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휠체어 타는 청년 약사
[인터뷰] 휠체어 타는 청년 약사
  • 이성언 기자
  • 승인 2020.11.16 2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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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일 강현준 약사를 줌 라이브 인터뷰에서 만났다. 철없이 놀기 좋아했던 중학생 소년은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다가 척추를 다치게 되었다. 한순간 잘못된 판단이 그를 평생 휠체어에 앉게 만들었지만, 그는 좌절 속에서 많은 걸 배웠고 성장했다. 이후 소년은 부산대학교 약학과에 진학했고 어엿한 약사가 되어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 복약지도를 하고 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그가 겪었던 삶을 들여다보았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33살 김해에 거주하고 있는 강현준 약사입니다.

 

언제부터 다리가 불편해지신 건가요?

철없던 중학교 시절, 친구 뒤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휠체어를 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김해에 있지만 원래 서울에서 살고 있었어요. 아마 홍대 동교동 근처로 기억하는데요. 친구는 앞에 타고 저는 뒤에 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그때부터 휠체어를 타게 되었습니다.

 

사고가 난 뒤는 어떻게 됐나요?

처음에 병원으로 실려 가고 응급조치를 하고 나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대요. 그때 사실 제가 뚱뚱했었거든요. 누워있으면 배가 좀 들어갈텐데, 갑자기 제 배가 부풀어 오르더래요. 어머니가 ? 쟤 배가 좀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 검사해보니까 장 파열이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어 긴급 수술을 받았어요. 그리고 한 3달 동안 의식이 없었어요. 사실 병원에서의 기억은 잘 안나요.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서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부터 기억이 나요.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는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아요.

 

서울대 병원으로 옮기고 난 이후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서울대 병원으로 옮기고도 큰 수술을 몇 차례 받았고요. 그런 다음 재활 치료를 받았죠. 그때 제가 너무 어린 나이였어요. 16살이었으니까요. 저는 수술이 끝난 뒤, 물리치료와 재활운동을 병행하면 빨리 걸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열심히 재활 운동을 했었어요. 그런데 서울대 병원은 일주일에 한 번씩 환자 평가를 해요. 어느 평가 날에 처음으로 어머니랑 주치의 선생님하고 나누는 얘기를 들었어요. 주치의 선생님이 현준이 어머님, 현준이한테 말했나요?”라고 물으니까 어머니는 절대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나중에 얘기할게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주치의 선생님은 빨리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현준이가 더 상처를 받지 않겠냐면서 어머니께 주의를 주고 있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얼핏 듣고 있다가 저녁에 어머니한테 무슨 이야기냐고 물었어요. 그때 저는 재활 치료를 열심히 해서 빨리 학교에 가고 싶었던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저한테 네가 어쩌면 앞으로 못 걸을 수도 있다, 평생 못 걸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너무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냉혹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 거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안 좋은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안 좋은 생각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저는 일상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운동했어요. 그런데 , 내가 다시 걸을 수 없구나,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구나그런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어요. ‘자살하고 싶고, 내가 열심히 재활 치료해서 뭐하냐,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는 건데이런 생각을 제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후 어떻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나요?

첫 번째로 힘이 되었던 건 부모님의 응원이에요. 저는 당시에 오는 차에 뛰어들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부모님은 나보다 더 가슴이 아팠을텐데 내가 죽으면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또 친구들의 응원도 큰 힘이 됐어요. 병문안을 온 친구들은 제가 못 걸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더 많이 응원하고 찾아왔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나중에 친구들이 저한테 말해줬던 이야기예요. “눈이 불편하면 안경 끼듯이 휠체어 타는 게 뭐 어때서친구들은 늘 그렇게 장애가 아니라고 돌려가면서 많이 이야기해 주었던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의 응원 덕분에 안 좋은 생각들을 잊고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병원에만 있느라 공부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저는 중학교 때 놀기 좋아해서 공부를 잘하지 못했어요. 고등학교 1, 2학년 때도 비슷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어머니의 충고를 듣고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어머니가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사회에 나가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네가 다치지 않았었더라면 어떤 일이라도 해서 밥은 먹고 다닐 텐데,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사회에 나가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라면서 직설적으로 얘기해주셨어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다리가 불편한 상태에서 나한테 맞는 직업은 어떤 것이고,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어떠한 직업을 갖고 쭉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봤어요. 그래서 저는 약사라는 직업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약사가 되기 위해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게 맞잖아요. 그래서 그 이후로 이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죠.

