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이몽] 전(田)에게 전(全)을 묻다
[동지이몽] 전(田)에게 전(全)을 묻다
  • 오서희 (의학․2) 학생
  • 승인 2019.05.12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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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을 사랑하는 필자에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밭이다. 대전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산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놀랐다. 과연 큰 밭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싶었다. 드넓은 풀밭을 가진 대전은 참 평화로웠다. 원래도 자연을 좋아하지만, 그 때부터 밭과 풀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이후, 친구들과 주말 농장을 했다. 동네 친구 4명이서 밭 두 줄을 분양받아서 상추랑 깻잎, 토마토, 호박을 포함해 이름도 모르는 채소들까지 키웠다. 다들 바쁘고, 농장과 멀었기에 시간이 되는 주말에만 농사일을 했다. 밭을 고르는 것부터 퇴비를 뿌리는 일, 씨앗과 모종을 심고 물을 주며, 잡초를 뽑는 일까지 우리는 세세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우리 손으로 직접 했다. 우리 정성 때문일까? 채소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무더운 여름이 오기 직전, 우린 그걸 네 등분으로 나눠 각자 집에 가져갔고, 몇 주 동안 넉넉하게 먹었다.

매주, 지난주보다 훌쩍 자라있는 것을 보면 신이 났다. 그해 봄에 시작했던 주말농장은 가을이 오기 전에 끝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싱그러운 푸른빛을 잊을 수 없다. 대전을 떠나 서울로 오니 드넓은 잔디와 풀들을 볼 수 없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학교와 아파트 단지 속의 집,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도로를 오가는 생활 속에서 초록빛이 스밀 틈은 없었다.

그러나 잠이 부족해서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등굣길에도 어제보다 조금 더 진해진 가로수 초록 잎을 보면 웃음이 난다. 여유가 있을 때는 나날이 짙어지는 초록 잎을 비교해보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들기도 한다. 불과 이삼일 간격에도 사진 속 초록은 확실히 다르다. 자연의 신비다. 꽃은 금방 폈다가 지는데 풀은 오래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인지 벚꽃 보는 것만큼 설레진 않아도 포근하고 훈훈하다. 단풍 시즌이 올 때까지 푸른빛을 즐길 수 있어, 그 또한 감사하다.

때가 되면 꾸준히 자라나는 풀들을 보면서 매일매일 무슨 이벤트가 있어야만 하는 것 마냥 바쁘게 살아온 나의 지난날들을 반성했다. 이 학교에 오게 되면서부터 인생의 고민이 대폭 축소되었고, 평화(?)가 찾아왔다. 2-3년 정도 지나면 비슷한 고민이 생길지 모르지만 일단은 동기들과 함께 공부만 하면 되는, 나름 평화로운 나날들이다. 그 전의 나는 자주 미래에 대해 고민을 했다. 행복이란 무엇인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따위의 철학적 고찰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을 친구들과 나눴다. 그래서 항상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정신적 바쁨에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 이런 평화는 아직 어색하다.

올해는 풀을 보며 꾸준하게 잠잠하게 지내보기를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벚꽃은 확 폈다가 지니까 일 년 52주 중 50주를 쉰다. 나는 52주를 살아야하니 꽃보다는 풀처럼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본 풀도 어제보다는 한층 더 푸르게 자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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