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만의 재심, 최말자 할머니의 한풀이
56년 만의 재심, 최말자 할머니의 한풀이
  • 홍연주 수습기자
  • 승인 2020.07.30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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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폭행 대응에 관한 정당방위의 현위치
(출처_부산일보)
(출처_부산일보)

얼마 전 ‘SBS 스페셜에서 최말자 할머니의 특별한 사연을 소개했다. 지금으로부터 56년 전인 196456일 할머니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었을까.

 

56년 전 저녁, 최말자 할머니는 친구의 집 근처에서 한 남성과 마주쳤다. 그 남성은 할머니에게 강제로 키스하려 했고, 저항하던 할머니는 입 속으로 들어온 남성의 혀를 세게 깨물었다. 이로 인해 남성의 혀가 1.5cm 잘렸다. 후에 할머니는 남성을 강간미수죄, 남성은 할머니를 중상해죄로 고소했다.

 

최말자 할머니는 동의 없는 성적 접촉과 폭행으로 당연히 남성에게 강간미수죄가 성립될 거라 생각했고, 중상해죄에 관련해서는 정당방위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계획적으로 상해를 가한 것이 아니냐라는 말로 비아냥거리며 남성의 강간미수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할머니에게 중상해죄로 징역 10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성폭행 과정에서 일어난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최말자 할머니와 같은 사례는 성폭행에 대한 인식이 덜 발전했던 과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도 우리나라는 성폭력에 대응할 방어권을 인정하는 데 소극적이다. 형법 제21조에 규정하고 있는 정당방위란 자기 또는 타인의 급박부당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가한 가해행위를 말한다. 정당방위가 성립하기 위해선 급박부당한 침해가 존재, 권리를 지키기 위한 행위, 부득이한 행위의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여기서 부득이한 행위는 다른 더 나은 수단과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만약 더 나은 수단과 방법이 있는 경우에는 과잉방위가 되어 정당방위가 성립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폭력에 대응할 방어권 인정에 소극적이란 말은 어떤 행위가 부득이한 행위에 포함되지 않아 정당방위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일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여성의전화'2016년의 사례를 제시했다. 같이 술을 먹던 남성이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해 강압적으로 키스하며 성관계를 요구했고, 방어적으로 그 남성의 혀를 깨물어 강간을 피해갈 수 있었던 여성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가 남성이 장애를 입었기 때문에 (과잉방위로) 중상해죄가 성립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듯 성폭력에 대응할 방어권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사법부의 인식과 판단은 56년 전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최말자 할머니는 56년 전 재판을 회상하며 "내가 피해자인데 가해자로 뒤바뀌어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폭력적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피해자를 맞이하는 것은 성폭력에서 벗어난 기쁨과 행복이 아니라 쌍방폭력이나 상해죄. 이는 성폭력 피해자의 수를 늘릴 뿐만 아니라 성폭력 상황에서 피해자의 저항 의지를 빼았고 범죄를 묵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가 최말자 할머니의 재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재심이 받아들여 진다면 성폭행 정당방위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되어 피해자의 방어권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또한 정당방위에 대한 인식의 진보를 불러올 수도 있다. ‘아무리 가해자였어도 그런 대응은 심했어란 말이 틀림으로 받아들여질 한국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쌍방폭행이나 상해죄로 취급될 것이 두려워 숨어있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사회야말로 올바른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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