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당선] 자연의 얼굴에서 엿본 깨달음
[수필 당선] 자연의 얼굴에서 엿본 깨달음
  • 오예은(약학 6)
  • 승인 2018.12.11 11:47
  • 호수 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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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을 맞이하여 인천 서해의 ‘덕적도’라는 섬에 가족 여행을 갔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모두 돌아가신 관계로 명절이면 달리 갈 곳이 없어진 우리 가족은 작년부터 추석이면 이 섬에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총 다섯 식구인데, 동생 둘이 저마다 지방에서 지내게 되면서 평소엔 세 식구로 단출하게 생활합니다. 그러다 모처럼 명절이 되어 다섯 명이 한데 모여 복작복작해지니 사실 그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가을 날씨까지 더해진 여행길이란,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지요.


올해도 덕적도를 방문하게 된 것은 우선은 낚시 때문입니다. 작년엔 멸치 떼를 따라 고등어 떼며 삼치 떼가 덕적도로 몰려들었습니다. 은빛으로 넘실대는 고등어 떼를 보고 있자니 절로 탄성이 나왔지요. 낚싯대를 드리우기가 무섭게 잡히는 물고기로 어업은 그야말로 대성황이었습니다. 낚시를 좋아하면서도 번번이 허탕을 치기만 했던 우리 식구로서는 낯설고도 경탄할 만한 경험이었던 겁니다. 낚싯대에 걸려 올라오는 물고기의 그 역동적인 감각이란! 소위 말하는 ‘손맛’을 제대로 보고야 만 것이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덕적도는 공기도 좋고, 경치도 장관인 곳이거든요. 만조 때는 신나게 낚싯대를 드리웠다면, 간조 때에는 물이 빠진 해안가를 맨발로 거닐었습니다. 사각사각 밟히는 모래 사장과 찰박찰박한 느낌의 갯벌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서해 바다에서는 다채로운 경험이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매일 아침이면 산책로를 거닐고, 천천히 산을 오르기도 했어요. 한 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는 산 정상에서 찬찬히 내려다보는 섬의 풍광은 웅장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런 즐거웠던 기억들 덕분에 올해도 망설임 없이 덕적도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인천항에서 2시간여 배를 타고 덕적바다역에 도착했습니다. 여전히 덕적도는 푸르고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섬에 발을 디디자마자 한껏 기분 좋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지요. 우리 가족은 작년과 같은 민박집에 방문하였는데, 주인 아주머니의 모습도 한결같아서 덕적도의 시간은 멈춘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어요. 다만 민박집 앞에 있던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 성견이 되어 제각기 다른 곳으로 분양이 되었다고 하니, 시간이 흐르긴 흘렀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는 짐을 재빠르게 정리하고, 부푼 마음으로 고등어를 신나게 낚았던 방파제를 다시 찾았습니다. 저마다 오른 손엔 호기롭게 낚싯대를 들고선 말이죠.
그런데 찾아간 방파제의 분위기는 지난해와는 달랐습니다. 이미 우리보다 앞서 낚시터에 자리한 사람들은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친 얼굴들이었어요. 스윽, 하고 스파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조황을 염탐해 보았지만 텅 빈 물통뿐이었습니다. 작년과는 달리 멸치 떼가 섬에 찾아오지 않아서 고등어 떼도 없었던 겁니다. 문제는 단순히 고등어 떼만 없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래도 ‘혹시나’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낚싯대를 드리워 보았습니다. 그러나 장비를 잘 갖춘 낚시꾼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초짜나 다름없는 우리 가족에게 걸려드는 눈 먼 고기가 있을 리 만무했지요. 결국 서너 시간 낚싯대를 드리웠으나 허탕을 치고 털레털레 빈 손으로 민박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고기가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고 허탈한 웃음만이 오가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수확은 없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마음이었어요.


