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늘려야만 하나
무조건 늘려야만 하나
  • 허좋은 기자
  • 승인 2010.05.05 21:36
  • 호수 2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초점 - 국제화와영어강의

“영어의 생활화를 도모하고 글로벌화 된 국제화 학교를 마련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지난해 1월 14일 본교 박영식 총장의 취임사 중의 말이다. 2000년대 들어 대학가에 나타나 한국 대학들의 지상과제가 되어 버린 ‘국제화’라는 화두 때문이다.

2009년은 본교의 국제화 원년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본교 성심교정을 중심으로 한 집중 영어 기숙 프로그램인 GEO프로그램이 작년 여름 방학부터 시작되어 학생들의 영어 생활화를 유도했다. 이해 2학기 들어서는 새로 문을 연 인터내셔널 허브관(IH관)의 강의실에 영어강의와 GEO프로그램을 집중 배정하고 국제화· 영어 관련 행정기관을 이전했다. 또한 신축 기숙사의 절반을 영어 기숙사로 지정하고 늘어난 기숙사 공간을 이용해 외국인 유학생들을 유치했다. 한편 전공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전공 영어강의의 수와 개설 전공의 수 역시 늘어났다.(그래프 참조)

대학가에 처음 국제화 바람을 일으킨 것은 고려대였다. 2003년 고려대 총장으로 취임한 어윤대 현 국가브랜드위원장은 “대학의 국제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라는 말을 남겼다. 직후 고대는 2004년부터 영어강의 의무화를 시작해 5과목 이상(경영대의 경우 10과목 이상)의 영어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에게만 졸업자격을 부여한다. 신임교수 임용 시 최초 3년간은 영어강의만 진행하도록 했다. 그 덕에 2003년 10%였던 영어강의 비율을 2009년 28%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경쟁 대학인 연세대를 비롯한 상위권 대학들도 영어강의 의무화와 영어강의 비율을 늘리기 시작했다.

고려대가 불을 지핀 국제화와 영어강의가 대학가 전체로 확산되는데 중앙일보의 부추김이 한 몫 했다. 중앙일보의 교육개발연구소는 1994년부터 매년 대학 평가를 발표해왔다. 이 평가는 대학자율화 조치 이후 대학 간의 경쟁이 심화되는 와중에 대학의 대외 경쟁력을 평가하는 중요 지표가 된 상태였다. 그 와중, 2006년부터 영어강의를 비롯한 국제화 수준이 중앙일보 대학평가의 4대 평가지표로 포함되면서 ‘국제화’ 바람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현재 본교에서 영어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김준석(국제학부) 교수는 “어느 순간 중앙일보가 대학 평가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학교 입장에서도 좋든 싫든, 바람직성을 떠나 해야 되는 입장”이라며 영어강의 확대가 불가피 함을 설명했다.

실제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본교의 국제화 순위는 4대 지표 중 하나인 교육여건 및 재정, 교수연구에 비해 낮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표 참조) ‘국내 7대 대학 진입’을 목표로 하는 본교 2015 플랜에 ‘국제화’ 수준이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대학 간 치열한 경쟁 시대에 국제화는 대학에 하나의 ‘스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앙일보 대학평가 본교 국제화 지표> ( )는 순위

부문지표

세부지표

가중치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국제화

외국인 교수 비율

20

0.09(72)

0.09(79)

0.09(77)

0.45(70)

외국인 학생(학위과정) 비율

15

0.34(76)

0.34(84)

0.46(82)

0.87(77)

해외파견 학생 비율

10

0.76(24)

0.76(33)

0.78(37)

1.20(21)

외국인 학생(교환방문) 비율

5

0.61(74)

0.61(56)

0.88(51)

0.92(49)

영어강좌 비율

20

2.21(20)

2.21(31)

3.09(26)

3.45(31)

소계

70

-4.1(50)

-21.24(79)

3.57(77)

5.08(66)

그러나 무리하게 추진한 국제화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지난해 5월 고려대 안암총학생회가 “영어강의 수강은 학생 개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할 문제”라며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나서 논란이 되었다. 전공 특성과 학생 의사를 무시한 채 의무적으로 영어강의를 수강해야 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강의를 진행하다 보니 이해도가 떨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깊이 없는 수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해 10월 고대학보가 고려대생 515명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영어강의 수강생 영어강의를 듣는 이유에 가장 많은 47%가 ‘졸업요건을 채우기 위해’라고 답했으며 ‘듣고 싶은 수업이 영어강의로만 개설돼 있어’(23%)라는 응답이 다음으로 많았다. 또한 교과 내용의 전달력에 대해서도 전공(57%)과 교양(50.5%) 모두 과반의 학생들이 ‘비효율적’이라 답했다. 국제화와 영어강의 의무화를 시행한지 7년이 지났음에도 학생들은 영어강의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교수 역시 영어강의에 대해 학생들과 비슷한 생각을 갖는 경우가 많다. 본교에서 전공 영어강의를 진행하는 전형수(가명) 교수는 “영어강의를 진행하는 대다수 교수님들이 한국어 강의에 비해 내용 전달이 30~6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동의한다”며, “교수 입장에서도 한국어 강의에 비해 2~3배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서울대에서 대학영어 주임을 맡았던 김명환(영어영문) 교수는 2008년 한 학술 대회에서 “무작정 영어강의를 의무화 하는 것은 전공강의도 부실해지고 영어실력 향상도 못하는 사태가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길게 보면 8년, 짧게 보아도 5년. 대학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국제화’와 ‘영어강의’ 강화가 대학 사회에 진입한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본교 역시 거스를 수 없어 보이는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앞서간 예를 보면 강의 당사자인 학생과 교수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일방적이 강요를 한다면 과연 내실 있는 경쟁력 강화가 될지 의문이다. 대학의 진정한 발전은 당사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