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작] 준마열전駿馬列傳
[수필 가작] 준마열전駿馬列傳
  • 김정년(국어국문 4)
  • 승인 2018.12.11 11:47
  • 호수 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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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을 표창하는 ‘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의 ’전기’
순탄하지 않은 시대에 올곧게 살아간 이들에 대한 ‘기록’

『한국 산문선』 3권 서문序文 - ‘세상과 나를 다스리는 글쓰기’ ‘中’

재인 2년, 성은 ‘정’, 이름은 ‘성준’인 학생이 취업을 한다. 성준은 가톨릭대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그와 동문수학하던 동기동창이 그의 졸업을 축하하며, 둘도 없는 친우가 본교에서 이룬 행적을 널리 전하기 위해 글을 짓는다.


나는 입학식 합숙행사에서 우연히 성준과 같은 방을 쓰게 되며 인연을 맺게 됐다. 다른 학생에 비하면 그의 외모와 행동이 비범한 구석이 많았다. 한 살 많은 형에게 친목도모를 명분으로 형님 얼굴에 아무렇지도 않게 분칠을 한다거나, 예능에 소질이 있는 사람을 눈여겨보고 장기자랑을 부추기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본디 명랑호쾌한 기질을 아껴, 유쾌한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했으므로 성준과는 학부생 새내기 시절부터 어울려 다녔다. 명박 3년, 춘삼월 이튿날. 첫 등교 첫 수업을 끝내고 교문 앞의 토스트 가게에서 빵조각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갑 선배를 만나러 과방에 갈지 을 선배를 쫓아 동아리 방에 갈지 따위를 고민했다.
새내기 인심이 대개 그렇듯, 적당히 속물적이었고 얄팍한 속셈으로 선후배를 따라다니고, 고등학교시절 어렴풋이 그렸던 대학생활의 낭만을 쫓아 방탕한 유희를 이어갔지만, 우리는 그것을 탁월한 유산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얄팍한 대인관계와 바닥을 기는 성적표 정도였다. 우리는 턱걸이로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게 됐다.


1학년 말쯤의 일이다. 성준이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꾀를 부렸는데 중간에 나를 미끼로 끼워뒀다. 의도가 무례하고 나를 이용하려는 뜻이 불쾌해 결국 다투게 됐다. 서로 절교를 하기에 이르렀지만, 따지고 보면 성준의 연인에게 속내를 들키긴 커녕, 우리가 꾀를 부리는지도 몰랐을 지극히 사소한 잔머리 굴림이었다. 훗날 잔꾀 때문에 우정을 망가뜨렸다는 생각이 들어 심히 부끄러웠다. 시간이 흘러 내가 성준의 집으로 찾아가 화해를 요청하니 서로 응어리 진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더라. 덕분에 우리 사이는 예전보다 돈독해졌다.
성준은 2학년이 되자마자 현역 해병으로 입대했고 나는 사정이 있어 학교를 계속 다니게 됐다. 해병대 출신은 대체로 자부심을 내세우는데 부끄러움이 없다. 그래서인지 성준도 복학 후 국문학도가 모두 모이는 학술답사 때 해병대자수를 입힌 활동복을 입는다거나 애국보수의 뜻을 세우는 호국보훈시詩 공모전에 나서기도 했지만, 종종 학우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내 생각에 성준이 해병대출신임을 굳이 티내며 드러낸 우스꽝스런 모습보다는, 해병대를 나와서 들인 성준의 습관이 좋아보였다.
성준이 해병대를 다녀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가 새내기 시절에 지닌 가벼운 언행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묵직한 태산처럼 진중한 구석이 생겼고 탁월한 삶에 대한 자기자신의 기준을 밝히게 됐으니 나는 오나라의 선비 노숙이 여몽의 성장을 지켜보는 마음으로 그와 재회했다.
 내가 약소하나마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면, 성준은 어학에 재능을 보였다. 이치를 연구하고 수양하는 공부는 부족했지만, 용기와 실행력이 탁월하여 대략이나마 이해하니 어떠한 논의를 하더라도 학문의 핵심을 벗어나지 않았다. 성준은 어학에 남다른 흥미가 있어 언어의 원리와 문장구조분석에 있어서 대체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현대인의 언어습관에 드리워진 병통의 근원을 깊이 연구했다.
또한 모던타임즈 풍의 노동자 패션을 좋아하여 남다른 패션감각을 막힘없이 드러내었다.
근혜 2년, 우리가 3학년이 되던 시절 성준이 말한다.

"정년 형님은 작년에 군입대조차 미루며 자기자신의 고유성을 찾아나섰소. 외연을 확장하려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온갖 풍습을 몸에 익히러 다녔지요. 허전한 지갑사정이자만, 모자라지 않게끔 신경 쓰는 현실적인 처세가 훌륭했습니다. 무엇보다 온 맘과 온 힘을 다해 이런저런 활동에 나서는 걸 보고 내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깨달은 바가 무엇인가?"

