2016년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5일 동안 소록도로 자원봉사를 다녀왔다. 소록도 국립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또 함께 생활하며 그곳의 아픔과 일상 그리고 역사를 체험했다. 매년 본보에서 개최하는 한센병문화상은 올해로 9회를 맞는다. 이번 르포 기사를 통해 다음 학기부터 공모하는 문화상에 더욱 많은 학생이 참여하기를, 한센병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기를 기대해본다. 기자들이 경험한 소록도에서의 이야기를 전한다. - 편집자 주 -

​ 소록도에 처음 발을 디딘 월요일,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푸른 바다와 갖가지 나무들의 인상을 더욱 짙게 했다. 육지의 어느 시골 마을인 듯 제주도인듯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비밀스러운 이섬은 왜 '작은 사슴'이라는 이름을 갖게되었을까. 소록도는 이름 그대로 작은 사슴 모양이다. 또 이 섬에는 사슴들이 살고 있다. 그래서 소록도라고 불린다. 사슴이 사는 섬이라고 하니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다. 그러나 앙증맞은 이름을 이 섬에는 가슴 사무치는 오랜 역사가 흐르고 있다. 기자들이 두 눈으로 본 그곳은 아름다웠지만 여전한 고통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 첫째 날

​ 녹동 터미널에 내렸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10분쯤 이동해 소록도에 도착했다. 채규태 교수님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채 교수님께서는 현재 소록도국립병원 피부과 과장을 맡고 계시는데 본교 성의교정 한센병연구소장을 지내신 분이다. 교수님께서 점심때를 못 맞춘 우리를 차에 태워 어느 식당에 데려가셨다. 그리고 소록도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 놓으셨다. 식사 후 이런저런 한센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원봉사자회관으로 이동했다.

​ 회관에 도착해서 봉사자들을 관리하는 박 사무장님을 만났다. 그곳에서 '시키는대로 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하고 어디서 봉사할지 배정받았다. 그리고 개인 봉사자 표시용 노란 조끼를 받았다(단체봉사는 파란 조끼). 마을 안을 돌아다닐 때는 꼭 조끼를 입으라고 했다.

​ 방에 짐을 푼 건 오후 5시쯤이었다. 뜨거운 온돌 바닥에 눕자마자 바로 잠에 들 것 같았다. 하지만 매주 월요일 6시에 개인 봉사자 회의가 있다고 해서 휴게실로 집합했다. 전달사항을 들은 후에 개인 봉사자 10명 정도가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다양한 성격과 삶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소록도에서 봉사라는 같은 경험을 공유하며 빠르게 친해졌다.

​ 회의가 끝나고 휴게실을 구경했다. 사슴 사진도 있었다. 그리고 책장에서 <소록도, 천국으로의 여행>을 집어 들었다. 한센인 강선봉 작가가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소록도에 들어와서 겪은 수난과 삶의 모든 여정이 녹아 있었다. 책장을 넘기며 긴장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 둘째 날

​​ 오전 4시 20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면장에 가서 양치했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시커먼 밤하늘 아래 줄을 지어 배정받은 병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동 입구에 가까웠을 때 옆에 있던 봉사자가 처음엔 조금 놀랄 수도 있다고 귓속말을 해주었다. 얼떨떨한 정신으로 간호사님들께 인사를 드렸다. 병실 문을 열었다. 이럴 수가. 처음 마주한 한센인 할머니를 보고 나는 잠깐 숨쉬기를 멈췄다. 분명히 봉사 오기 전에 한센병에 대해 찾아보고 동영상도 봤건만. 당황했다. 이내 간호 선생님들께서 일사불란하게 할머니들의 기저귀를가시는 광경에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 "기저귀 간 할머니들 앞치마 해주쇼잉." "네?" "앞치마 하라고." "아…. 네!" 전라도 사투리까지 해독하려니 빠릿빠릿해도 모자랄 판에 간호사님들의 심기를 건드리며 더 멍청하게 굴었다. 일단 곁눈질로 다른 봉사자들을 보며 누워계신 할머니를 일으켜 앞치마를 해드렸다. 식사가 배달됐다. 시계를 봤다. 오전 5시 20분. '아침을 되게 빨리 드시는군.'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눈치껏 침대에 적힌 '죽', '미음', '간 반찬'대로 할머니들 침상에 식사를 올려드렸다. 앞이 보이지 않으셔서 수발을 해드려야 하는 분들도 계셨고 주먹손에 고무줄을 끼워드려야 하는 분도 계셨다. 나는 앞도 보이지 않고 움직일 수 도 없는 '가장 어려운' 할머니를 도와드리게 됐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죽을 조금 조금 입에 넣어드렸다. 혼이났다. "왜 밥을 그렇게 먹여!" 간호 선생님이 숟가락을 채셨다. 시범을 보이셨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할머니들의 식사 수발을 마치고나니 이제 우리가 밥을 먹으러 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6시. 세상에 이 새벽에 아침을 먹나, 싶었는데 꿀떡꿀떡 잘만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오전 봉사 때까지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 단잠이었다.