그날 밤에는 간조시간 즈음하여 다시금 해변으로 갔습니다. 가는 길부터 우스꽝스러운 몰골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습니다. 오후에 했던 낚시에선 성과가 없었으니, 갯벌에서 만회를 해보겠다는 의욕이 복장에서부터 드러난 겁니다. 한 손엔 호미를, 머리엔 헤드라이트를 끼고 결연한 표정을 한 그 모습이란! 하지만 작년에 갯벌에서 별다른 재미를 못 보았기 때문에 사실 별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쩐지 수상쩍은 흔적이 있는 곳을 호미로 살짝 파내었더니, 과장을 좀 보태어 손바닥만한 골뱅이가 나오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 크기를 보고서 저는 순간적으로 ‘내가 섬이 아니고, 원시 시대로 여행을 왔던가’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요. 이를테면 중생대나 백악기처럼 이(異)세계의 이름을 한,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모든 것이 거대하고 울창했다고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시대 말입니다. 우리 가족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농번기에 밭을 메는 사람들마냥 갯벌을 부지런히 돌아다녔습니다. 조금만 의심스러워 호미로 파 보면 어김없이 커다란 골뱅이가 물을 뿜으며 그 자태를 드러내니, 신이 나지 않을래야 안 날 수가 없었어요. 수확의 즐거움에 흠뻑 취한 우리 가족은 다음 날을 기약하면서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베개에 머리를 누이자 마자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건 말할 것도 없지요.


이튿날, 낚시를 포기하지 못하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장소를 바꿔가며 또 다시 낚시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간밤에 인터넷으로 열심히 검색해서 인접한 섬인 소야도의 낚시 포인트까지 찾아갈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던 겁니다. 그러나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 물고기만 몇 마리 잡힌 관계로 방생해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민박집으로 돌아와서 인근을 산책하고, 달디단 낮잠도 자면서 모처럼 휴식을 취하는 한적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밤에 골뱅이를 잡을 것이라는 기대감 덕분인지, 즐겁고도 여유로운 마음이었습니다.
밤이 되자 우리 가족은 들뜬 마음으로 재차 해변을 찾았습니다. 전날보다 더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간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러나 웬걸, 골뱅이는 아무리 땅을 파도 좀처럼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나마 몇 마리 나온 것들도 어제 잡은 골뱅이의 오 분의 일 크기에 불과했습니다. 전날 고생대의 생물과 조우했던 우리들에게 21세기의 골뱅이는 시시하기 그지 없는 것이라, 불타오르던 열정은 빠르게 시들해지고야 말았습니다. 바다의 얼굴은 어제와 오늘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어제와 오늘의 간조 시간이 다르고, 수온이 다르고, 해풍이 다르고, 달빛도 다르다는 것을요. 각각의 것들은 제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톱니바퀴의 아귀처럼 딱 들어맞을 때라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날 밤의 즐거움이야말로 우연한 자연의 선물이었던 것이지요.
어제의 수확이 오늘의 욕심으로까지 이어진 탓인지, 바다는 어쩐지 냉담한 표정을 한 것만 같았습니다. 발등에 찰박거리는 바다의 온도를 유난히 차갑게 느낀 것은 저의 기분 탓일까요? 그래도 오직 보름달만은 휘영청 떠올라 우리 가족을 따스하게 밝혀주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세상 만사에는 늘 그런 완급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가더군요. 모든 것은 제각기 불완전하고, 그렇기에 비로소 특별함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그러한 생각들이었지요.
온통 새카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의 물결 위로 고즈넉한 달빛만이 잔잔하게 흘렀습니다. 이따금 파고가 낮은 파도가 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뿐이었어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전날에 비교하자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참으로 풍성한 시간이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가시적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 일들은 얼핏 무용(無用)한 것으로 치부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걸까요? 사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거나 만족시키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방향성을 지키면서 나아가는 일, 성장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것이 종국에 어떤 형태의 열매를 맺을지는 모른다고 해도 말이지요. 이런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위해 전날의 재미난 경험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시간은 어째서 이다지도 빠르게 흐르는지요. 다음 날도 어김없이 청명한 하늘 위로 태양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또 다시 내년의 추석을 기약하면서 인천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지냈던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더군요. 배가 제 크기만큼이나 중후한 경적 소리를 울리자 점차 섬이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멀어지는 덕적도는 도착했을 때와 다름없이 푸른 하늘과 울창한 산림을 뽐내고 있었지요. 내년에는 과연 어떤 인생의, 어떤 모습을 한 제가 덕적도에 발을 내딛게 될까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다만 한가지는 스스로와 약속해보기로 했습니다. 제 자리에서 올해보다는 한 뼘 더 성장한 모습으로 찾아갈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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