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당선] 영원한 이방인으로부터
[소설 당선] 영원한 이방인으로부터
  • 유지현(심리 3)
  • 승인 2018.12.11 10:07
  • 호수 3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 자체가 서로에게 재앙이 되는 만남도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우리를 원망하고 우리가 악마 같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방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와의 만남을 지속하는 한 너를 양분삼아 연결되어 왔다는 부채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계속해서 너를 조롱하고 왜곡할 거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영원히 네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너는 알아채리라고 믿는다. 이건 편지다. 영원한 이방인에게 쓰인 편지.

-

야, 근데 이다해는 우리랑 진짜 쌩 까고 살 거래?
여자애들이 전화 했다가 까였대잖아.
맞아. 저번에 나랑 반장이랑 전화 해가지고, 은지야 너 알지. 은지가 완전 잘 따라해.
오, 빡지. 해봐.
다해야, 나 반장인데. 3반애들 이번 주에 인하대에서 다 같이 모이기로 했는데 너 안 올래?
모두 빡지를 보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 빡지는 관중의 기대에 화답하듯 턱을 쳐들고 역겨운 표정을 만들었다.
내가 너넬 왜 봐야 되는데? 다신 연락하지 마.
파하하하하... 살얼음 같은 정적이 박살났다. 서로 손가락질을 하고 그 말을 따라하며 웃었다. 취기가 오르긴 커녕 부대찌개가 채 끓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이미 그 식당에서 가장 시끄러운 무리였다. 나는 이십 여 명의 친구들을 돌아봤다. 이렇게 분기 별로 모이기만 하면 열일곱 열여덟 때로 돌아간 것처럼 철딱서니 없이 유쾌해지는 모습이 퍽 사랑스럽긴 했다. 장판에 손바닥을 얹고 따끈하게 올라오는 열기를 느끼면서, 모두가 그 때와 그대로라고 생각했다. 딱 한 명만 빼고.
다해는 어느 무리에나 있을 혼자 튀어져 나가버린 돌이었다. 오래 앓던 이가 건드린 적도 없는데 쑥 빠져나가듯이. 그 애가 1학년 말쯤에 학교를 그만뒀으니 그새 시간이 흘러 어색해진 거겠지 생각했던 우리는 오랜만에 연락을 건네 봤지만 돌아온 건 싸늘하다 못해 황당한 대답이었다. 그 후 일주일 만에 다해는 이방인으로 전락한 채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아무도 그 애가 떠난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다해는 분명히 우리 안에 있었다.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잔뜩 날을 세우고 서로를 품평할 각오를 다지는 동시에 쭈뼛거리며 앞으로의 1년을 누구와 보낼지 애처롭게 살피던, 어제까진 중학생이었던 애들로 가득 찬 교실. 우리는 이 주 만에 진작 알았던 사이처럼 가까워졌다. 그 무렵 우리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이 반은 진짜 잘 논다, 하던 게 우리의 자부심이었다. 각자가 친해지게 된 과정은 기억이 안 나지만 다해와의 처음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 때 우리는 다해의 환심을 사는 데에 열심이었으니까.
다해는 4월 말쯤에 전학을 왔다. 처음 들어보는 동네에서 왔다는데 수수하고 깨끗한 인상이었다. 달리 말하면 조금 촌스러운. 뽀얗게 깨끗한 얼굴에 이목구비도 예쁘장했다. 크고 화장기 없는 눈을 끔뻑이던 다해를 반장이 빤히 쳐다보던 게 기억난다.
같이 다니자고 할까?
조회가 끝나고 혼자 남은 다해를 힐끔거리며 반장이 조용히 말했다.
왜? 쌤이 너보고 챙기래?
아니 그냥. 예쁘게 생겼잖아.
빡지가 민아 어깨를 툭 쳤다. 여자 좋아하냐? 예쁘다고 데려오게. 반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뭐래. 반장과 빡지는 우리 중에서도 유독 잘 놀았다. 불같고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빡지’가 된 빡지와 반장의 어른스러움이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적절한 판단을 내릴 줄 아는 반장의 의견은 거의 그대로 실행에 옮겨지곤 했으므로 우리는 그 날 다해와 점심을 같이 먹었다. 우리가 서로를 비난하면서 다해를 추켜세우고 웃겨주려고 노력할 때면 다해는 민망한 듯이 손등을 입가에 갖다 대며 웃었다. 말이 별로 없고 조용했지만 우리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우리를 시작으로 다해는 여자애들 사이에 안착했고, 남자애들이야 하얗고 얌전한 새로운 여자애가 마음에 안 들 리 없었을 거다. 다해는 먼저 나서는 편은 아니었지만 같이 뭘 하자는 전체의 소리를 거절하는 법도 없었다. 그래, 하고 따라붙던 조용한 웃음. 지금도 다해를 떠올리면 그 모습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우리는 분위기가 좋은데다가 전학생까지 데리고 있는 반이 됐다. 그렇게 1년을 이렇다 할 분열도 서먹함도 없이 돈독했었다. 그러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거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다해 왜 화났을까?
나는 분위기가 찌개처럼 푹 퍼져갈 때 궁금함을 참지 못 하고 조용히 말을 꺼냈다. 테이블에는 예상했던 침묵이 감돌았다.
몰라. 생각해보니까 또 웃기네. 야, 그니까 내가 전화하지 말랬잖아. 걔 원래부터 쎄 했다고 고딩 때부터.
