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진실을 좇는 강력한 추적자
[과학] 진실을 좇는 강력한 추적자
  • 김다영 기자
  • 승인 2019.11.05 19:58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988, 30여 세대가 모여 사는 평화로운 농촌 마을이 발칵 뒤집힌 사건이 일어났다. 홀로 사는 할머니의 집에 누군가 잠입해 칼로 위협하며 성폭행 후 도주한 것이다. 경찰은 마을 지리에 익숙한 면식범의 소행으로 추정해 조사를 벌였지만 범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난항에 빠진 수사의 돌파구는 바로 DNA 분석 기법이었다. 현장에서 발견한 휴지 뭉치와 이불에 흩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으로 분석한 DNA를 인근 비행 청소년들의 DNA와 대조했다. 그 결과 범죄 현장에서 확보했던 DNA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용의자를 발견했다. 그는 고작 16세였다. 태연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용의자를 검거하러 갔을 때 그는 수사요원에게 물었다. “내가 범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머리카락 몇 가닥 혹은 체액 몇 방울로 어떻게 범인을 밝힐 수 있을까? 답은 과학에 있다. DNA 분석 기술은 침묵의 추적자라고 불릴 만큼 정확하게 개인을 구분하는 기술이다. 아주 소량의 혈액이나 체액에도 많은 DNA가 들어있다. DNA 분리 후 중합효소 연쇄반응법(PCR)’이라는 기술로 DNA를 대량으로 증폭한 후 분자의 무게에 따라 분류하는 전기영동을 실시하면 사람마다 고유한 ‘DNA 프로필을 얻을 수 있다.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사이토신(C) 네 가지 염기로 이루어진 DNA에는 짧고 반복적인 염기 서열이 존재한다. TAGTAGTAGTAG처럼 ‘TAG’ 같은 짧은 특정 염기 서열이 여러 번 반복되는 DNA 부분을 짧은 염기 반복(Short Tandem Repeat)’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이 짧은 염기 서열이 반복되는 수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2-5개의 염색체에 위치한 STR10개 정도 종합해 분석하면 사람마다 다른 패턴이 나온다. 일란성 쌍둥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고유한 DNA 패턴을 지니기 때문에 이를 ‘DNA 지문이라고도 부른다. 사건 현장에서 검출한 DNA 지문과 용의자의 DNA 지문 대조를 통해 진범을 색출할 수 있다. 이는 매우 정확하고 정교한 기법이며 현대 과학 수사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DNA 분석기법을 활용한 최초의 수사는 1985년 영국 레스터에서 일어난 여학생 성폭행 살인 사건이었다. 이어서 미국에서도 1987년 발생한 성범죄사건 수사에 DNA 분석기법이 쓰였고 우리나라에서도 1992년에 일어난 어린이 성폭행 사건에 해당 기술이 처음 도입되었다.

영원한 미제 사건은 없다

지난 9, 국내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30여년 만에 드러났다. 마지막 사건의 공소시효가 200642일에 만료됐음에도 경찰은 당시 수사기록과 증거물을 보존해 진실 규명을 위한 수사를 이어왔다. 지난 7월 경찰은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도 재감정해서 DNA가 검출된 사례가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국과수에 5,7,9차 사건에서 나온 증거물에서 검출한 DNA 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현장증거물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는 대상자가 발견됐다. 그는 25년 전 처제 성폭행 살인사건으로 이미 복역 중인 이춘재였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던 1980년대는 DNA 분석 기법을 국내 수사에 도입하기 전이었다. 이 기법에 대한 사전 지식도 부족했던 터라 당시 DNA 증거물을 확보했음에도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고 DNA 검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DNA는 남아 마침내 진실을 가리켰다. 이처럼 현대 과학 기술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는 강력하고 집요한 추적자이다.

양날의 검, 결백을 밝히다

DNA 분석 기법은 범인을 검거하는 경찰 수사에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건 아니다. 무고한 이에게 누명을 씌우는 수사의 치명적인 오류를 바로잡기도 한다. 1992년 뉴욕 예시바대 벤저민 로스쿨에서는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의 누명을 DNA 검사를 통해 벗겨주는 ‘Innocence Project’가 진행되었다. 덕분에 피해자의 지목만으로 성폭행 범으로 몰려 75년을 선고 받았던 듀프레는 30년 복역 끝에 결백을 입증 받았다. DNA 검사 결과, 당시 피해 여성의 몸에서 채취한 가해자의 정자의 DNA가 듀프레의 DNA와 불일치한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DNA 감식법은 범죄 수사뿐만 아니라 신원확인에도 유용하다. 시신이 심하게 훼손되거나 오염됐을 경우에는 거의 유일한 신원확인 수단이 된다. 1983년 소련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할린 상공을 날던 비행기가 폭발해 200여명의 탑승객이 전원 사망했던 사건과 1987년 북한 공작원 테러로 미얀마 상공에서 항공기가 폭발한 사건 등, 신원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시신이 훼손되었을 때에도 DNA 분석은 죽은 이의 정체를 밝혀주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에피소드를 다뤘던 김은희 작가의 드라마 시그널에선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주 작은 혈액이라도 묻어있기만 하면 10, 20, 100년이 지나도 DNA 검출은 가능하다는 거야. 현대 의학이 피해자에게 준 선물이지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범죄는 없다. 혈액, 체액, 체모는 물론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상피세포, 신발 밑창에 묻은 먼지 등의 미세한 흔적 하나가 전부 증거가 된다. 현재 과학 기술은 10억분의 1그램만큼의 미세한 DNA만으로도 그 주인을 찾을 수 있다. 영원히 미궁으로 남을 것 같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드러난 것처럼 완전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처벌 가능한 기간은 만료되어도 피해자와 유족의 참담한 심정엔 공소시효가 없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 않고 흔적을 따라간다면 그 끝이 가리키는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NomNom 2019-11-07 15:05:11
 방대한 양인데 술술 읽히네요!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특히 '피해자와 유족의 참담한 심정엔 공소시효가 없다'는 문장에 생각이 많아지네요...

writer.김은희 2019-11-05 23:22:07
제 드라마를 인상깊게 봐줬다니,,, 감동의 눈물 따흐흐흐흙 따흐흐흐흙 ㅜㅜㅜㅜ
곧 시그널 2도 나오니 모두모두 잘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