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학 부재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이번 총학 선거의 미결이 아니라 그동안의 단과대학 및 총학생회 결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에 결코 간단히 생각할 일이 아니다. 사실 학생회가 대다수 대학인의 의사를 반영하거나, 또는 학생들이 우리 사회와 관련하여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의사를 대변하고, 이를 정당하고 타당하게 대학 공동체에서 공론화할 통로가 없다는 것은 의사결정의 재현과정을 넘어 대학의 존립 이유인 교육이란 측면에서도 소홀히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학을 국가에 비견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공식 통로란 점에서 가톨릭대학교 학생회가 그동안 해왔던 성과나 활동과는 무관하게 학생회의 부재는 대학 공동체가 당면한 위기를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유럽의 경우 이른바 68혁명 이후 그동안의 권위적 국가와 사회, 교육과 대학에 대한 비판과 거부가 일정 부분 정당하게 수용되면서 대학과 교육에 수요자인 학생들의 의사를 교육 목적 자체에 근거하여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의 한국대학에서 보듯이 형식뿐인 학생들의 참여나 대학 운영의 변경에 그치지 않는다. 대학이 존립하는 이유와 교육 철학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인식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 질문은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대학에 가장 필요한 가치는 무엇일까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 대학의 경우 1980년대에 이르러 대학 총장을 선임하거나 교수 초빙과정에서 대학생들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한다. 학생과 교수 및 교직원들이 일정 비율로 참여하는 총장 추천 및 선임위원회는 적극적으로 대학 구성원들의 의사를 반영한다. 교육 과정에서도 비록 학문의 전문가인 교수의 권위와 학문성은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사가 형식적인 형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이를 반영한 교육과정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교육은 지식을 주입하거나 어떤 목표에 다가가도록 이끌어가는 훈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받는 이들의 자아실현과 그를 통해 자신의 삶 전체를 지향하는 양성에 있다. 대학에서 교육하는 전문지식은 양성의 교육을 위한 매개 개념이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 주체와 객체의 자율성과 내면의 목표를 향한 존재론적 자유란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대학의 근본 이념이다. 대학을 운영하는 것은 철저히 이 근본 이념을 성취하는 방식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대학을 돌아보면 사정은 전혀 같지 않다. 공동체의 최고 수장인 총장 선임에 구성원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현실에서 대학공동체의 자율과 자유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가. 수요자란 이름으로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듯 하지만 이것 역시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강의 평가가 얼마나 형식적인지, 교과과정에 학생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되는지 생각해보라. 대학을 실질적으로 떠받치는 것은 학생임에도 그들은 거의 수동적 위치만을 차지하고 있다. 이름만 그럴듯한 반값등록금에 비해 근대의 유럽 대학은 이미 그 시작에서부터 대학을 공공성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보듯이 대학 등록금 자체를 폐지한 국가도 있지만 그런 형태가 아니더라도 대학의 연구과 교육을 공동선의 관점에서 운영하는 것은 이런 교육 철학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 땅의 대학에 공공성이란 개념은 전혀 낯선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학생회가 할 수 있는 정치적 역할이 보잘 것 없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교육의 본래적 목적에 미루어 학생들의 의사가 공론화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당면한 한국 대학의 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 주체와 객체의 자율성과 자유란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는 대학인의 자율성과 자유가 사라졌거나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는 사회는 죽음과도 같다. 지금 한국대학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이런 사실에 대한 자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교수나 학생들 누구도 교육과 연구의 자율성을 적극적으로 생각하거나 개진하지 않는다. 교수협의회나 교수노조가 제 역할을 못하는 것처럼 학생들의 자치회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대학은 시나브로 죽어간다. 지금 우리는 그런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
총학생회의 부재는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대학이 죽어가는 현실에서 총학생회가 일시적으로 살아난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차라리 한국 사회 전체에 대학의 죽음을 고하고, 이를 고치기 위한 행동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 역시 학생회의 자율과 자유를 재현할 통로가 필요하니, 이런 생각도 이율배반적이긴 마찬가지인 듯하다. 대학인의 지성에 묻고 싶다. 우리는 대학의 죽음을 이런 형태로 받아들여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