그래도 처음엔 잘 놀았었는데.
맹지가 말끝을 흐렸다. 빡지는 잘 빡쳐서 빡지, 맹지는 맹-해서 맹지. 나는 애들이 달고 태어난 이름보다 이것들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빡지는 말없이 제 그릇을 젓가락으로 휘젓더니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걔 김현우 좋아해서 그랬을 걸.
그 이름에 나도 모르게 반장에게로 눈길이 갔다. 반장은 관심 없는 듯 눈을 내리깔고 술잔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맹지 눈이 동그래졌다.
다해가 현우를 좋아했다고?
좋아했겠지. 맨날 옆에 붙어 있으려고 했는데.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런 이유였나? 김현우는 옆 반이었는데 우리 학년의 몇 안 되는 ‘괜찮은’ 남자애였다. 착하고, 외모도 제법. 여자애들끼리 있을 때 현우의 이름은 종종 입에 올랐다. 그러니 다해가 그 애에게 호감을 가졌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현우는 1학년 끝나갈 즈음 반장의 남자친구가 됐다. 그러니까 빡지의 말은, 다해가 반장의 남자친구를 계속 탐내서 우리 모두와 멀어진 거라는 그런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반장과 현우가 사귀기 한참 전인 체육대회 날, 현우가 구석에 앉아있던 다해에게 음료수 하나를 건넸고, 애들 너무 시끄럽지? 아니면, 너 지금 심심하지, 였나? 그 말까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여태까지는 한 번도 되뇌어 본 적이 없는 낯선 기억이었다. 다해와 현우라,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몇 가지 기억들이 깜박, 깜박 거렸다. 하지만 쉽게 윤곽이 잡히진 않았다.
다해가 초반엔 우리보다 현우랑 많이 놀려고 하긴 했었지. 그 땐 친구관계 민감하잖아, 좀 서운했어.
반장은 차분했다. 턱을 괴고 우리를 찬찬히 돌아보며 말했다. 반장은 학기 초 임시반장을 맡았다가 그대로 진짜 반장이 됐다. 의젓한 애였고, 한 번도 도를 넘거나 우유부단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걔가 하는 말이 다 맞는 말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다해는 가끔 우리와 대화를 하다가도 현우를 보러 복도로 나갔다. 작은 창 너머로 지켜보던 우리에게 음소거 된 둘의 대화는 지루하도록 길곤 했다. 하지만 멍하고 순하던 다해와 질투라는 단어는 쉽게 매치되지 않았다. 내가 기억을 되짚는 동안 대화의 흐름은 빠르게 돌아 이미 다해를 저만치 지나쳐 간 후였기에 나는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우리는 다해 말고도 할 얘기가 아주 많았다. 하지만 나는 대화가 무르익는 동안에도 침습적으로 아른거리는 다해의 허옇고 멍한 얼굴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 알겠어. 하며 웃던 얼굴. 조금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로 늘 그런 식인 애였다.
나 내일 학교 그만 둬. 엄마 돌아가셔서. 아빠랑 같이 다른 동네 가서 살아야 돼.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걔가 멍청하게 웃던 무수한 순간들보다도 강렬하게 떠올랐다.

아, 나 진짜 헤어질까?
맹지의 눈썹과 입 꼬리는 울 것 같이 축 쳐져있었다. 애들끼리 자리를 옮겨 다니다 우리 테이블에 여자애들만 남게 된 순간부터 시작된 맹지의 남자친구 이야기는 십분 째 같은 곳을 빙빙 돌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맹지의 남자친구는 언제나 쓰레기 같은 남자였고 맹지는 그들을 만나며 참 불쌍하고 추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그런 이야기를 구태여 또 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맹지가 자기 얘기를 거듭 풀어내는 건 그 애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간간히 던져주는 나 때문이었다. 뭘 헤어져, 오빠한테 잘 얘기해서 풀어. 빡지와 반장이 헤어지라는 말을 십분 째 반복해도 맹지에게 닿지 않았지만 내가 그런 말만 하면 반응이 성큼 나왔다. 맹지는 고등학생 때부터 유난히 남자애들의 눈치를 봤다. 조용한 자신의 성격을 여자로서 매력 없고 어필되지 않는 것으로 자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착하고 순진한 맹지가 매번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없게 만드는 건 스스로에게 걸어놓은 그 저주였다. 그 굴레를 따라 몇 바퀴를 돌다 온 맹지는 아주 뻔해져 있었다. 그 애는 불쌍한 여자로 여겨지고 싶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상의 범주에서 밀려나고 싶지 않아했다. 나는 그에 맞춰 적당한 질문들을 몇 번 끼워 넣었고, 누구에게 갖다 붙여도 그럴듯할 조언들을 내놓기도 했다. 어느 것도 딱히 진심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오빠가 아직 네 머리통을 후려치지는 않지? 정말로 물어보고 싶은 건 그 정도였다.
왜 그런 애들만 만나냐고. 너 취향 존나 별로야.
맞아.
얘 고등학교 때도 그 양아치 같은 오빠 좋아했잖아.
아 그 축구부? 진성인가 준성인가.
안 좋아했어!
맹지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빽 내질렀다.
뭘 안 좋아해?