​ 오전 8시 30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고 다시 병동으로 갔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오전 봉사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할머니들 세안이었다. (물론 할아버지 병동도 있고 남자 봉사자들이 간다.) 나는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박 할머니의 얼굴을 닦아 드렸다. 샤워도 자주 못 하고 얼마나 불편하실까 생각하며 귀 뒤며, 목이며, 가슴팍까지 쓱싹쓱싹 깨끗이 해드렸다. 할머니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야. 누꼬. 참말로 잘 한데이. 닌 언제왔노?" "어제 왔어요." "언제까지 있을 끼고?" "이번 주금요일까지요" "흠…. 와 이리 금방 가노."

​ 세안을 마치고서 복도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니 정신이 들었다. 세 개의 병실과 15명의 할머니. 그리고 맞은편에는 할아버지병동. '아, 어젯밤 읽은 소설 속 그 일들을 모두 겪으신 분들이구나.' 책에서 읽은 한센병에 걸리면 "몸에 검은 꽃이 핀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검은 꽃이 뭘까 궁금했다. 그리고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고 계신 한 할머니의 팔을 보았다. 검은 꽃이었다. 가늘고 여윈 팔에 그 꽃이 있었다. 감히 그 아픔을 헤아릴 수 있을까, 입술을 앙다물었다. 눈물이 차려는 찰나 적막을 깨고 할머니들의 부름이 있었다.

​ "봉사자야~" "네!" "뜨신 물 좀 떠다주이소."찬 물을 조금 섞어 뜨거운 물을 받았다. "찬물 넣었나." "조금요." "뜨신 물 떠달라 하지 않았나. 다시 떠오래이."

​ "봉사자야, 이리와 보소. 사과 좀 깎아줘. 얇게." 과일을 깎을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을 닦았다.

​ "봉사자야~" "네" "내 깨죽 좀 따줘." "할머니 곧 점심 와요. 쫌만 기다리세요." "빨리 줘. 깨죽 달라고." "간호 선생님한테 물어볼게요." "물어보지 말고줘." "…." "깨죽!" 할머니의 무서운 눈빛과 귀여운 협박에 안절부절못했다.

​ "봉사자야." "네!" "붕어 한 마리만 사다줘." "부..붕어요?" "아이스크림!"

​ 심부름을 무한 반복하다 보니 점심이 왔다. 새벽 봉사 때와 마찬가지로 앞치마를 매드리고 식사를 도와드렸다. 확실히 더 나아진 수발을 했다. 우리도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장기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소록도를 한 바퀴 돌았다. 바닷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빈터가 된 교회들과 식량창고, 검시실을 보았다. 시간이 금방 흘렀다. 오후 1시가 되어 황급히 병실로 돌아갔다.

​ 점심 후는 나른해서 그런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대부분 낮잠을 청하시는 것 같았다. 가끔 가족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박 할머니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까칠하신 할머니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그 손님이 귀에 들려주는 찬송을 가만히 들으셨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할머니는 주먹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눈물에는 참 많은 의미가 스며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책에서 읽었던 모진 핍박의 세월과 허름한 교회들의 역사가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간을 뚫고 할머니는 이곳까지 살아오신 것이다.

