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성지순례기
나가사키 성지순례기
  • 김경옥 마리아 보건실 차장
  • 승인 2013.03.07 17:52
  • 호수 2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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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목실 주관으로 교직원 성서통독모임 교직원 15명과 함께 지난 1월 30일(수) ~ 2월 3일(일)까지 4박 5일의 일정으로 일본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일어날까 더 잘까 망설이다 5분씩 늦기 일쑤였던 화요일 아침 8시, 2년간의 성경읽기와 시편기도의 은총으로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하였다.

나가사키는 일본의 네 개의 큰 섬 중 하나이며 서남단에 자리한 규슈에 위치하고, 일본 전체 43만명의 가톨릭신자 중 도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6만 명의 신자가 현재 거주하고 있다.

올해로부터 464년 전인 1549년 예수회 신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가톨릭신앙이 일본에 전파되어 65년 후엔 35만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에 의해 전국적으로 '기리시탄 금교령'이 내려져 1858년 신앙 활동이 인정되기까지 수만 명의 신자가 순교하였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가 신앙을 가진 '하치칸 호안'이란 조선인은 1612년에도(현 도쿄)에서 순교한 최초의 우리나라 선조다.

살아남은 신자는 배교하거나 깊은 산이나 외딴 섬으로 피신하여 나름대로 신앙을 이어온 '가쿠레 기리시탄(잠복 그리스토인)'이 되어 겉으론 불교신자이나 관음상을 마리아상으로 모시고 신앙을 이어와서 관음마리아상이나 묵주 등 그들의 유물이 많다.

 

첫째 날

성경통독을 같이 하신 교목신부, 교목수녀, 주요보직 신부과 팀장 7명, 직원 5명 합 열다섯 사람은 25인승 버스에 몸을 싣고 규슈섬의 중심지인 후쿠오카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나가사키로 이동하였다.

1월말 동백꽃이 가는 길마다 붉고, 지진 시 피하면 안전하다는 죽나무가 푸르고 무성한데 영하가 아닌 날씨에 양지는 따뜻하나 음지와 바람이 싸늘하여 겨울 차림이 필요했다.

지진 덕에 옛 모습 그대로를 지닌 기와집, 나지막한 집들과 들판의 동네 모습은 어린 시절의 모습을 잃은 우리와 비교되면서 부러웠다.

정갈하고 수선화가 피어있는 골목길을 따라 나가사키현의 130여개의 성당 중 최초로 세워진 시츠성당(1882년)과 도로 신부님 기념관을 보았다.

프랑스 명문가 출신임을 보여주는 보석 박힌 제의, 비신자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주민의 삶을 돕고자 했던 의료기와 농기구들, 우물가의 작은 성모상을 보니 언덕 위의 하얗고 소박한 성당에서 신부님께서 걸어 나오실 듯하다.

5일간 순례한 성당들이 1800년대 말이나 그 이후 세워진 서양풍의 건물인데 격조 있고 아름다우며 차분하고 대부분 아담하다.

성당 마당에 성모상이 있고 모든 성당이 제대 옆에 성모상을 모시며 다른 면에 예수상 또는 성요셉상을 모심으로 성모 신심이 깊음을 볼 수 있다.

성모의 순수한 마음을 기리는 순심대학교는 숲길을 굽이굽이 올라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 있는 조용하고 넓은 교육의 터전으로 총장수녀님, 교직원, 학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순례의 첫 미사를 드렸다.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과 자매를 맺어 지난해 본교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2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이 우리말 인사를 길게 써서 읽음으로 국제교류의 열매와 금방 구운 애플파이의 상큼한 맛을 보았다.

 

둘째 날

교토에서 한쪽 귀가 잘린 채 800km 길을 걸어 나가사키 니시자카언덕에서 1597년 2월 5일 십자가에 매달려 창에 찔려 순교하신 '26위 성인순교비'는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려 물과 피를 흘리신 주님의 모습이었다.

성바오로 미키신부의 유언 -교리를 가르쳐 죽게 됨을 감사하고 박해자를 용서하고 자비를 청하며 신부님이 흘린 피가 동포에게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길 바라심- 대로 일본인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고 따름으로 이웃나라와 평화를 이루길 빈다.

26성인 중 한분 멕시코인 수사를 현양하기 위해 멕시코로부터 기부를 받아 교또에서부터 걸어오신 길의 모든 도자기 가마에서 가져온 도자기로 장식한 두 개의 큰 기둥을 가진 필립보성당은 그 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멕시코인들의 신앙을 각인시킬 것이다.

