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동안 내린 비가 갠답니다
사흘 동안 내린 비가 갠답니다
  • 오명진 기자
  • 승인 2018.05.22 11:39
  • 호수 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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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를 빼니 손가락이 허전하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한 느낌도 드는데, 섭섭한 마음이 아직 남아있다. 학보 발행도 어느덧 종강호를 앞두고 있다. 매번 조판소 가는 날이면 밤을 꼬박 샌다. 마감 지키기가 너무 어렵다. 덕분에 눈두덩이 감각도 뜬 건지 감은 건지 헷갈릴 정도다. 그래도 조판 작업을 마치고 나올 때면 느껴지는 개운한 바람은 좋다. 잠깐이지만 좋다.

날씨가 우중충허니 꼭 수영장 안에서 걸어 다니는 것 같다. 수업 자료를 인쇄한 종이, 스프링 철된 노트, 신문지, 벽에 붙은 포스터 모두가 눅눅해졌다. 그런데 용하게도 찢어지진 않는다. 특히나 신문은 더 그렇다. 여러 얇은 종이가 겹겹이 뭉쳐있어 그런 듯하다. 습도가 100을 향해 치솟아도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오히려 습한 날의 종이는 스킨을 바른 얼굴처럼 촉촉해 보이기까지 한다.

308호 퇴고는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12면에서 8면으로 지면도 줄였는데. 지난 호와 다른 변수를 생각해보자면 첫째는 수습기자의 등장이겠고, 둘째는 내 엄청난 심경 변화다. 내가 수습기자라면 지금 이 문장을 읽으면서 ‘와 이 언니는 매 브리핑마다 누구를 저격하는 구나’라고 생각할 것 같다.

사흘 동안 내렸던 비는 오늘 중에 갠다고 한다. 부엌에 틀어져 있는 라디오를 통해 목소리 멋진 언니가 말해줬다. 오월은 참 많은 이야기가 있는 달이다. 가정의 달 오월, 축제의 달 오월, 역사적인 오월, 아픔이 있는 오월. 이 모두를 학보에 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으나,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려한다. 흘려보내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308호의 특징을 극복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해보자. 단어 칼럼 동지이몽을 수습 둘에게 맡겼을 때, 그 친구들은 무기력을 주제로 해보고 싶다 말했다. 주제 선정으로 엄청 고민하더니 엄청난 주제를 골라 왔다. 어려울 것 같아 다른 소소한 단어는 어때? 했었으나, 이모 씨와 장모 씨는 ‘기필코 무기력!’ 정신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둘은 읽기만 해도 무기력한 기분이 드는 글을 완성했다. 수습 때 칼럼은 숨 쉴 수 있던 기회였다. 너무나 어려운 기사 작성법에 비해 내 문장으로 글을 써도 괜찮았던 코너이기 때문이다. 이모 씨와 장모 씨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 거라 지레짐작 해본다.

보도 단신 지면도 수습들의 첫 기사 공간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각자 기사 하나씩 맡아 직접 취재하고, 개요서를 작성하고, 기사를 썼다. 이번 호 기사 중 무거운 사안은 비교적 없는 편이다. 대신 소소하게 여러 인물들의 코멘트를 따온 기사가 많다. 기자 특강에서 들었던 ‘할머니에게 이야기해주듯’이 썼을 것이다. 성심교정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성심이, 술로 연명하는 대학생들이 축제에서 주류 판매 금지 당한 일, 각종 행사와 특강들까지. 각자 첫 마감을 겪은 수습 그대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취·창업 지면도 극복 단어로 관통할 수 있다. 취업에 대한 두려움, 막연함, 창업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무턱대고 극복하라 말하고 싶진 않다. 지금 심적으로 좀 지친 상태에 있는데, 그 어느 누가 ‘극복해!’를 듣고 극복할까. 지쳤을 땐 그냥 쉬어야 한다. 휴식이란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심리학에서 휴식은 노여움, 불안, 공포 등에서 올 수 있는 각성이 없는, 낮은 긴장의 정서 상태라 한다.

그냥 다들 지쳐갈 만한 시기다. 학기도 반 절 이상이 흘렀고, 과제 철이며, 축제가 다가오지만, 축제가 지나면 바로 기말고사다. 정신력이 소모되든 체력이 바닥나든 그러려니 하자. 나부터가 안정되어야 내 주변이 안정되는 법이다. 분무기에서 분사되는 듯했던 비가 서서히 그쳐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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