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자들의 학교, 정치하는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들의 학교, 정치하는 아나키스트.
  • 김정년
  • 승인 2018.08.29 01:36
  • 호수 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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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년 (국어국문4)
"가톨릭대는 정말 학생의 ‘열등감’을 고조시키는 학교인가?” 이 도발적인 주제를 놓고 방학 동안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캠퍼스 커뮤니티에선 학우들이 성심교정의 가능성과 한계를 논했다.

익명의 지적에 공감한다. 대학에서 한 학기 쯤 지내면 캠퍼스로부터 획득한 감흥이 손에 쥘 듯 생생해진다. 비교, 체험, 카더라, 썰. 구체적인 판단근거가 쌓이며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해서 가을학기 무렵은 소속감에 대한 고민이 자연스러운 시절, 정서적 과도기다. 학우들이 웹상에서 열띤 의견을 이어간 것도 내가 선택한 학교에 긍지를 갖기 위한 학우들의 노력 아닐까.

대학에 오래 머무르며 배운 건, 열등감이나 자긍심이 ‘정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등록금 낸 학생의 입장에서 정치란 ‘득실을 저울질하는 작업’이다. 캠퍼스가 나에게 무엇을 안겨주는지 따져보는 것. 따진 것을 토대로 행동하는 일이 소속감 조정에 꽤 도움이 된다.

성공적인 복학을 고민하던 지난겨울, 뉴스 기사로 학교 소식을 접해 들었다. 입후보하는 후보가 없어서 총학선거 자체가 무효화 됐다. 가톨릭대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학교’라는 멍에를 쓰게 됐다. 선거 결과를 비난하지 않겠다. 별 수 없으니까 대학가 전반에 ‘개인의 취향’이란 이름으로 탈정치성이 정당화되는 가운데, 후보가 없어 전공대표도 간신히 찬반으로 뽑히는 게 현실이니까.

다만 개인이 발휘하는 정치성은 작동해야만 한다. 그것은 자유로운 개인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 아나키즘의 근본이기도 하다. 집단단위로 나서는 정치행동이 시대착오적이라면, ‘개인단위’로 나서는 정치행동을 따져보는 게 낫다. 기사에 대댓글을 달며 탄식을 늘어놓기보단, 시대에 걸맞은 정치성을 고민하는 게 ‘아나키스트의 학교’라는 낙인을 유머로 승화시키는 길이겠다.

타인을 설득하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게 강호의 도리다. 자랑은 못되지만, 개인단위로 나서는 정치행동에 대해선 그래도 일관성 있는 실천을 해왔던 것 같다. 역곡 대학로 조성계획으로 부천시장이 성심교정에 들렀다. 공청회에서 나는 시장에게 눈을 맞추고 질문을 던졌다.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면 대학로가 지금보다 흥했을까. 성심교정에 예체능교양이 드물고 책상머리 교양만 잔뜩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해, 학교를 돌며 객관적인 정보를 채집했다. 나는 그것을 개인자격으로 보도했다. 비록 널리 공론화되지 못한 건 아쉽지만. 나는 학교가 야무지게 따오는 정부지원 사업이 재학생에게만 유리한 구도로 집행되는 것이 늘 불만이다. 교육부 방침을 따른다지만, 휴학이 필수인 세태를 감안하면 마냥 수긍하긴 어려운 규칙이다. 이것은 내가 졸업 직전에 해소하고 싶은 마지막 이슈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전공에 대한 애정을 증폭하고 학교를 향한 오해는 많이 누그러트렸다. 캠퍼스 이슈 중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 싶은 안건을 포착한다.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나의 이득으로 환원시킨다. 공지사항, 학사일정, 문의처, 신문고의 유무만 체크해도 개인은 학내문제해결에 있어 탁월한 이니셔티브(주도권)를 가져갈 수 있었다.

캠퍼스에 의구심을 갖고 나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집행하는 개인이 곳곳에 들어차면, 뭐든 나아지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캠퍼스에서 발휘되는 개인단위의 정치요, 캠퍼스 열등감을 해치우는 최선의 처방 아닐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표현을 빌려 쓴다. “나는 열등감이 아니라 열등감에 대처하는 나의 생각을 믿는다.” 정치하는 아나키스트의 출현은 언제든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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