성당 뒤 벽면에 세운 십자가 앞 화병에 꽂힌 털실로 짠 카네이션을 보며 그 꽃들을 만든 분의 정성이 간절하게 느껴진다.

오오라성당의 산타마리아상은 성당 중앙입구에 서서 계단을 올라오는 우리 죄인을 굽어보시며 두 손 모아 빌고 있다.

오오라성당은 크고 라전신학교가 옆에 있으며 고운 관음마리아상이 전시되어 있다.

우라카미성당에서 고해성사를 위해 모인 두 분의 신부님, 수십 명의 신자들과 순심대학교의 이백 사십 명의 학생과 수많은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산화시킨 1945년 8월 9일 목요일 11시 2분 지상 500m 상공에서 폭발한 원자폭탄은 다시는 핵폭탄을 쓰지 말아야하는 참상을 보여 주고 있다.

자신의 뜻한 바를 위해 다른 이를 헤아리지 않는 우리 자신의 핵폭탄도 어디선가 터지고 있어 서로를 초토화시키지 않나 우려된다.

평화공원의 푸른 평화인은 긴 머리를 한 역도산 선수가 모델이라는데 듬직하고 멋있어서 비둘기들처럼 그의 무릎에 앉고 싶다.

핵으로 숨진 무명조선인 추모비엔 알록달록한 천 마리 종이학 여러 줄이 늘어져 있고 물과 음료캔이 귿르의 혼을 위로한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신부님은 23세에 신학원장의 허락 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 모임을 결성하셨으며 1930년 나가사키 근처에서 '원죄 없으신 성모의 뜰'이라는 작은 수도마을을 세우고 6년간 머무셨는데 사용하시던 책상과 의자가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폴란드 성모마을에서 가난한 이들과 유대인들을 보호하시다 잡히셔서 1941년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47세에 아사형으로 돌아가셨다. 신부님께서 앉으셨던 의자에 앉아보고 신부님께서 오르셨을 루르드동산에 가서 샘물을 마시면서 신부님의 사랑과 용기로 마음을 적셨다.

 

셋째 날

비가 많이 내리지만 수녀님과 호텔에 비치된 노란 우산을 쓰고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곳을 찾아 아침산책을 하였다.

 유황으로 하얗게 도배되고 보글보글 물이 끓는 길 옆 작은 웅덩이, 김의 근원지에서 들리는 커다란 물 끓는 소리, 온 산을 덮으며 뭉게뭉게 피어나는 김이 아름답고 장관이다.

운젠(雲仙)성당에서 우리 그룹만 드린 미사에서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를 하였다.

'460년의 역사, 잔혹한 순교와 한 현에 130개의 성당을 세운 선조들의 신앙심을 이어받았을 일본인들이 참 주인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지난 잘못을 내 탓으로 여기며 남의 땅을 욕심내지 않고 믿음으로 생명의 길을 걸어 자국과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새로 터진 온천을 보고 많은 파이프가 놓여진 온천이 솟는 산을 돌으니 아침산책하면서 갔던 근원지에 도착하였습니다.

1630년 전후 5년간 신자가 반드시 거쳐야했던 지코쿠 세메(지옥형벌)는 발가벗겨 상처를 내고 뜨고운 바위에 눕힌 뒤 열탕물을 붓거나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밧줄에 매달아 열탕에 넣었다 건졌다를 반복하며 배교를 강요 받았던 형벌인데 순교자 중 32분이 시복되었고 화산 중심에 순교자현양비가 있습니다.

시마바라성 역시 성과 외부 사이에 물이 있어 5월이면 연꽃이 만발한단다. 비가 와서 전통축제가 성의 1층에서 열리고 2층 박물관에는 잠복그리스도인의 유물들, 3층의 전시관을 지나 4층 망루에 오르면 온 시가지가 사방 트여있다.

성을 지키는 무사마을 골목길 가운데를 흐르는 지하수는 맑고 양이 많아 아낙네들의 빨래터였고, 다른 동네에선 하수도 같은 구조이나 맑은 지하수가 흘러 잉어를 놓아기르며, 군함같이 큰 잉어들이 유유자적하는 연못으로 둘러싸인 집마루 끝에 다리를 걸치고 앉으니 일본 황세자비가 이런 고즈넉한 즐거움을 알까싶다.

