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수 없는 인물을 상상하는 쾌감 - <소공녀>(2017)
있을 수 없는 인물을 상상하는 쾌감 - <소공녀>(2017)
  • 김정년(국문·휴)
  • 승인 2018.06.07 10:15
  • 호수 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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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을 발휘해보자고 우리. 옆에 있다고.” 영화에서 ‘한솔(배우 안재홍)’이 주인공 ‘미소(이솜 배우)’의 화를 달래며 꺼낸 말인데, 나는 이 대사가 <소공녀>의 풍요로운 영화감상으로 이끌 것이라 여긴다. 필자는 여러분에게 미소가 옆에 있다고 상상하는, 미소를 실제 내 친구라 여기는 모종의 사고(思考) 실험을 제안하고 싶다. 이 영화의 가장 큰 감흥은 주인공의 비범한 태도를 관객이 온전히 간직하는데서 비롯된다. 필자는 적어도 그렇게 믿는다.

언론인터뷰나 영화제 GV행사를 통해 취합한 영화제작 후일담에 따르면, 감독이나 배우마저도  ‘미소’같은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라 입을 모았다. 동시대 한국사회를 몽땅 반영한 사실적인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비현실적인 ‘주인공 미소’. 그럼에도 이런 인물을 빚어낸 까닭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주인공 미소는 남들이 갖은 애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은 삶을 고스란히 떠안고 산다. 위스키로 압축된 그의 소확행은 순간의 도피처라는 의심도 든다. 집 없는 상태에서 궁극의 평화는 요원해 보인다. 통계청의 눈으로 보면 미소는 일용직 떠돌이 노동자에 불과하다.

정작 미소의 태도는 어떠한가. ‘Why not?’ 안 될 까닭은 무어냐는 것이다. 시종일관 뻔뻔한 우리의 주인공. 미소는 꼴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성질머리다. 타인이 내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앞질러 판단하지 않겠다, 함부로 오지랖을 부리지 않겠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태도가 말과 행동에서 드러난다. 젊은 날의 밴드친구, 소중한 애인, 급여를 챙겨주는 고용주와의 교감에 집중할 따름이다. 이런 태도는 미소가 자기자신의 취향과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는 비결이기도 하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긴 얼마나 쉽던가. 타인의 시선 때문에 나의 취향을 의심하긴 어찌나 흔한가. 아아 고달픈 우리네 인생. 여기서 미소의 비현실적인 면모는 비범함으로 승화되며 우리의 소망을 대리만족시킨다. 차마 미소처럼 살진 못 살더라도 미소같은 사람 하나쯤은 세상에 있어야지. 너는 절대 기죽지 말고 계속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나고 만다.

<소공녀>의 감동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인물을 끝까지 뻔뻔하게 밀어붙이는 데서 나온다. 어디까지나 허구이기에,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상상하다보면 긍정하게 되고, 긍정하다보면 존중하게 된다. 있을 수 없는 인물을 상상하다보면, 언젠가는 이 세상에 있어도 괜찮은 인물이 되지 않을까? 사람은 그런 식으로 존중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영화가 끝나고도 미소를 마음에서 떠나 보낼 수 없다. 미소의 삶을 따라가며 타인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는 삶, 궁극적인 독립, 진정한 근대인 되기를 상상하며, 그것을 실제로 이뤄내고 싶은 욕망으로 전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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