혁개가 우리 테이블로 와서 털썩 앉았다. 혁개는 ‘개’같아서 ‘개’였다. 덩치가 크고 괄괄했지만 나름 의리가 있어서 우리 반의 행동대장 같은 애였었다. 혁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냐고 묻기에 우리는 잠시 맹지의 구질한 연애사를 덮어낼 거리를 찾았다. 빡지가 치고 나왔다.
남자 좋아하던 이다해씨 얘기.
돌려낸 화제 치고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는 흠칫 놀랐다. 그러고선 나만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며 다해를 터부시하고 있던 것 같아 좀 민망해졌다. 그런데 혁개의 반응이 생각보다 뜨거웠다.
이다해가 무슨 남자를 좋아해? 우린 지금 걔가 우리한테 개지랄했던 거 얘기하는 중이었구만.
야, 이다해가 메갈의 시초야. 남혐 선구자다.
옆 테이블에서 남자애 하나가 끼어든 말에 테이블 너 댓개가 한꺼번에 웃어댔다. 그거 너네가 못 생겨서 그런 거야, 잘생긴 애는 좋아했어. 빡지가 단호하게 대꾸하며 웃음은 연장됐다. 그리고 모두가 다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걔 중간에 머리도 숏컷으로 잘랐었잖아, 소름 돋는다며 너도나도 첨언을 하고 저마다 다해의 유난스러웠던 일화들을 꺼내놓았다. 남자애들과 손이나 교복 자락이 스치기만 해도 인상을 팍 쓰면서 털어냈다든지, 2학기 중반 넘어가면서부터는 아예 묻는 말에 대꾸도 잘 안 해주더라는. 나는 당황스러웠다. 다해가 그랬었나? 소심하고 조용하고 의견 한 마디 안 펴던 애가? 내가 놓친 끝마디를 다시 잡기 위해 기억을 되짚었지만 눈을 감고 더듬는 것처럼 점점 더 어질러지기만 했다. 다해의 멍청하게 웃는 얼굴이 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왜 기억 안 나지?
너한텐 잘 했나보지. 걔 너랑 되게 친하지 않았냐.
아, 맞네. 혜영이가 걔 많이 챙겼지. 걔 자퇴하는 것도 너한테만 말하고 갔잖아.
나는 그냥 조금 웃고 말았다. 별로 유난히 친했다고 생각은 안 하지만, 어쩌면, 다해가 나를 좀 더 특별하게 여겼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몸뚱이부터 홀연히 교실에서 사라진 뒤 전학 갔다는 소식만 꼬리처럼 남겼던 다해는 내게만 먼저 전학 간다는 사실을 알려왔었다. 이유도 함께. 고등학교 1학년으로서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서글프고 무력했다. 떠난 다해를 유독 궁금해 하고 있는 건 그 날의 다해가 눈에 밟혀서인지도 몰랐다. 혁개의 말이 맞는 걸까. 나와 다해가 좀 유난한 관계였어서 나는 그 애의 잘 웃고 순박한 얼굴만 알고 있는 건가.
되게 이상하다. 나는 다해랑 다 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걔 되게 순해서…
야, 순한 건 진짜 아니다.
1학기 땐 그랬어. 걔 2학기 되면서 이상해진 거야. 그 때부터 반장이랑 현우 잘 되기 시작해서.
빡지는 단호했다. 빡지가 가지고 있는 다해의 상은 내 것과 전혀 달랐지만 나보다 훨씬 선명했다. 논리도 있었고 앞뒤도 좀 더 맞았다. 내가 다해를 아픈 손가락 마냥 무의식적으로 두둔하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1학기와 2학기 때의 파편들을 가져다 비교하기 시작했다. 1학기가 내가 줄곧 생각해왔던 다해라면, 2학기의 다해는 머리를 잘랐고, 좀 더… 우울했다. 확신은 없었다. 다해는 원래도 말이 별로 없었으니까. 멍청하게 웃는 모습이 줄어들었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만약 다해의 어머니가 병을 앓고 계셨고 여름방학 사이에 병세가 악화되었던 거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역시 이 사실을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다해는 그 날 전까진 비슷한 얘기조차 한 적이 없었다.
이런 것들은 다해가 내게만 해줬던 얘기였기 때문에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이라도 선뜻 꺼내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욕망과 질투의 화신으로 열렬히 매도되고 있는 그 애를 변호하는 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대화에 끼어들려던 찰나, 빡지는 또 반박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반장이 김현우랑 사귀고 며칠 있다가 반에서 얘기 했었잖아, 사귄다고. 그 때 이다해가 없었단 말이야. 좀 있다가 걔가 보이길래 나는 그냥 가서 얘기 해줬다? 야, 반장 김현우랑 사귄대. 그랬더니 걔가, 어쩌라고? 그걸 나한테 왜 말 하는 건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이러는 거야. 어, 진짜로. 확실하게 기억나. 지도 현우 좋아하고 있으니까 빡친거지. 내가 그거 보고 확신했다, 진짜.
