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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작] 척에 대하여
[0호] 2017년 12월 10일 (일) 14:50:50 양영상 cuknews@catholic.ac.kr
 척이란 ‘그럴듯하게 꾸미는 태도·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행복한 척’, ‘괜찮은 척’ 등 다양한 종류의 척을 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것에 가깝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척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에게 나에 대한 하나의 영상을 가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체 생활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척이 잘 드러나는 예시를 살펴보자. 남자인 내 친구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별 후에 슬퍼하는 걸 보면 한심해 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또 만나면 되지, 왜 신경을 쓰냐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들은 최근에, 꽤 오랜 기간의 연애 끝에 헤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이별은 나로 하여금 척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그는 그의 여자 친구에게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홧김에 헤어지자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화도 내지 못하고 뒤로 돌아섰다. 치졸해 보일까 봐 붙잡지도 못했다. 그러고는 공허함을 못 채워 여기저기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결국 다른 사람과 사귀었으나, 이내 헤어졌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이별을 심하게 비웃으며, “너는 다른 여자를 좀 만나봐야 해” “너 진짜 바보 같다”라고 말하던 그의 여자 친구는, 그를 못 잊어서 낮에는 나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고민을 이야기했고, 밤에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지어는 그가 일하던 곳까지 찾아가서 기웃거리기까지 했다.

 이런 예시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척을 하며 살아간다는 점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가장 간단한 경우는 의도적인 척이다. 내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즐거운 척, 괜찮은 척하면서 지내는 것이다. 나보다 높은 사람이 좋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에도, 그것을 사회생활이라 부르고 웃으면서 넘어가는 것, 친한 친구가 무언가를 이야기했을 때, 공감이 가지 않더라도 ‘아 너는 그랬구나. 힘들었겠다’라고 말해주며 넘어가는 것. 이런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행동을 하고 나면 관계적인 면에서는 이득을 볼 수도 있겠지만, 본인 스스로 자신의 행동과 가치관 사이의 간극을 느끼고 세상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척은 의도적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는 얼핏 보면 모든 척이 척을 하는 사람의 주체적인 판단 하에,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기에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척 자체가 그럴듯하게 꾸미는 태도나 모양을 가리킨다면 자기 자신만큼은 스스로의 본질을 지키고 자신의 행동이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척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척을 하던 것이 모이고 모여서 결국은 그전의 나를 잊게 만들고, 지금의 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자의 말과 행동이 바뀌는 것에 따라 그의 사고도 따라서 바뀐다는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며 언어 습관을 바꾸는 사람들이, 결국 사고 자체도 긍정적이게 되고, 매일 우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전의 상태보다 더 우울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금의 나로 바뀌기 전인 그전의 나 또한 본질적인 나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앞의 말에 따르면 그전의 나 또한 그 이전의 내가 깨지며 만들어진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계속된 과정을 거쳐 온 것이며, 또 내가 죽을 때까지 무한히 나아갈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과정을 헤겔의 변증법을 따서 척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헤겔의 변증법은 사물의 원래 상태였던 ‘정’이 깨지는 것을 ‘반’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과정의 결과는 ‘정’도 ‘반’도 아닌, 그 모든 것이 합쳐진 ‘합’이라는 이론이다. 그리고 척의 변증법이라는 나의 개념은 이러한 정반합의 끝없는 반복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도 미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왜 이런 척을 왜 하게 되는 걸까? 이것은 척의 기원을 묻는 질문인데,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미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하다. 자신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잘 해주는 것처럼 개별적인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이득을 보기 위한 몸부림이 척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척의 기원은 거시적인 측면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떠올랐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가고자 한다는 전제에서부터 시작한다. 사회적으로 옳은 가치관과 자신의 가치관이 합일되는 달콤한 꿈을 꾸는 개인은, 원래의 가치관에 익숙해진 자신의 사고방식 탓에 떠오르는 이데올로기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이 원했던 사회적인 자아와 그 전의 사고 체계에 익숙한 개인적인 자아의 간극이 커지게 되고 인지 부조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인간은 다른 이들에게 사회적인 가치관을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말을 하면, 부족한 사람이 될까 봐서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낼 수가 없고, 결국 척을 만들어 자신이 남들에 비해 사상에 뒤처지지 않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물론 그런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려고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페미니즘을 외치면 오히려 남성중심주의를 외치고, 모두가 예의를 중시하자고 말하면, 오히려 더 예의 없이 구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도 또한 그런 사상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몸부림일 뿐, 진정 주체적이고 자유롭지는 못한 것이다.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탈 이데올로기를 해야 하는데, 반 이데올로기에서 멈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런 행동이 척의 변증법에서 벗어난 듯한, 척의 고리를 끊으려는 진실의 몸부림으로 보이지만, 그저 척의 관점만 바꾼 것일 뿐,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런 사람들이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더 깊고 넓은 척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아. 나는 멋있는 사람이거든’이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을 예의와 존중이 없이 대하는 사람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증상의 초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사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판에 아주 민감하다. 그리고 이것이 심해진 사람들은 척의 변증법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척이 곧 자신이 되어, 본인이 척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럼 이쯤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을 물어야 한다. 과연 척이 나쁜 것일까? 이렇게 벗어나기 힘든 것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길게 논의하며 벗어나려고 발악할 필요가 있을까? 나의 대답은 그럴만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척은 시작에서부터 말했듯이 인간 사회에서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심해질 때, 본질적인 자신을 잃게 된다. 삶은 본인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고, 선택은 주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본질적인 자신을 잃고 척으로만 살다 보면, 가식의 파도 속에서 헤엄쳐 나올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것이 아닌 삶의 무의미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해결책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내가 얻은 결론은 없다. 이 글을 처음 쓸 때만 해도 우리 모두 가식적인 척을 벗어던지고 본질을 찾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사유를 내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나 또한 척에 의해 오염당한 사람일 테고, 앞서 말한 모든 개념들이나 시대에 대한 진단도 또한 척에 오염당한 내가 만들어 낸 것일 테니,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내 말이 정당성이 있다고 해도, 결국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척의 변증법을 멈춘 지금의 나 정도일 뿐, 본래의 나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떻게 해도 그토록 찾아 헤맨 나의 진심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다. 무의미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다는 절박함이 사람으로 하여금 철학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척과 진심, 가식적인 삶과 주체적인 삶 사이에서 고통받는 존재들인 만큼 그것의 격차를 어떻게 줄일 것인지에 대해 다 함께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양영상(철학·3)

 진심, 진실, 진짜 등의 단어가 어색하게 들리는 시대입니다. 차라리 본인이 척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그나마 진실한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시대 같기도 합니다. 깊지는 않지만 그런 점에 대해서 순수하게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최소한 나에게도 이런 문제가 있지 않나 정도만이라도 독자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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