90년대 초 화산 마그마가 흘러 기와지붕만 남은 마을에서 소방관, 자위대, 경찰 42명과 몰래 집에 돌아갔다 사망한 1명이 있었다니 희생의 안타까움과 목숨이 재물보다 소중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세금포탈과 혹정에 16세 소년 예로니모가 대장이 되어 십자가를 들고 히라성에서 4개월간 항쟁했던 시마바라난은 1명의 배신자와 네델란드 함포의 사격으로 12만명에 맞선 3만 명의 죽음을 맞으니 그 쓸쓸함이 바닷바람에도 남아있다.

백년된 호텔은 아늑하고, 유황 냄새가 진하고 뜨거운 노천탕에서 삼일간의 여독을 푼다.

 

넷째 날

이동 중 휴게소에서 포착한 바다사진 구석을 나르는 한 마리 큰 새는 방사능 누출에도 이곳은 여전히 아름다우니 오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츠루다감옥터는 우리나라 순례자들의 방문을 계기로 교육청에서 역사현장으로 찾아낸 장소인데 신자 삼십 명이 함께 눕기도 어려운 좁은 터에서 하루 감자 한 알로 용변까지 하며 머물렀단다.

꽃으로 제대를 곱게 꾸민 우에마츠성당에서 미사 후 자매님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세계 어디서나 역사를 따뜻하게 만든느 아줌마부대의 힘을 느꼈다.

백삼십일 명의 순교자들이 부활할까봐 몸과 목을 500m 거리를 두고 따로 묻은 서총과 동총의 몸무덤 순교자상은 하늘ㅇ르 우러러 두 손을 모우고, 목무덤 순교자상은 목을 숙이고 두 손을 모은다.

타미라성당(1918년)에서 성경내용을 주제로 한 스탠드그라스 엽서로 헌금을 대신하고 천황 이외에 모든 이가 화장되어 안치되는 납골당이 미사 왔다가 몇 걸음에 들릴 수 있으니 망자도 산 자도 위안이 되겠다 생각한다.

바다와 들이 보이는 갈대와 바람의 언덕에 올라 '행복하다'는 동행한 선생님처럼 마음이 맑아지길 바래본다.

 

다섯째 날

'교회와 절이 보이는 풍경'의 긴 계단을 오르면 이만엔을 모아 지은 히라도성당이 있는데 이천엔이 모자라 좌측첨탑이 없는 모습이 10% 곱하기 몇 배 부족한 자신을 보는 듯하여 정겹다.

이키츠키 최초의 순교자(1609년)가 처형된 쿠로세의츠치의 십자가는 햇빛을 받아 빛나고, 추방되었으나 7년 후 다시 들어와서 화형을 당한 카미로신부(1621년)를 기린 야이자 순교비에선 불길이 지금도 타올라 무디고 차가운 순례자의 마음에 믿음의 불길을 당기려한다.

오늘은 들판에 불을 놓는 날이라 한다. 여기 저기 논을 태우는 불길을 보니 새 마음밭에 새 생명 일구라 한다.

우리나라 성인·복자·순교자님들을 대할 때 '나는 과연 그리할 수 있을까?'하던 의문이 일본에선 더 구체화된다.

후미에(신자를 색출하려고 나무판 가운데 성모님을 새긴 동판을 끼거나 성화를 밟고 지나가게 함)의 날이 밝아오는데 저는 소금으로 발을 문질러 깨끗이 씻고 새 버선에 새 짚신을 신고 밟을 준비를 하고 있진 않을까요? 그리고는 돌아와 용서를 청하며 관음상을 앞에 두고 묵주 기도를 올리진 않을까요?

수십만의 신자 가운데 수만 명만 순교하였다면 누가 그리한다하여 손가락질을 할 수 있으며 '너는 신자가 아니다' 할 수 있나요?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 온 자이다. 나는 네 발의 아픔을 알고 있다."(「침묵」책)고 투신하지 못 하는 저를 주님께서 위로하시니 감히 말씀드린다.

저의 하루를 살아계신 예수님·성모님·성요셉님 앞에 드리며 죽음의 고통을 바친 순교자들과 참인간으로 사시다 돌아가신 선우요셉선생님, 이태석요한신부님을 닮아 침묵하며 주님의 뜻을 기다리고자 한다. 주님을 찾으며 언제 부르셔도 "네"응답할 수 있게 죽음을 준비하도록 애를 써야겠다. 그러노라면 꿇어 기도를 드리던 성화와 성상을 차마 밟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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