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되감기] ‘자산어보’, 흑백에서 총천연색으로
[필름되감기] ‘자산어보’, 흑백에서 총천연색으로
  • 김형렬 기자
  • 승인 2021.04.15 1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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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영화 자산어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영화 관람 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흑백화면 속 세상의 끝 흑산도는 칠흑 같은 어둠 아래 있었다. 이곳으로 유배된 정약전은 애써 밝게 웃어보지만, 그의 눈가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 당시 흑산도는 최악의 유배지로 불렸다. 육지와 멀고 길이 험하며, 섬은 작고 투박했기 때문이다. 슬픔도 잠시, 그 앞에 창대라는 청년이 나타났다. 창대는 바다를 훤히 꿰뚫고 있는 어부였다. 정약전은 천한 신분이지만 유달리 총명했던 창대에게 다가가 바다 생물에 관한 글을 쓰자고 부탁했다. 이에 창대는 자신에게 글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들의 거래가, 그리고 사제지간의 연이 시작됐다.

출처 - 네이버영화
출처 - 네이버영화

 

바다 생물 도감 집필은 순탄하게 진행됐다. 십수 년간 작성한 초고는 수북이 쌓여갔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사대부였던 정약전은 체통을 던지고 흑산도의 삶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창대는 달랐다. 여태껏 갈고닦은 학문으로 출세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살았다. 결국, 창대는 사제의 연을 끊고 세상의 끝에서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갔다.

 

과거에 합격한 창대는 본격적으로 양반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부패한 관리와 대립이 지속됐다. 그는 부패한 당시 사회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제 갓 양반이 된 자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벼슬을 포기하고 자산으로 내려온 창대는 그의 옛 스승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남은 것은 자산어보한 권뿐이었다. 그는 조용히 스승의 말을 읊조렸다. “천민도 양반도, 그리고 왕도 없는 공평한 세상에서 사람을 위한 공부를 하고 싶다.”

 

흑백영화와 한 줄기 빛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영화는 흑산도의 풍경을 흑백이 아닌 본래의 색으로 다시 한번 훑는다. 그 세계는 사서삼경에 몰두하던 정약전과 창대가 바라본 칠흑 같은 흑산도와는 달랐다. 그들이 10년 동안 집필한,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자산어보가 흑산도를 밝게 비춘 것이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흑백화면 속에서 살고 있다. 공정과 정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됐다. 정치인은 다채로운 정책과 토론이 아닌 흑색선전을 펼치고 있다. 공무원은 편법을 통해 부정 투기를 저질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속해서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우리는 서로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이념, 연령, 성별 등 무수한 이유로 갈라져 상대방을 혐오하고 있다.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삶, 빛이 보이지 않는 삶에 지친 우리는 좌절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 빛을 비춰줄 자산어보는 어디에 존재할까. 흑백영화에서 빛을 찾은 흑산도처럼 하루바삐 대한민국이 총천연색으로 칠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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