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위기의식을 느꼈나
노조, 위기의식을 느꼈나
  • 허좋은 기자
  • 승인 2010.06.22 14:41
  • 호수 2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단 - 노동절범국민대회

5월1일, 전세계 노동자의 생일인 노동절의 새벽, 노동운동의 위기가 닥쳤다. 새해 첫 날이 발단이다. 지난 1월 1일 새벽, 노동계와 야당의 반대 속에서 가결 된 노동관계법이 통과되었다. 이 노동관계법은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의 임금지급을 금지하는 법이다. 그러면서 경영진과 협상에 나서는 전임자에게는 임금 지급을 유지하되 전임자의 수를 법적으로 제한하는 타임오프제를 함께 두었다. 정부는‘선진국 중에 회사가 노조전임자의 임금을 지급하는 나라는 없다’는 논리를 폈다.
타임오프제도는 경영계, 노동계 대표와 국회 추천의 공익위원으로 구성된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이하 근심위)에서 4월 30일까지 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이 근심위의 활동 마감시한인 4월 30일을 자정을 넘긴 상태에서 처리 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민주노총 측 근심위원들이 이날 0시를 기해 근심위 활동 종료를 선언 하였는데, 5월 1일 새벽 3시 김태기 근심위원장이 표결을 진행한 것이다. 당시 민주노총 측 근심위원들은 표결을 막느라 법안의 내용조차 보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대해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노동절 새벽의 날치기”라고 표현했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노조전임자 임금 지급은 노사 자율로 정하지 법으로 금지한 나라는 없다”며“타임오프제도를 실시하는 유럽 국가들의 경우 법적 기준을 최소한의 보장 장치로 삼는데 반해, 개정 노조법은 거꾸로 이를 최대 한도로 설정함으로써 노조활동을 제약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노동계 측은 이를 두고‘정부의 노조 죽이기 아니냐’고 반발하며‘폭거’라고 불렀다.
노동계의 분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5월 1일 오후 3시 여의도 문화광장에서 120주년 세계노동절 범국민대회(이하 범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2000여개의 진보단체로 구성된‘120주년 세계노동절 범국민대회 조직위원회’는 △노동탄압 중단, 노동기본권 확보 △노동자∙농민∙서민 기본생활 확보 △노동시
장유연화 반대, 좋은 일자리 확보 △밥과 강, 민주주의를 위한 MB심판, 지방선거 승리 등 대정부 4대요구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실상 이번 범국민대회는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을 규탄한 뒤 선거를 통한‘정권 심
판’과‘민주노총의 강력한 투쟁’이 주였다.

싸움 없이 얻은 권리 있나
범국민대회 막바지에 보인‘민주노조 사수 퍼포먼스’는 민주노총의 강한 투쟁의지를 보여주었다. 이 퍼포먼스는 먼저 민주정권 시기 노동 운동에 요구된‘사회가 바뀌었으니 머리띠를 풀라’는 회유에 응하여‘거친 노조 이미지 탈피 이데올로기’에 빠졌을 때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돌려받은 것은‘구조조정과 비정규직 대량양산’이라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다시 머리띠를 묶고 단결하고 하나가 되어 탄압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 퍼포먼스는 민주노총이‘매너리즘을 버리고 투쟁하겠다는 상징’이자 반성 의식이었다.
이 퍼포먼스를 볼 때 노동운동이 갖는 몇 가지 고정관념과 오버랩 되었다. 우리사회 속 노동 운동이 비치는 이미지는 거칠다. 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국가 이미지 악화와 경제적 타격은 단골 뉴스고, ‘파업’이라는 단어 앞에는‘정치’,‘ 불법’이라는 수식어가 익숙하다. 이와 함께 붉은머리띠와 팔뚝질, 공권력과의 마찰 등 폭력적인 이미지도 동반된다. 이러한 점에서 파업이나 노조 탄압에 대한 반발은 일반 시민들의 공감을 그렇게 많이 얻지 못한다. 공정방송 사수를 위한 최근의 MBC 파업 정도만이 지지를 받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노조의 투쟁으로 인해 누린 노동자들의 권리가 적지 않은것도 사실이다. 노동절의 기원이 된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의 파업은 지금으로는 (법적으로)당연시 여겨지는‘8시간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파업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18시간 이상 노동에 반발했다. 또한 최저임금제도 도입과 같은 전체 노동자의 임금상승 역시 노동운동이 이끌어낸 결과이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부 수립 이후 반공 정책으로 인해 공산 세력과 동일시되던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투쟁의 꽃을 피워나갔다. 노동 운동은 한국 근대화에 기여하며 산업 역군으로 불리면서 한편으로 저임금과 살인적 노동 환경에 시달리던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고 임금 수준을 높이며 민주화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사회의 민주화가 성숙됨에 따라 투쟁하는 노동운동에 대한 필요성의 의문이 제기 되어왔다. 사회는 대화를 통한 합의를 요구했다. 노조 역시 사회의 분위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과는 경제위기에 대한 희생 요구였다.
투쟁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는 싹을 틔우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어왔다. 그러나 열매가 익어갈 때, 투쟁을 접어 버리자 그 보답은 권리의 씨를 말리는 것이었고 노동계는 저항할 수 없을 뿐이었다.이번 범국민대회는 이를 자각하고 다시 노동운동의 투쟁 의지를 불태우는 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의지를‘어떻게 일반 시민들과 비노조 노동자들에게 설득시켜야 할 것인가’란 숙제도 함께 남기게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