이건…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우울하고 힘들어도 그렇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면 될 것을 그렇게까지 날을 세운 건 확실히 이상했다. 나는 빡지의 주장에 완전히 동화되어가는 아이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반 남은 잔을 비웠다. 그런 나를 보고 빡지는 웅변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주병을 기울였다. 됐다, 우리한테 정 떨어졌다는 애 얘기는 자꾸 해서 뭐 하냐. 그 뒤로는 아무도 다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 같이 다해 이야기를 하며 웃었는데 이제는 또 관심이 없었다. 연예인들의 하찮은 가십이나 다름없었다. 중요한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실은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우리는 다해를 울타리 너머의 누군가처럼 다루고 있었다. 돈독하기 그지없는 우리 반이… … 아니,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애들은 화가 난 거다. 다해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신 연락하지 말라고 매몰차게 소박을 맞았으니까.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다. 우리는 테이블마다 좀 더 내밀한 이야기를 하며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화학 약품 맛이 나는 소주는 이 나이 껏 한 번도 즐겨본 적이 없지만 순식간에 분위기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이만한 수단도 없었다. 어딘가에 섞이기 위해 술에 의존하는 순간은 갈수록 늘어났다. 술의 존재는 결국, 사교나 관계라는 것들은 그저 정신이 나가있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반증이 아닌가, 술기운이 오르며 뇌의 수면 아래로 감금되기 시작한 이성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밤이 깊어지면서 자리는 더 시끄러워졌지만 한결 느려졌고, 찌개는 졸아들고 물을 붓고 또 졸아들면서 조금씩 정체성을 희석당하고 있었다. 뜨끈한 공기에서 다해가 싹 걷히고 알코올이 녹아들자 나는 점차 마음이 편해졌다. 얼굴에 오르는 열을 식히려고 벽에 등과 뒤통수를 기대고 있다가 저 쪽 테이블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희찬. 늘 깔끔하고, 다정하고, 나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왔던. 둘 다 꽤 오랫동안 눈을 피하지 않았고 희찬이는 조금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사이에 제법 많은 공간과 사람을 둔 채 우리의 시선이 계속 닿아있었다. 희찬이가 입을 뻐끔거렸다. 나, 알…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못 알아들은 티를 내자 희찬이는 웃더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갔다 올래?]
[나 바람 좀 쐬고 올 건데.]
깨끗한 대화창에 처음으로 남겨진 메시지였다.

우리는 도로 옆으로 난 좁은 인도를 따라서 제법 오래 걸었다. 홧홧하던 얼굴에 찬바람을 쐬니 해방감은 강렬했지만 술기운도 확 올라왔다.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희찬이의 뒤를 비틀거리지 않고 일자로 따라 걷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간의 모임들에서 희찬이와 몇 번 대화를 나눴었다. 매번 다른 애들 사이에 섞여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에 그쳤었다는 게, 지금에서야 인정하는 거지만 좀 아쉬웠었다. 희찬이가 갑자기 뒤를 돌아봐서 나는 그대로 얼굴을 갖다 박을 뻔 했다. 발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을 획 들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사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내기 때 갔던 엠티 때 복학생 오빠랑 이런 적이 있었지. 그런 기억을 떠올린 게 좀 민망해졌다. 우리는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물고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바람을 쏘여 군데군데 발개진 서로의 얼굴에 자꾸 눈이 가서 쑥스러운 웃음이 오갔다. 바람은 불었지만 많이 춥지도 않고 선선하니 딱 괜찮은 밤이었다.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아도 제법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끊이지 않게 말을 주고받았다. 빠르진 않고 도란도란하게, 슬쩍 빠져나온 우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공연히 더욱 배짱을 부리듯이. 우리는 반 애들의 학창시절 바보 같았던 행동들을 나누면서 웃었다. 나는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 싸구려 아이스크림, 호감상의 남자애. 이대로 1학년 때 알았던 애들 이름을 다 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까 남자애들이 다해 메갈이라고 그러는 거 들었어? 아 진짜 웃기다, 다시 생각해도.
내 입에서 또 다해가 튀어나왔다. 나는 말을 뱉어놓고 웃었다. 웃겨서 얘기한 게 맞았지만 반쯤은 의도적으로 다해의 이름을 꺼낸 거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술기운을 타고 충동은 더 날뛰었다. 나는 하루 종일 다해의 얘기를 입에 올리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근데 약간 진짜일 수도 있어.
희찬이가 문득 그런 소리를 했다.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뭐래, 걔 그런 애 아니야.
나 2학기 때 걔랑 둘이 교무실 청소 맡았었잖아.
어쩌라고, 난 급식 같이 먹었거든? 내가 더 친했어.
자꾸 잔웃음이 새어나왔다. 지금, 여기에서, 이 애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그 모든 사실이 왠지 모르게 기분을 붕 띄웠다.
그런 게 아니라, 그 때 선생님들한테 들은 게 있었어. 다해는 멀리서 창틀 닦고 나는 바닥 쓸고 있었는데, 나한테 들릴 거라고는 생각 못 하셨나봐.
무슨 얘기였는데?
서서히 웃음이 그쳤다. 내가 몰랐었고 알아야하는 게 또 있다. 주변이 사악 조용해졌다. 딱 알맞게 기분 좋았던 공기는 불현 듯 나에게 적대적이었다. 조금 두려워졌다. 나와 눈을 맞춘 채 망설이고 있는 희찬이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다해 개인적인 얘기여서, 좀 그럴 수도 있는데,
말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말 꺼낸 거 아니야?
날카로운 소리가 나갔다. 아차 싶었지만 이 간헐적인 침묵이 불쾌했다. 희찬이는 마저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애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보고 있자니 머리카락이 팽팽하게 당기는 것 같았다.
다해 부모님이, 아니 그니까 다해 아버지가, 다해 어머니를… 성폭행 하셔서 결혼했던 거래.
