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이몽] 전(煎)에 대한 전(傳)
[동지이몽] 전(煎)에 대한 전(傳)
  • 윤지수 수습기자
  • 승인 2019.05.12 16:5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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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로 향하던 작년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1호선 열차에서, 갑자기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열차가 고장 났으니 승객들은 전부 하차하라는 무책임한 통보였다. 그렇게 연고도 없는 종로5가역에 내리게 되었다. 투덜거리는 인파 속에서 떠밀리듯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바일 지도를 켰다. 현 위치를 나타내는 파란색 동그라미 옆에는 광장시장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다. 겨울비 내리는 날의 광장시장이라니!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는 없었다. 원망스럽기만 했던 비가 한순간에 입맛을 돋우는 단비가 되었다. 당장 그곳으로 들어갔다.

누가 비 오는 날 아니랄까봐 전집들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혹자는 비가 오면 전이 생각나는 이유가 빗소리와 기름 튀는 소리가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개인적으로는 100m 근방까지 풍기는 전 부치는 냄새가 가장 큰 몫을 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비 냄새 사이로 스며드는 기름 냄새를 맡으면 누구라도 입맛을 다시게 된다. 그 날도 후각의 지배력은 엄청났다. 전을 나눠먹을 누군가가 옆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미식가 코스프레를 하며 혼자서도 곧잘 밥을 사먹는 필자이지만, 전만큼은 그러기가 싫었다. 뼛속 깊이 새겨진 추억에는 전이 함께먹는 음식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명절에는 가족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후 노동의 대가로 나눠먹는 새참이었다. 밖에서 사먹는 전도 어두컴컴한 식당에서 깔깔대며 친구들과 막걸리 잔을 부딪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음식이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노상 탁자에서 가위로 네 것 내 것 잘라서 나누는 대신 젓가락으로 녹두전을 죽죽 찢어먹는 모습이 어찌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전의 맛이란 모름지기 입으로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함께라는 조미료가 전 맛의 일등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집 대신 육회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필자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전집 간판에 적힌 영어 이름이었다. 광장시장이 국제적인 관광 명소가 되어버린지라, ‘Korean pancake’라는 글자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생선이나 고기, 채소 따위를 얇게 썰거나 다져 양념을 한 뒤, 밀가루를 묻혀 기름에 지진 음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이렇게나 긴 사전적 정의를 밀가루 반죽 부침인 팬케이크로 일축해버리다니.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녹두전 반죽 만드는 과정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식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녹두를 불려 껍데기를 일일이 벗겨내야 한다.

맛은 또 어떠한가. 팬케이크는 나이프로 썰어 나누면 어느 조각을 먹든 맛이 똑같다. 그런데 우리네 빈대떡 한 장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다. 뜨거울 때 바삭한 가장자리부터 먹어야 맛있다는 것은 다들 귀신같이 알아서, 전이 나오면 금세 가운데 부분만 쏙 남는다. 타지 않은 가운데는 늘 인기투표에서는 밀려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재료 고유의 맛이 살아있는 부분이다. 파전 같은 밀가루 전은 쫀득하고 녹두전에서는 끈적임 없는 까끌까끌한 맛이 나는 등 각각의 개성이 독보적이다. 프라이팬에 부쳤다고 다 팬케이크면, 전은 너무 서럽다.

언젠가는 전()에 대한 전()을 남기리라 결심했다. 전이 ‘Korean pancake’가 아닌 ‘Jeon’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렸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전은 그냥 pancake이 되기에는 팔색조 매력을 가진 음식이다. 남녀노소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음식이므로, ‘모두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 ‘pan-’으로서의 ‘Pan-Cake’이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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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재 2019-05-21 11:25:06
전달력이 뛰어나시네요 전 달려

맛챠 2019-05-21 10:26:56
멋져요.....!

YennaPPa 2019-05-21 09:57:01
감성 지성 지식 혜안이 모두 돋보이는 필력에 감탄합니다!!

Gastronomy 2019-05-21 09:53:12
역시 타고난 필력입니다! 따봉!

이보나 2019-05-20 22:26:50
와 정말 수습기자님의 아이덴티티와, 평소 음식에 대한 깊은 고찰이 잘 드러나는 기사네요! Pan-cake에서 무릎을 탁 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