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7일, 히로시마에서 한 노인의 원폭 피해 증언이 시작됐다. 재일한인 ‘이종근(에이가와 세이치)’ 씨였다. 그의 표정은 약간 상기되었으며 말 속도는 조금 빨랐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이주한 이종근이라고 합니다. 저는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피해자입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3살의 이종근 씨는 철도원이었다. 매일 아침 7시 반이면 출근하기 위해 검은바지를 입고 전차에 몸을 실곤 했다. 1945년 8월 6일, 그는 유독 하얀 바지가 눈에 밟혔다. 그래서 바지가 더러워지니 검은색을 입으라는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매일 타던 시간대의 전차를 놓쳐 하는 수 없이 다른 전차를 탔다. 전차는 시내 주변을 돌아 중심지로 향하는 다리 위를 달리고 있었다.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주변이 밝아졌다. 그렇게 635.32㎢ 면적에 달하는 히로시마 시 전체가 섬광으로 뒤덮였다.
“나는 입과 귀를 막은 채 몇 분 동안 엎드려 있었습니다. 히로시마는 섬광으로 뒤덮였고, 잠시 후 모든 곳이 어두워졌습니다. 잠시 얼굴을 들고 주변을 보았지만, 모두 까맣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이종근 씨가 피폭당한 곳은 원폭 투하지점으로부터 약 1.8㎞ 떨어진 다리였다. 그는 비상사태라고 판단해 즉시 다리 밑으로 피난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화상 입은 사람들은 절망하며 울었고 몇몇 사람들은 뜨거운 몸을 식히기 위해 강으로 달려갔다. 이종근 씨는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온몸의 피부가 거의 다 익어 붉은 것은 물론이고 사람 꼴이 아니었다.
비일상적인 일상
만신창이가 된 이종근 씨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귀갓길에서 본 상황은 처참했다. 이미 죽은 채로 길가 한복판에 누워있는 할머니, ‘도와주세요’라고 애원하는 화상 입은 사람들, 나무 아래 깔려 눈알이 튀어나와 죽어있는 말의 시체, 들끓는 구더기로 덮여있는 사람의 육신이 즐비했다. 강연장은 침묵과 탄식으로 가득 찼다.
“죽은 시체들이 히로시마 강물을 따라 흐르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피폭 현장을 벗어나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다행히 집에 돌아왔지만 정신과 육체의 고통은 나날이 계속됐다. 집에서는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나를 안고 울며 내 얼굴에 떨어뜨렸던 뜨거운 눈물을 잊을 수 없다”며 “어머니로부터 ‘차라리 빨리 죽어라’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다. 어린나이에 진심이 아닌 말을 듣는 것은 힘들었다”고 했다.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는 옅은 슬픔이 깔려있었다.
살기 위한 혼자만의 싸움
이종근 씨는 먹고 살기위해 피폭 후에도 일을 계속 했다. 트럭 운전기사, 가내 주조, 재활용 숍 운영을 하며 가정과 자기 자신을 지켜냈다. 73년이 지난 현재 그는 딸 세 명을 모두 대학에 보냈고, 다른 일본인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여러 나라들을 다니며 피폭증언 활동도 하고 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이종근 씨 혼자만의 노력이었다.
“눈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머리카락 만지기였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살아있구나’를 확인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왔습니다.”
아침마다 머리카락을 확인하며 살아있다고 안도하는 일이 피폭자들에게 일상이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후,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이 있었냐는 질문에 이종근 씨는 한국말로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약 10만 명으로 추정되며, 그 중 생존자 4만 3천여 명은 한국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1967년 2월 설립한 한국인원폭피해자협회의에 등록된 피폭자는 2천여 명뿐이다(2010년 기준). 원폭 피해자 대부분은 피폭 후유증으로 사망했거나 미등록된 상태다. 현재 국고로 운영 중인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경상남도 합천)에는 101명의 피폭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은 日本人들
이종근 씨와 같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관심을 가진 두 일본인이 있다. 다른 직업과 성별을 가진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이야기를 담아냈다.
전 주고쿠 신문기자였던 히라오카 타카시 씨는 기자로 활동하던 1965년 봄, 경상남도 마산에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인 박 씨였다. 편지는 “피폭으로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해, 일본의 지원을 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히라오카 씨는 “당시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는 오직 일본인뿐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히라오카 씨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비참한 삶을 취재해 일본 사회에 알리기 시작했다.
<미친 여름의 낙인(狂夏の烙印)>은 이토 소노미 씨의 2009년작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는 경상남도 합천군에 위치한 ‘평화의 집’에서 지내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토 소노미 씨는 “영상에 출연한 분들은 원폭 피해자 중 전형적인 모델이다. 연령별로 촬영해 나중에는 어떤 피해가 나오는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제작의도를 밝혔다. 72분간 이어지는 영상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계속되는 증언은 볼 수 있었지만, 한일 양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대한민국 국민의 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