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되거나, 사로잡히거나
매혹되거나, 사로잡히거나
  • 정은기 (학부대학) 교수
  • 승인 2017.09.13 22:47
  • 호수 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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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의 서재


 책을 읽는 일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가만히 앉아서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규칙적으로 책장을 넘기는 일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간혹 벤치에 앉아 책 읽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의 주변으로 나뭇잎이 떨어지기도 하고, 구름은 이미 저만치 흘러가 있기 마련이다. 그는 떨어지는 나뭇잎보다 고요하고, 흘러가는 구름보다 느리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직접 책을 펼쳐들고 앉아보면 독서라는 것이 그리 정적인 작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겉으로는 고요하고 잔잔한 수면을 연상하게 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의 내면은 격정이 휘몰아치는, 매우 격렬하고 역동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세계는 이미 바뀌어 있음을 알게 된다.

 

 나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있다. 대학에 갓 입학할 무렵 나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쓰고, 책을 읽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웃거렸다. 독서토론 모임이나 창작동인 등 가리지 않았다. 읽지도 않는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걷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학보사에서 대학생 신문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주로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정리해서 보도 자료와 함께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원고마감에 쫓겨 읽게 된 책 중에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1999)이 있었다. 그리고 읽게 된 첫 문장,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그의 전집 속에서 유고 시집 <입속의 검은 잎>, 그 첫 번째 시 <안개>의 첫 행을 읽었다. 아니, ‘ 읽었다’라는 수사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읽어 버리고 말았다’라는 표현이 이 필연적인 만남을 설명하는데 더 적합할 것이다. 네루다의 말처럼 그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시가 내게로 왔다.’감히 말하건대 단 한 편의 작품이었지만 마치 전체를 보아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안으로 들어 온 듯했다. ‘그것’이 말인지 침묵인지, 타오르는 불인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덮고 나자 나는 무엇인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안절부절 서성거리기도 하고, 넋을 놓고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 그것’은 문장에 대한 어떤 열등감처럼 내 안에 자리잡았다. 심지어 시인의 불우한 삶과 요절이 내게는 부러운 이력이라 여겨지기까지 했다. 시 아닌 것으로부터 나의 모든 관심을 거두어 갔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그동안 내가 썼던 일기장을 모두 태워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는 치기어린 행동이었지만 분명 시집을 한 권 읽었을 뿐인데 나의 세계는 이미 너무나 변해 있었다.

 

 사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을 읽고 다시 읽는 행위이다. 더욱이 논문을 쓰기 위해 읽는 많은 책들은 보다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읽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책의 내용이 몇 개의 문장으로 요약되어 전달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쉽게 요약해서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저자는 그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생을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책은 원래 이해 안 되고 어려울 수밖에 없는 사물이고, 읽기는 매우 지난한 작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사키 아타루)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기형도 전집>을 통해 경험한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며칠은 분명 무엇인가에 사로잡히거나, 매혹되었던 강렬한 순간이었다.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체계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무엇이 되기 위해 지루하게 기다리던 시간이 아니라, 그렇게 사로잡히고 매혹된 그 순간만큼은 나는 이미 시인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이미 현재화된 미래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로잡히거나 매혹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를 견디는 일이 내게는 힘들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밀도가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형도 전집>을 통해 시편들 전반에 드리워진 죽음에 대한 미학적 시선이나 삶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듯한 시인의 머뭇거림, 눈빛, 목소리, 시인의 독특한 이력 등을 소개하는 일은 어쩌면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기형도 시인의 시편들 역시 세계와의 격렬한 만남을 통해 매혹된 흔적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또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격렬하고 역동적이었던 순간이 이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책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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