성폭행이라는 말을 뱉을 때 희찬이가 느낀 당혹감과 어색함이 그 단어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다른 말이 다 흩어지고 그 단어만 공중에서 미적거렸다. 취기와 단어들이 섞여서 어지러운데 희찬이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해가 생기고 결혼하신 건가봐. 다해가 그런 것 때문에 남자를 싫어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아, 어쩌다 이런 얘기 한 건지 모르겠다. 그냥 너랑 얘기 좀 하려고 나온 건데.
술기운이나 흥 따위가 한 번에 달아났다. 충격이나 슬픔보다는 단지, 너무 불쾌했다. 얘는 어쩌라고 나한테 이런 걸 말하는 거지? 하지만, 일단은 친구의 끔찍한 가정사에 대해서 좀 더 곱씹어야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성폭행해서 태어난 딸. 티비에서나 볼 법한 일이다. 도저히 와 닿지가 않았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건을 들었을 때 으레 보여야 하는 반응에 대해, 이런 일을 겪은 여자애에게 사람들이 보내는 전형적인 우려에 대해 생각했다. 표정관리가 안 됐고 희찬이는 내 눈치를 살폈다.
또 누가 알아?
아무도 모를 거 같아. 다해가 누구한테 얘기할 거였으면 너한테 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가 있었던 술집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희찬이가 급히 따라 일어나 나를 뒤쫓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속도를 더 높였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혜영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술을 마셔서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거야, 라고 희찬이가 생각해주길 바라면서.

나는 몇 발짝 먼저 식당에 돌아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겉옷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아직 그 테이블에 있던 맹지나 혁개의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깐 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찬이도 안으로 들어오자 혁개는 들으란 듯 과장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로 갔다. 희찬이의 어색한 웃음이 들려왔다. 맹지가 속닥거렸다. 너네 뭐 있지. 있긴 뭐가 있어, 더워서 아이스크림 사먹고 왔어. 그 정도가 한계였다. 맹지의 호기심을 유연하게 받아낼 여유가 없었다. 기분이 완전히 잡쳐버려서 집에 가고 싶었지만 자리는 아직도 한창이었다. 이 테이블엔 우리 둘 뿐이라 맹지가 또 그 뱅뱅 도는 이야기를 꺼낸다면 나는 꼼짝없이 듣고 있어야 할 것이다. 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알코올은 남아있지만 술기운은 날아가 버렸으니 다시 마셔야한다. 맹지가 타이밍을 놓칠 새라 부산스럽게 제 잔을 부딪쳐왔다. 한 잔을 마시고나니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더 이상 시선을 안 맞추면 맹지가 심상찮은 공기를 알아챌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들고 그 애의 눈을 찾았다. 순진한 눈, 이 응시가 무슨 의미냐고 묻는 듯한 무해한 미소. 지금은 그저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이렇게 껄끄러운 모임은 처음이었다. 다해는 매번 없었고 지금도 없을 뿐인데. 다시 한 잔을 더 비웠다. 슬슬 속이 액체를 거부하기 위해 목구멍을 꽉 막아 밀어냈다.
왜 이렇게 빨리 마셔어.
나 빨리 취하고 빨리 집에 가게.
장난인 척 웃으며 이를 악 다물었다. 뭐야, 맹지는 웃더니 불쑥 말을 꺼내려고 들었다.
있잖아 혜영아, 오빠가,
다해가 왜 현우랑 안 사귀었지? 지영아.
그 말은 엉망진창이 된 내 속에서 막을 새도 없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 순간 스스로에게 치민 당황과 분노 때문에, 이마를 짚고 시야를 가린 손을 치울 수가 없었다. 나와 맹지 사이의 침묵이 영원같이 길어졌다. 집에 가고 싶다. 평소보다 많이 마셨다. 억지로 내쫓겼던 취기는 토할 것 같은 울렁거림으로 돌아와 분탕을 쳐댔다.
갑자기 왜?
맹지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차가웠다.
다해가 현우 좋아했다며. 근데 현우도 다해한테 분명히 호감 있었거든? 근데 왜 안 사귀었지? 왜 안 사귀고 질투하다가 우리한테 화풀이하고 쌩 까냐고.
혜영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듣고 싶어 물은 게 아니었다. 맹지의 맨날 똑같고 지겨운 패턴을 사납게 잘라버리고 싶었고 그냥 속이 답답해서 무슨 개소리라도 뱉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입 다물어도 돼 지영아.
내가 비밀우체통 담당이었던 거 기억 나?
아, 그 말은 하도 난데없었던 나머지 나는 조금만 덜 화가 나 있었더라면 헛웃음을 터뜨렸을 뻔 했다. 비밀우체통. 전교에서 한 명 뽑아 상담원인 양 붙여 놓고서는, 누구든 고민거리가 있으면 쪽지에 적어 넣으라고 만든 깡통.
거기에 쪽지 하나 있었거든?
맹지가 바로 말을 잇지 않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공기였다.
옆 반 남자애가 자기를 성폭행했대. 체육대회 때 말 걸어주고 축구 경기할 때마다 자기한테 겉옷을 맡기길래 조금 친해졌는데 여름방학 때 노래방에 데려가서 억지로, 그러더래.