 

대학교 생활은 어떠하셨나요?

입학하고 나서 1, 2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지 못했어요. 대학교 입학을 하고 나서 얼마 뒤에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거든요. 집안의 기둥이 무너진 거죠. 결국 저는 두 번째 패닉상태에 빠지게 되었어요. 보통은 3월에 개강하고 나서 공부를 하잖아요. 그런데 개강하기 한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심적으로 힘들어서 밤에 잠도 잘 안 오고 삐뚤어지기도 했어요. ‘내가 뭐 지금 대학교에 다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또 경제적인 면에서 많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누군가는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선 배부른 소리 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아주 힘들고, 공부는 안 하고 친구들이랑 놀려만 다녔어요. 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불면증이 생겨서 한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제가 음주를 못 하는데, 잠을 자려고 음주도 했었어요.

 

또 어떻게 마음을 다시 잡으셨나요?

아마 아버지 기일로 기억해요. 어머니는 엄청나게 강하신 분이었는데, 아버지 기일에 처음으로 어머니가 우시는 것을 봤어요. 처음으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니까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약사로서의 길을 위해서 달려왔었는데 그 꿈도 흐트러졌구나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부산대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가 무척 기뻐하셨거든요. 아버지가 주변에 자랑도 많이 하셨대요. 제가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나 편안해지자고, 내 기분이 안 좋고, 재정이 안 좋았다고 삐뚤어졌어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깨달은 거죠. ‘이러면 안 되겠다. 정말 이러면 안 되겠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꼭 결실을 봐야 하겠다. 최선을 다해야겠다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약사 고시 시험은 어떻게 치루셨나요?

사실 저는 똑똑한 편이 아니에요. 하필 약사 고시가 얼마 안 남았을 때 연애를 하기도 했고, 스스로 자만해서 첫 약사 고시에서는 떨어졌어요. ‘이만큼 하면 되겠지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었죠. 약사 고시에서 떨어지고 정확히 3일 뒤에 여자친구한테서 이별 통보를 받았어요. 이별 통보를 받고 헤어진 여자친구는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약사 고시는 다시 이 악물고 열심히 한다면 꼭 합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약사 고시는 제 평생의 앞길을 결정하는 시험이잖아요. 또 약사는 어린 시절의 꿈이었고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생각이 들더라고요. 꼭 붙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1년 동안 집에서 안 나갔어요.

 

약사 고시에 합격하시고 나서 어떠셨나요?

약사 고시 합격 발표 날에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모였어요. 제가 만약 떨어지면 위로주를, 합격하면 축하주를 사주려고요. 덜컥 합격하고 나니까 울컥했어요. 제가 약사 고시에 한번 떨어졌던 충격도 있지만, 당시 이별 통보도 받았잖아요. 합격하고 나니까 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오히려 제가 친구들한테 술을 사줬어요. (웃음)

 

처음에 친구들이 공부 좀 더하지 왜 그랬냐면서 장난쳤어요. 주변 친구들은 모두 먼저 합격하고 저만 1년 더 공부했으니까요. 같이 공부해서 함께 합격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저는 1년이란 시간을 뒤늦게 붙었던 거죠. 그래도 합격하니까 정말 좋았어요.

