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 -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 쫓겨난 주인의 셋방살이
<조명 -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 쫓겨난 주인의 셋방살이
  • 허좋은 기자
  • 승인 2011.11.23 16:45
  • 호수 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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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_팔레스타인평화연대
▲ 한 유대인이 지난달 22일(현지시각) 미국로비단체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 연례회의가 열린 워싱턴 컨벤션센터 앞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_연합뉴스

 
“1967년 중동전쟁 이전 국경을 협상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오랜 분쟁지역인 팔레스타인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달 19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국무부 연설에서 중동 평화를 위한 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했다. 분쟁 해결을 위해 오랜 우방인 이스라엘의 양보까지 요구했다. 이스라엘에겐 민감한‘1967년 국경선’을 기준으로 한 국경 협상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국경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을 기초로 그어졌다. 미국의 새 중동정책으로 세계의 화약고 팔레스타인에 비극이 끝
나고 평화가 찾아올지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인종청소 통해 건국한 이스라엘
 분쟁의 비극은 일찍부터 뿌리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랍 국가들의 독립 열망은 영국의 지배를 받던 팔레스타인(당시 이 지명은 현재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을 포함한다고 봐도 무방하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팔레스타인에는 이주 유대인과 다수인 무슬림과 소수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팔레스타인 원주민이 각기 존재했다. 아랍인의 눈에 유대인들은 지배자와 결탁해 각종 이권을 챙기는 굴러온 돌이었다. ‘약속의 땅’에 자신만의 배타적국가를 원하는 시오니즘과 원주민의 양립은 절대 불가능했다.(알레테이아 참조)

 유대인 이주는 영국이 시오니즘 국가를 지지한 1917년‘벨푸어 선언’직후 급격히 늘어났다. 1878년 당시 유대인 인구는 팔레스타인 전체의 3%에 불과해 기독교 원주민 비율(9%)보다 적었다. 벨푸어 선언 직후인 1918년 8%로 증가하더니 1931년 17%, 8년 뒤 전체 인구의 30%에 달하는 44만 5천여 명으로 급증했다. 영국 지배 시기, 유럽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은 주로 자본가들이었다. 이들은 영국 식민 당국과 협력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산업 선도로 높은 경제수준을 누렸다. 또한 정착촌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민병대를 창설했다. 민병대는 영국과 협력해 원주민의 반식민지 투쟁을 진압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전후 유대인들은 본격적인 국가 건설을 위해 인종 청소를 실시한다. 정예 훈련과 전투 경험을 가진 12만 명에 이른 민병대는 곳곳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오랜 식민 통치로 인해 원주민들에게는 이에 대항할 군사조직이 전무했다. 데이르 야신이라는 마을에서는 4백여 명 가까운 주민 중 2/3가 학살당했다. 인종 청소를 피해 원주민들은 도망쳐야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약100만 가량의 팔레스타인 원주민 중 90%가 난민으로 전락한 재앙(나크바, Nakba)이었다.

 국제정치적으로도 원주민은 고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에서 패권을 잃은 영국은 1947년 팔레스타인 통치 종언과 함께 유엔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떠넘겼다. 1947년 유엔총회를 통해 유대인과 아랍인이 각기 분할 독립하는 안이 상정됐다. 유엔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56.47%를 유대국가 몫으로, 42.88%는 아랍 국가 몫으로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지구로 분할하는 안(유엔 총회 결의 181호)을 상정했다. 이는 당시 팔레스타인 원주민이 87.5%의 토지를 가진 반면 유대인이 6.6%만의 토지를 소유한 관계를 무시한 결정이었다. 유엔 총회 표결에서 33대13으로 분할 안은 통과되었고 아랍인들은 반발했다. 유대인들은 영국이 물러나기 전날인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 신흥 패권국인 미
국은 다음날 신생국을 승인한다.

중동을 지키는 경비견
 이스라엘 건국은 유엔의 분할안조차 지키지 못한 팔레스타인의 비극이 된다. 영국이 물러난 5월 15일 이집트, 트랜스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로 이루어진 아랍 연합군이 신생국을 공격했다. 명분은 분할안에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보호였다. 독립 이전부터 강력한 군대를 소유했던 이스라엘군에게 아랍 연합군은 적수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분할안에서 아랍 국가의 몫으로 정해진 영토와 인접한 트랜스 요르단과 이집트는 영토 확장의 야욕만 드러냈다. 결국 이스라엘은 분할안보다 더 큰 영토를 확보(78%)하고 트랜스 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병합하며 전쟁을끝냈다. 전쟁 중 전체의 50%가 넘는 약 531개 아랍인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었다. 전쟁은 팔레스타인 원주민이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인근 아랍 국가에 친서방 정권이 무너지고 아랍 민족주의정권이 이를 대신했다. 미소 냉전이 격화되던 시기 이스라엘은 이를 이용해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얻었다. 1960년대 이스라엘은 인근 아랍국의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월등한 군사력를 갖게 됐다. 오바마 대통령이 언급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은 인근 아랍 국가들의 아랍 민족주의와 시오니즘 이스라엘의 충돌로 비롯되었다. 6일 전쟁으로도 불리는 이 전쟁에서는 전쟁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시오니즘이 압승했다.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이스라엘은 개전직후 이집트 공군을 초토화시켰고 다음날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공군을 궤멸해 제공권을 장악했다. 이스라엘군은 자국 영토의 3배에 이르는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를 비롯해 요르단강 서안과 골란고원을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로부터 빼앗았다.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까지 원주민이 발붙일 땅이 없어진 것이다.

 6월 전쟁으로 미국의 대 중동 외교도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전쟁 전까지 미국은 중동의 석유자원때문에 아랍 국가들의 눈치를 보았다. 게다가 1950년대 발현한 아랍 민족주의는 미국에게 골칫거리였다. 미국은 중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과대평가 했고 중동 국가들을 통제할 경비견이 필요했다. 1969년 후일 미국의대통령이 된 제럴드 포드는“나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미국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고 확신한다”고 선언했다.

독립국가 수립 탄력 받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은 계속되고 있다. 이집트와 평화협정으로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협상으로 가자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허용했다. 이는 제한적 자치일 뿐이다. 사실상 이스라엘 국가의 식민지가 되었을 뿐이다. 이스라엘로서 6일 전쟁 이후의 국경선 논의는 꺼려지는 이유다. 현재 점령 중인 요르단강 서안, 가자, 골란고원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오바마의 새 중동 정책발표 직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1967년 국경선’에 반대를 표했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한발 물러난 상태다. 국제 사회의 한편에서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끌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때마침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올해 9월 개최되는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을 추진 중이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평화를 위해 가자와 서안을 팔레스타인에 내주고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 팔레스타인에게는 고무적이다.

 

[참고문헌]
􀓋Phil Marshal『l,인티파다』, 이정구역, 2001
􀓋홍미정「, 팔레스타인 난민문제」, 2010
􀓋고부응「, 에드워드사이드의 팔레스타인 문제 해법: 이민족일국가론」, 2009
􀓋안영민「, 자기 땅에서 추방당한 자들 - 이스라엘의 건국과 식민주의 비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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