머리가 싸하게 식었다. 손끝 발끝에서부터 피가 증발해갔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그저 목에 철이 박힌 듯 맹지만 보고 있었다. 맹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맹지 같지도 않았다.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랬거든. 어른들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말하면 자기 죽어버릴 거래. 근데 내가 말 했어. 주임 선생님한테.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고 너무 무서워서 그 쪽지 갖다 줬어. 그거 다해가 쓴 거였어, 혜영아.
지영이가 귀신들린 무당같이 느껴졌다. 공포스러운 이 입을 멈출 수가 없다. 지영이는 중얼거리듯 계속 읊었다.
현우 축구부였잖아. 아니 그거 말고도 그 쪽지 읽어보면 누가 봐도 다해랑 현우였어. 그 때 주임 선생님이 쪽지 들고 나서서 축구부가 다 뒤집어졌단 말이야. 남자애들 단체 기합도 받고 한 일주일 내내 혼났대. 나는 너무 무서운 거야. 나 때문에 그 난리가 났으니까. 근데 준성오빠랑 다른 축구부 오빠들 몇 명이 찾아와서 나한테, 그거 누가 쓴 거냬. 그래서 내가 모른다고, 익명 쪽지라고 했는데도 계속 짐작 가는 애 없냬. 그래서, 1학년들 점심시간 시작되고 얼마 안 지나서 그게 들어있었으니까 아마 1학년이 쓴 것 같다고. 그 날 수업 끝나고 준성오빠랑 오빠들 몇 명이랑 현우가 다해 찾아와서,
너 그 오빠 좋아해서 알려준 거야?
내가 소리 지르듯이 물었다. 지영이도 절규하듯 소리쳤다.
아니야! 안 좋아했어. 너라면 그렇게 안 하겠어? 오빠들이 찾아와서 둘러싸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말 안 해.
아찔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영이를 경멸할 새도 없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고 내 머릿속에서는 기억의 파편이 서로 부딪쳐 찢어졌다. 나는 내 존재가 침전하는 느낌 속에서 발버둥 쳐야 했다.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뭐가 달라져?
그래도!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민아는 그것도 모르고 김현우랑 사귀었잖아. 빡지는, 은지는 아직도 다해가 김현우 좋아해서 질투 나서 우리 버린 건줄 알아.
반장 알고 있었어. 나 반장한텐 얘기 했었어. 그 일 있고나서 바로.
지영이의 차가운 대꾸가 내 머리를 쳤다. 아주 세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은지는 반장이랑 그렇게 친했는데. 진짜 몰랐을까?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식당은 시끄럽고 우리는 조용했다. 그럼, 빡지는 어디까지 알았지? 다른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은, 나는 어디까지 알았지?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한텐 이제 와서 왜 말 하는데?
니가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하, 나는 비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맹지를 노려봤다. 맹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웃기지 마, 남자한테 휘둘려서 병신같이 대처했던 걸 지금이라도 털어놓고 죄책감을 덜고 싶은 거겠지. 침묵은 깨지지 않았고 깨지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술 한 잔을 더 따라 마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서 반장이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아니 모르겠다. 화가 난 건가? 모르겠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걸었다. 급작스럽게 미친 애처럼. 맹지가 말릴 새도 없이 나는 그리로 걸어갔다.
너 김현우랑 왜 사귀었어?
그 테이블 전체가 조용해졌다. 내가 가까이 오는 걸 보고 뭐라 반기려던 애들은 다 벙벙한 표정이 됐다. 반장이 조용히 날 쳐다봤다.
뭔 소리야, 갑자기? 그냥 어쩌다 만난 거지.
그 비열함이 혐오스러웠다.
너 다 알았잖아.
날카롭게 찢어진 기억의 파편이 뇌를 스쳐 지나고 있었다. 나 현우랑 사귄다. 반 애들이 법석을 떨고, 한참 뒤에 복도에서부터 교실로 돌아오던 다해를 반장이 말없이 보고 있다. 그러다 빡지에게 뭐라고 속닥인다. 눈짓이 오가고, 반장은 끄덕이고, 빡지는 일어나서 다해에게로 간다. 그리고 통보한다. 야, 반장 현우랑 사귄대. 나는 자꾸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검어지는 걸 견뎌야했다. 
너 알았잖아. 다해랑 현우,
야 문혜영, 그건 아니지. 걔가 현우 좋아했다고 반장이 현우랑 사귀면 안 돼?
그 얘기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반장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눈을 빡지에게로 돌리며 고함쳤다. 이제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다해가 우리 모두와 틀어지던 순간. 그 당시 우리 학년의 가장 뜨거운 주제는 한 포르노영상이었다. 시작은 장헌철이라는 남자애였다. 까불고 시비걸기 좋아하던 그 애는 어느 날 교실의 큰 티비에 연결된 컴퓨터로 자신의 유튜브 계정에 접속했는데, 최근 본 동영상으로 적나라한 포르노의 썸네일이 떠있었다. 반 애들은 순간 말을 잃었지만, 이내 와 웃으며 달려들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헌철이를 치우고 기어이 재생을 눌렀고, 그 뒤로는 그 영상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유행을 탔다. 수업시간의 공백에, 쉬는 시간에, 점심시간에, 모든 남자애들이 지겹도록 그 영상의 소리와 장면을 따라해 댔다. 여자애들은 불편했을 거다. 아마 처음엔 그랬을 거다. 하지만 남자애들이 하는 모든 저급한 짓은 이상하게도 조금씩 여자애들에게 전염된다. 심지어 그것이 여자애들 그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 자연스럽고 암묵적인 과정이라서 오히려 꼭 누군가 강요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날도 그랬다. 그 때 우린 여자애들끼리만 교실에 모여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다. 누가 시작했는지도. 그냥 우리는 어느새 이상하리만큼 깔깔대고 웃으면서 그 영상을 흉내 내고 있었다. 우리가 보기 싫어도 봐야했던 남자애들의 모습 그대로. 누가 더 더럽고 괴상한 짓을 할 수 있을지를 겨루는 시합 같았다. 그 기이한 열기를 깨뜨린 게 다해였다.
