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하지 않는 당신, 당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닙니다.
투표하지 않는 당신, 당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닙니다.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8.12.27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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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본교 성심교정은 총․부총학생회장은 물론 각 단과대학생회장, 총동아리연합회장 입후보자가 ‘0’명인 충격적인 상황에 빠졌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대학신문 <정치혐오·선거무관심… 출마자 없는 총학 선거(2017.11.26.)>에서 보도할 정도의 극히 이례적인 일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성심교정 총학은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작년 전 단위 후보자가 부재했던 본 선거 관련 공지. (출처_중앙선거관리위원회 페이스북)
작년 전 단위 후보자가 부재했던 본 선거 관련 공지. (출처_중앙선거관리위원회 페이스북)

이번 총학 본 선거에 투표하지 않은 오예송(국사·3) 학생은 “학교에서 하는 활동이 없다 보니 학교에 애정이 없고, 특별한 혜택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투표를 잘 안 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실제 선거 기간, 학생 커뮤니티 SNS상에서 “학교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모임처럼 선거와 투표 모두 ‘그들만의 리그’다. 교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는 학생은 투표하러 가기 꺼려진다”라는 여론이 많았다.

또한 에브리타임에는 “잘 알지 못하는 후보자가 총학생회장을 맡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투표 자체를 하지 않겠다”거나 “반대표를 던져 투표율을 올리는 대신, 투표율을 올리지 않고 개표조차 못하게 하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학생들이 본인의 투표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학생 중 일부는 “나는 투표하지 않기에 무정부주의자다”라며 본인을 ‘아나키스트’라고 칭하기도 했다. 과연 아나키스트가 투표하지 않는 사람과 동일시될 수 있을까.

 

아나키스트란 ‘의사를 표시하는 사람’

아나키스트는 폭력과 차별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견제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선거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투표는 투표용지에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일종의 자기 의사 표현 수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투표를 저버리는 사람은 아나키스트라 할 수 없다.

부산대학교 김성국 명예교수는 국내외에서 아나키즘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란 책에서 “진정한 아나키스트라면 자본주의에 대한 저주의 굿판을 벌이는 대신에 적과 동행하는 길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 학생도 무관심과 아나키즘은 다르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난 17일 “무투표에 대한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글에는 “투표율이 50%가 넘으면 당선이 확실시되는 현재 본교 선거에서 무투표는 몇 년간 논쟁거리가 되어왔다고 생각한다”며 “무관심과 아나키즘은 다른 것이다. 제발 비판의 목소리를 내어달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왜 캠퍼스 정치에 나서지 않을까?

매년 3, 11월이면 대학가는 선거 열기로 뜨겁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성심교정은 선거 열기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성심 학생들은 캠퍼스 정치에 무관심하다. 2015년부터 2018년도까지 선거는 모두 단일 후보로 총 7번 치러졌다. 하지만 2015년과 2018년 본 선거에는 후보자 등록조차 되지 않았다. 후보자가 당선된 건 2016년 보궐선거 한 번뿐이다. 나머지 6번의 선거는 50%의 투표율을 넘기지 못해 총학 구성이 무산됐다. 이러한 수치는 학생들이 교내 선거에 얼마나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지를 대변한다.

2015년 11월 본 선거 45.5%, 2016년 3월 보궐선거 52.8%, 2016년 11월 본 선거 32.3%, 2017년 3월 보궐선거 46.2%, 2017년 11월 본 선거 후보자 부재, 2018년 3월 보궐선거 39.0%, 가장 최근 2018년 본 선거는 45.6%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2015년 11월 본 선거 45.5%, 2016년 3월 보궐선거 52.8%, 2016년 11월 본 선거 32.3%, 2017년 3월 보궐선거 46.2%, 2017년 11월 본 선거 후보자 부재, 2018년 3월 보궐선거 39.0%, 가장 최근 2018년 본 선거는 45.6%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국제신문 <대학생 무관심에 총학선거 투표율 하락(2017.12.04.)>에서 대학교육연구소 임은희 연구원은 “학생들이 취업 준비에 쫓기다 보니 전국적으로 총학 선거 투표율이 저조하다. 심지어 총학생회 후보로 나서는 사람이 없는 대학도 있다”라고 분석했다. 학생들이 취업 준비에 몰입하다 보니 캠퍼스 정치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캠퍼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원인은 취업 준비뿐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이어진 총학 부재가 오히려 학생들에게 익숙해진 경향마저 보인다. 본보와 인터뷰한 익명의 한 학생은 어떠한 체제·제도를 따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총학의 부재가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크게 좌지우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학교라는 체계에서 학생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다”며 “지난 3년간 투표를 하지 않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후보자를 지지할 만큼 총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좀 더 나은 편의를 기대하기보다 무정부 상태가 안정적으로 느껴진다”고 그 학생은 주장했다.

21세기의 아나키스트는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민중과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자유주의적 자치 사회를 모색해야 한다. 이런 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면, 본인 스스로 아나키스트라 칭할 명분은 없다. 더는 아나키스트를 핑계로 선거와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를 지녀선 안 된다. 한국의 대표 아나키스트들을 떠올려보자. 박열, 신채호, 유자명. 그들은 모두 혁명가였다. 

다행히도 이번 선거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보였다. 선거 종료 후 낙선이 확정되자, 일부 학생들은 SNS상에서 ‘괜찮다, 수고했다’며 서로를 독려했다. 아마 학생들은 혁명과 정치를 장대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유영식 감독의 영화 <아나키스트(2000)> 중 “혁명가란 저 강 건너 멀리 아름다운 땅에서, 이 더러운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한줄기 미풍이라 했다”라는 말이 나온다. 캠퍼스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절대 거창하지 않다. 세찬 바람도 초반은 약하게 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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