​ 셋째 날

​ ​오후 5시까지 할머니들과 두런두런 시간을 보내면 하루 일과가 마무리됐다. 저녁 맛있게 먹어라, 잠 잘 자라, 가지 마라, 깨죽 하나 주고 가라, 과일 먹어라 등의 길고 긴 작별을 내일 아침을 기약하며 마무리했다. 하루에 봉사를 3번 나눠서 하니 하루가 3일 같았다. 할머니들을 만난 지 하루 만에 금방 정이 들어버렸다. 저녁에 눈을 감는데 할머니들은 뭐하고 계실까 궁금했다.

​ 다음 날 점심에는 한센병 박물관 소장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멀리서 취재를 왔으니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소록도에 새로 세워진 박물관을 소개해 주신다고 했다. 소장님은 이제 국내에 한센병 환자들이 거의 사라졌고 앞으로 30년 안이면 소록도는 병원이 아닌 역사를 기록하는 공간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또한 한센병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속 억울하게 인권을 유린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보상해야 함을 기억하도록 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 넷째 날

​ ​봉사자들이 하는 일은 매일 비슷하다. 식사, 양치, 이동 등을 도와드리고 심부름을 하면 된다. 가끔이지만 조용할 때가 있는데 그럼 할머니들께 가서 아양을 부린다. 할머니의 머리를 빗어 드린다. “아이, 할머니 참 곱다. 머리를 요로케 하니까너무 이쁘다." "뭐가 예뻐! 늙었어. 나 졸려." "이불 덮어드려?" 할머니가 꿈틀꿈틀 움직이면 아기 포대기 싸듯이 이불을 덮어 드린다. "할머니가 아기가 됐네" "웅. 나 아기야. 늙은 아기." "늙은 아기코 자세요" 할머니를 꼭 안아 드린다. "니가 내 손주다."마음이 뭉글뭉글해졌다.

​ 다시 식사 시간이 왔다. 그런데 옥 할머니가 식사를 거부했다. 매일 죽만 먹으니 짜증이 난다고 하셨다.“할머니. 그래도 배고프니까 드셔야죠." "니는 과자도 먹고 밥도 먹으면서 나한테 죽 먹으라고하니? 냉장고에 바나나 줘." "봉사자는힘이 없어요. 간호사님 말씀을 들어야 해요." "내 말 안 들을 거면 돌아가. 약과나 갖다 주고." "안된다니까요…." 할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도 나는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올 때까지 할머니들은 여전히 계실까.'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 마지막 날

​ 한 할머니께서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어보셨다. 금요일이라고 답했다. 오늘 떠나는 날이 아니냐고 하셨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등을 부비셨다. "아쉬워서 어찌까." 다시 오겠다는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없어 할머니들을 한 번씩 꼭 껴안았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뭘 하는 애인지, 이곳에 왜 봉사를 왔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 동안 함께 보낸 시간 속에나눴던 따뜻한 마음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병실 복도에 앉아 생각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경험에는고통이 수반된다고.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외면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 ​소록도 역사

·1916년 일제 치하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감금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록도자혜의원 설립. 6,000명 이상 환자들이 이 섬으로 강제 이주​

·1936년 소록도갱생원 검시실 건축

·1941년 DDS 약이 개발, 한센병은 완치될 수 있는 병임이 밝혀짐. 하지만 한센인들은 여전한 편견과 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 낙태와 단종 수술은 물론 매를 맞으며 노역했고 음식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음

·2001년 일본이 '한센병보상법'을 제정

·2017년 소록도 100주년. 매해 2,5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방문하는 치유의 공간으로 변모

​ ​함께 소록도에 갔던 기자들의 말

​ 문드러진 얼굴과 손을 가진 한센인의 핍박받은 역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시간이 멈춘 섬. 여느 곳보다 유려한 자연과 사람들에게서 묻어나오는 여유는 오히려 그곳이 도시보다 나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손을 잡고, 안아주고, 좋은 말씀을 해주시던 그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정지은 기자

​ 다리 하나를 건너 소록도에 들어간다. 바다라는 황홀한 울타리로 둘러싸인, 그래서 그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기 쉬운 곳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의 한과 비애가 서려 있다. 4박 5일 동안 섬사람들의 따뜻함 속에 숨겨진 그 상처를 보았다.
 -장한새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