너네 그만 좀 해 진짜.
뭐가.
보기 안 좋으니까 그만 하라고.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다해의 목소리는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그 애를 이상한 애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야, 장난도 못 치냐?
빡지가 쏘아붙였다. 그 애의 까칠한 성격을 알고 있는 우리는 모두 긴장했다. 아니, 실은 후련해했다.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빡지의 편이었다. 누구도 선뜻 하지 못 하는 말을 늘 가장 거칠게 내뱉던 은지를 우리는 다 좋아했다. 하지만 다해는, 그 애는 그 순간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안일한 평화를 방해하는 다해를 마음속으로 다 같이 노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 동조가 늘 은지를 강하게 만드는 건지도 몰랐다.
왜 예민 떠냐고. 뭐 찔려? 너 따라하는 거 같아서 싫어? 너 남자랑 뭐 했냐?
은지는 오로지 다해를 상처 입히기 위해 숨 쉬고 말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게 갈려있었다. 그 애가 누구와 싸울 때 하는 말들은 진실 따윈 신경 쓰지 않았고, 논리도 없었다. 오로지 상대를 바보로 만들기 위한 것들이었다. 은지는 늘 그랬다. 진실도 없고 논리도 없어도, 그걸 모두가 알고 있더라도, 늘 성공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못되고 막무가내인 말들에 진실마저 섞여있다면, 그건 살인적일 거다.
은지의 표정과 목소리와 승리까지 모든 게 생생했지만 다해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았다. 지우개로 지워낸 듯 깔끔했다.

혜영아, 니가 이다해 엄청 챙겼던 거 알아. 근데 괜히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걔 우리 꼴 보기 싫다고 지 발로 나간 애야. 2학기 내내 걔가 틱틱대는 거 우리 계속 참았어. 니가 지금 과하게 싸고도는 거야. 우리 걔 왕따시킨 적 없어.
그런 말 안 했어.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
야, 야. 그만 해.
이젠 반 전체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 시끄럽던 식당 안에 고요한 긴장감이 꽉 차 있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쟤 왜 저러지?’라는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따가웠다. 아니 뜨거웠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온 몸의 피가 다 얼굴에만 쏠려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바늘로 찔러 터뜨려줬으면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반장이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미안해, 혜영아. 네 앞에서 자꾸 다해 얘기 한 거 우리가 잘못한 것 같아. 니가 다해랑 많이 친했는데,
안 친했어.
나는 내지르고 바로 몸을 돌렸다.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로 쿵 쿵 걸어서 의자에 걸려있던 옷과 가방을 낚아채고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찬 공기에 노출되자 몸이 한 번 휘청였지만 그대로 꾸역꾸역 몇 십 걸음을 걸었다. 입술을 꽉 닫아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아스팔트 바닥이 꾸물거렸다. 안 친했어. 나는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을 정도로 노이즈가 가득 찬 머릿속으로 그 한 줄을 꿋꿋이 밀어 넣었다. 안 친했어.
 나는 그 순간을 기억했다. 내 부름에 대답해주지 않고 걸어가는 다해를 계속 불렀다. 다해야, 다해야. 다해가 드디어 뒤돌아봤다. 그 뽀얗고 매끄럽던 얼굴이 어디에 깎여나간 듯 거칠어져 있었다. 다해야 너 요즘 왜 그래? 내가 추궁했다. 무슨 일 있어? 다해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늘 다해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니까, 더 친해지고 싶었다. 지금 애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유별나게. 하지만 그 애는 나를 제 마음 근처에도 들여놔주지를 않았다. 현우랑 뭐 있어? 물어봤을 때도, 요즘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단 한 번도. 그런 걸 물을 때마다 다해는 마치 내가 귀찮고 곤란하게 하고 있다는 듯이 굴었다. 나는 결코 누구에게도 귀찮고 꺼려지는 존재였던 적이 없었다. 특히 여자애들은 내 손바닥을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 애들이 원하는 답을 다 알았다. 나는 늘 그들보다 조금 더 어른이었고, 모든 아이들은 귀찮을 정도로 비밀과 고민 따위를 고백해왔다. 그래서 나는 다해를 견딜 수가 없었다. 여자애들의 그렇고 그런 우정놀음 따위에는 관심도 없이 멍하게 서있는 걔가 싫었고 또 갖고 싶었다. 다해야 얘기 좀 해봐. 애들이 요즘 너 뭐라고 얘기하는지 알아? 내 줄기찬 괴롭힘에 다해는 마침내 울음기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붉어진 큰 눈에 눈물이 그렁였다. 그 애는 정말로 지쳐있었다. 나 내일 학교 그만 둬. 엄마 돌아가셔서. 아빠랑 같이 다른 동네 가서 살아야 돼. 그래서 그래. 나는 그 애가 싫었다. 기껏 억지로 받아낸 항복도 성에 차지 않았다. 나를 순식간에 어른이 아니라 철부지이자 온실 속의 화초로 만들어버리는 그 애의 거대한 불행이 싫었다. 다른 여자애들처럼 무리에서 떨궈진 것 같다느니, 단짝이랑 싸워서 힘들다느니 하는 소리나 할 것이지.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떠벌댔다.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둬야 돼? 너네 아빠 너무한다, 나였으면 딸 학교는 계속 다니게 해줬겠다. 그건 그 애의 부모를 비난하는 척 그 애를 비난하는 거였다. 너는 왜 멀쩡하게 못 살고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느냐고. 내가 비난을 늘어놓는 동안 다해는 자리에 서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우리 반은 다 같이 성벽을 쌓아 올렸고, 그 가장자리로 한 발 한 발 다해를 밀어낸 것은 반장이었고 맹지였고 빡지였고 다른 애들이었지만 성벽 아래로 걷어차 버린 것은 나였다.
