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발로, 가슴으로
현장에서, 발로, 가슴으로
  • 이가현 기자
  • 승인 2012.11.16 01:19
  • 호수 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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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눈길을 사로잡는 페이스북 글이 하나 있었다. 총학에서 주최한 따듯한 배려 캠페인에 참가했던 한 학우의 글이었다. ‘평소 학교에서 청소하시는 어머님의 노고를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을 경험해보니 짐작했던 것이 죄송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고된 일이었다’는 내용의 그 글은 “‘좋은 취지를 공감하는 것’과 ‘거기에 참여하는 것’에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음을 느낍니다”라고 나에게 일갈했다. 법의 허점을 이용해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과 이들 때문에 법에 명시된 기본권조차 제대로 존중되지 않는 사회를 고발하고 싶어서 법학부에 들어왔다. 이를 기사로 풀어낼 때의 윤리의식을 쌓고 싶어서 학보사에 들어왔다. 지금의 나는 이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혹 ‘나는 약자의 삶을 이해하고 있으니 남들보다 양심적이다’라는 자기합리화에 휩싸여 정작 그들과 함께하는 행동은 마음 한 구석에 처 박아두고 있진 않은가? 나는 지금 ‘참여’하고 있는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 취지에 동의했지만 참가하지는 않았다. 언론파업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지만 같이 행동하진 않았다. 원전증설 반대시위는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거리로 나서진 않았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이해한다는 것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같은 감정을 느끼려면 그들과 같은 경험을 겪어봐야한다. 그동안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아는 것만으로 그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기레기’라는 단어가 있다. ‘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단어이다. 이 단어에는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현실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울분이 가득 차있다. 기자가 세상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눈을 갖는 대신 권력에 굽실대고 책상 앞에만 앉아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한 풍자가 담겨있다. 비판 의식 없이 단순히 받아쓰기만을 하는 기레기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 나는, 행동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 권력기관에서 건네받은 자료를 손으로 뽑아내는 기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발로 뛰며 가슴으로 쓰는 기자가 되고 싶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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