 

약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서, 취업하기까지 또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약사가 되면 약국이나 병원 등 여러 방면에서 취업이 무조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저는 병원이나 제약회사 같은 곳에서 업무를 보는 것보다 손님을 직접 상대하면서 내가 배웠던 것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약국에 취업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작 약국에 취업하려고 하니까 장애가 제 발목을 잡았어요. 여러 군데 면접을 봤었는데, 다 떨어지고 맨 마지막에 본 곳에 취업할 수 있었어요. 제가 휠체어를 탔지만, 약국 국장님이 제 능력을 알아봐 주셨고, 그 국장님 밑에서 일하게 됐어요.

 

혹시 약국에서 일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나요?

약사로서 처음 일하게 되면서 정말 뜻깊었던 게 있었어요. 저는 휠체어를 타면서 손님들에게 복약지도도 하잖아요. 처음 일할 때 깨달았던 게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장애가 또 한편으로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어떤 손님이 직접 저에게 했던 말이 있어요. 제가 휠체어를 타고 약을 추천하면서 복약지도를 해드렸는데, 손님이 약사님이 설명해주는 게 거짓말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왜 그렇냐고 물으니까 이렇게 휠체어 타고 이랬던 분이 거짓말하겠어요?”라고 대답하셨어요. 그때, 나의 장애가 손님들께 신뢰감을 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 점에서 보람을 많이 느꼈던 거 같아요.

 

또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제가 어떤 손님께 상담이랑 약을 추천해드렸는데 다음에 그분이 효능을 보시고 다시 약국으로 찾아주셨을 때 보람을 느껴요. “효과가 좋았다라고 말씀을 해주시면 뿌듯해요. 또 효과를 보신 분이 친구분들을 데리고 오셨던 적도 많아요.

 

그리고 또 인상 깊었던 일이 있는데요. 제가 예전에 <무엇이든 물어보살>이란 TV 프로그램에 나갔었던 적이 있었어요. TV 출연하고 나서 어떤 손님이 약국을 방문해주셨는데 약 상담 말고 오히려 저의 생활이나 저랑 여자친구 사이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더라고요. 그때가 무척 바빴었는데 모든 손님이 다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궁금한 걸 물어보시더라고요. 40~50분 기다리셨어요. 20분 동안 궁금한 것에 관해서 설명해드렸었죠. 재밌는 건 그 손님도 우리 약국 단골이 되셨어요.

 

<무엇이든 물어보살>은 어떻게 출연하시게 되었나요?

목요일에 할 게 없어서 <무엇이든 물어보살>을 보고 있었어요. 그러다 사연 신청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메일을 보냈어요. 그리고 다음 날 바로 회신이 왔어요. 제작진 측에서 핸드폰 번호를 달라고 해서 번호를 알려줬는데 30분 뒤에 바로 전화가 오더라고요. 작가분께서 사연을 꼭 담고 싶은데 한번 출연해 줄 수 없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런데 촬영 날짜가 일주일 뒤였어요. 그래서 갑작스럽게 일주일 뒤에 촬영했죠.

 

(출처_KBS ‘무엇이든 불어보살’ 방송화면 캡쳐)
(출처_KBS ‘무엇이든 불어보살’ 방송화면 캡쳐)

TV 출연하시고 많은 분이 약국에 오셨을 거 같아요.

TV에 나오고 나서 어느 순간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셨어요. 조그마한 약을 사러 오시더라도 가까운 약국이 아닌 우리 약국까지 멀리 찾아와서 상담받는 분들이 많았어요.

 

본교에도 약학대가 있습니다. 가톨릭대 약대생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약사 고시를 준비하는 약대 학생분들이 많이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다들 잘 준비해서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다들 기운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화이팅하세요. (웃음)

 

마지막으로 기사를 볼 가톨릭대학교 학생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많은 학생이 학업 문제, 취업 문제 혹은 경제적 문제로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열심히 하면 언젠가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운 내시고 화이팅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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