나는 어느새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토할 것 같았다. 구역질을 억눌렀다. 목구멍 바로 밑에서 위산과 알코올과 온갖 오물이 울렁거렸다. 다른 여자애는 몰라도 다해에게 만큼은 그런 일이 있었으면 안 되었다. 다해는 엄마가 돌아가신 뒤 오랫동안 아빠와만 살아야 했을 것이다. 다해의 아빠가 성폭행범이어서는 안 된다. 다해를 강간한 남자애가, 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자애가 좋아하던 바로 그 애여서는 안 된다. 다른 애들처럼 친구관계에 목매고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애의 고통을 짓밟아버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다해는, 다해는… 희뿌옇던 다해의 이미지가 선명해졌다. 다해는 웃지 않았다. 닳고, 지쳤다.
혜영아.
등 뒤에서 꿈 같이 내 이름이 들려왔다. 나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너 진짜 이렇게 갈 거야?
빡지였다. 나는 일렁이는 눈으로 걔를 그냥 보기만 했다. 은지는 정말로 억울해하고 있었다.
우리 걔한테 그렇게 못 되게 안 했어. 우리가 왜 그랬겠어?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가던 길로 마저 걸었다.

-

희찬이에게서는 꾸준히 연락이 왔다. 그 날 새벽 남아있던 아이들도 모두 파했다고 하는 시각에 한 번, 다음 날 아침에 한 번,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나는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않은 채 미리보기로만 그것들을 읽었다. 혜영아 미안해. 그런 얘기 경솔하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너였어도 불쾌했을 것 같아. 혜영아 몸은 좀 괜찮아? 기분 나아지면 다시 연락 줄래? 나는 그것들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빡지한테서도 연락이 왔다. 맹지한테서도. 모두가 나를 걱정한다고 했다. 자기들이 실수한 것 같다고. 네가 그렇게 가고 다들 기분이 안 좋았다고. 다음에 만나서 제대로 풀자고. 나는 추방당하지 않았다. 너보다 훨씬 근거 없이 분위기를 망쳐놓았음에도 애들은 나에게 사과하고 있다. 내 눈치를 보고, 내가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우리는 아무도 추방하지 않았다. 포르노를 보다가 들킨 장헌철도, 그렇게 심한 말을 쏘아붙이던 박은지도, 친구의 비밀 앞에서 멍청하게 대처했던 이지영도, 교묘하게 분위기를 조장해서 친구를 배척하게 만들었던 구민아도. 우리는 보통의 친구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정말로 돈독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반장이었다. 내 목은 푹 잠겨있었지만 이제 받을 때도 된 것 같았다.
혜영아.
응.
혜영아, 나는 니가 진짜 좋아.
뭔 소리야…
처음에는 솔직히 니가 좀 똑똑한 것 같고, 눈치도 빠르고 그래서 좋았는데, 지금은 그냥 좋아.
하려고 했던, 해야 하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말이 턱 막혔다. 목구멍 끝에서 막힌 말은 그대로 탁 돌아 들어가서 뇌를 울렸다.
이런 일로 너랑 멀어지기 싫어.
나는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머리가 좀 아픈 것 같았다. 반장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낮고 힘이 없어서, 꼭 한풀 꺾인 어린애 목소리 같았다.
그 날 했던 얘기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괜찮아. 우리한텐 니가 훨씬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긍정의 뜻이라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이방인과 내부인을 가르는 차이는 뭘까. 나는 너보다 똑똑하고, 촌스럽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말을 적절한 타이밍에 던져주었기 때문에 사랑받았나. 그럼 나는, 왜 네 앞에 얄팍한 도덕자로 서기보다 악마 같은 이 애들 사이로 다시 들어가기를 택했을까. 우리는 왜 그 날 네가 없는 술자리에서 하루 종일 너의 망령을 붙들고 있었을까. 우리는 왜 성벽 밖의 네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걸까. 너를 완전히 몰아낸 지금까지도 왜 우리는 너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걸까.
성벽을 아무리 견고하게 쌓아봤자 밖에 아무도 없다면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 세상에 우리 밖에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게 된다. 우리는 그걸 정말로 두려워했다.

그 자체가 서로에게 재앙이 되는 만남도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우리를 원망하고 우리가 악마 같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방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와의 만남을 지속하는 한 너를 양분삼아 연결되어 왔다는 부채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계속해서 너를 조롱하고 왜곡할 거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영원히 네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편지다.
너의 영원한 이방인으로부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