"형님도 기억하겠지만 나는 새내기 때부터 근대인의 미풍양속을 사랑했습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같은 소설에서 나올 법한 근대인의 기풍이 좋습니다. 내 콧수염을 기르는 것도 그런 풍속을 닮으려는 시도의 일부입니다. 시대착오적이며 깔끔치 못하다는 비판은 이미 충분히 받고 있지요. 하지만 청년이 자기자신의 고유성을 발휘하려면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자기자신만의 고유함이 발휘되는 법입니다."

성준이 나의 하찮은 휴학생활을 탁월하게 여겨주는 것만으로도 크게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성준이 곧바로 이어서 말한다.

"나는 금년에 휴학을 합니다. 20세기 미국 노동자들의 복식을 연구해 그것을 잡지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소개하는데 1년을 바칠 생각이오. 내가 비록 학교를 떠나도 형님은 내 곁에서 조언을 아끼지 말아주오."
그 뒤로 성준은 휴학을 선언해 부지런히 일하고, 일해서 번 돈으로 책을 만드는데 바쳤다. 성준은 거리로 나서 화보를 찍기도 했고 본문의 편집을 책임감을 갖고 해내니 연말에 이르러 정말로 책을 지어내고 말았다. 책을 보급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인쇄편집활동을 중단하게 됐다. 허나 성준은 책을 만들어 낸 뒤, 전에 없던 패기를 갖추게 됐으니, 내가 오히려 성준 덕에 큰 깨달음을 얻게 됐다.
성준과 정년은 그 뒤로 서로가 서로의 활동에 영감을 줬다. 성준이 책을 만드니 내가 독립출판물 탐구에 나섰고, 내가 눈송이여학교로 학점교류를 나서면 성준이 호랑이학교로 학점교류를 나섰다. 정년이 대학잡지기자활동을 나서니 성준이 언론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성준의 휴학이 끝나고 서로 복학하는 시기가 어긋나 같은 강의실에서 만날 일은 없었지만, 나는 학업과는 상관없이, 성준과 세상만사토론과 학술연구를 목표로 공부모임을 가져가며 대학시절보다 잦은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오래 만나 사귈수록, 성준과 대학시절에 만나 꾸린 인연이 퍽 귀하다 싶다. 성준과의 인연을 헤아리다 보면, 젊은 날에 맺어야 할 우정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게 된다.
5공화국 이후, 전국팔도의 젊은이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유 받는데, 배움에 비하면 배움 삯이 너무 커 배움에 깊이 몰두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배움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아 후회막심으로 교정을 떠나는 학생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신입생 시절의 유희는 한순간이요, 다들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학시절을 방황하다 술자리에서 때늦은 한만 풀어내더라. 졸업을 마친 벗들에게 대학시절에 남긴 가장 큰 후회를 물으면 열에 아홉은 친구관계를 꼽는다. 특히 마음을 터놓고 사귄 벗이 많지 않음을 한스러워 한다. 하지만 성준과 정년은 마음을 터놓고 사귄 벗이 되었다. 딱 하나에서 둘쯤 만들면 탁월한 사이가 된 것이다.
성준과 나는 정치성향도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하지만 인간 특유의 모순을 염려하고 인지상정을 앞세워 판단하는 버릇으로 서로를 물들이니 평생 이어갈 우정을 다져 나가게 됐다, 이는 세상에 태어나 얻기 힘든 귀한 인연이다.


근혜 4년,  봄꽃이 무성하게 흩날리던 어느 날. 서촌 자하문 어귀를 함께 걸으며 성준이 내게 건내 줬던 말을 보태려 한다.

"나는 사실 포기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형님.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진 않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나는 졸업을 위해 오랜만에 돌아온 교정이 퍽 낯설까 염려스러웠다. 외톨이가 되는 건 아닐까? 취업을 핑계 대고 하고 싶은 바를 포기하는 건 아닐까? 남들보다 갑절로 늦게 졸업을 맞이한 내가 고민하던 까닭은 그런 물음이 마음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허나 성준이 내게 건낸 말은 오래도록 남아 대학교정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내게 큰 용기가 되고 있다. 스스로의 능력을 실력보다 높이 평가해 마음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노력을 이어가게 됐다. 용기는 능동적인 행동을 북돋는다. 용기로 말미암아 학업에 정진하고, 학우들과의 새로운 인연을 능동적으로 꾸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탁월하게 교환한 우정은 서로의 특장점을 촉진시킨다고 믿는다. 성준이 내게 건낸 말은 그것을 증명한다. 마음을 다해 사귄 벗이 건낸 말을 탁월하게 간직해 둔다면, 누구나 험난한 사회생활을 더불어 견뎌내며 새로운 우정을 이룰 수 있으리라.
나는 지금까지 어느 대학가에나 있을 법한 젊은 날의 우정에 대해서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지금까지 환기시킨 우정에 대한 일대기가 독자대중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한국 산문선 1-9』, 안대회 外 편역, 민음사, 2017. 본고의 인용구는 3권 서문의 내용 일부를 발췌했음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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