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자의 편이 아닌 국민의 편에 선 공권력을 보고 싶다
위정자의 편이 아닌 국민의 편에 선 공권력을 보고 싶다
  • 장경욱 변호사
  • 승인 2014.08.10 23:31
  • 호수 2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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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 변호인단 장경욱 변호사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공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어떠할까요. 필자부터 고백하자면, 80년대 대학생활 내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저항하며 6.10 민주항쟁을 일군 경험을 지닌 486세대에게 ‘공권력’은 극우 보수 세력의 정권유지를 위한 권력수단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매우 강한 것이 사실입니다.

영화 ‘변호인’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입니다’라는 명대사처럼 ‘공권력’은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공의 안녕을 담보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기능을 발휘해야 마땅한 것이겠지요. 여러분들은 ‘공권력’으로 일컬어지는 군대,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청와대, 내각, 시청, 구청, 동사무소 등 행정기관이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순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가요. 국회, 지방의회 등 입법기관과 법원, 헌법재판소 등 사법부도 국민의 편에서 봉사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가요.

필자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을 맡아 지금까지 소위 ‘공권력’이라는 국가정보원, 검찰에 맞서는 가운데, 극우 보수 세력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한 그들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간첩 조작 사건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한 개인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정치적 이해득실을 필사적으로 지켜내고자 하는 표독스러운 모습만 보이더군요. 이후 간첩 조작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습니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극우보수의 민낯이 국민들에게 속속들이 알려질까 두려워 종북몰이로 끊임없이 여론을 호도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꼬리자르기식 책임전가나 변명에 매우 익숙했습니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상대로 종북몰이 및 사건 조작 및 은폐 축소와 같은 모습, 자주 보지 않으셨나요.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등 역사의 고비마다 국민들은 ‘공권력’의 추악한 모습에 목숨 바쳐 항거했습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 열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대공수사기관은 학생운동을 하던 박종철 열사를 빨갱이로 몰아 잡아 가뒀습니다. 열사의 동료까지 잡기 위해 동료의 소재를 순순히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물고문까지 가해 살해했습니다.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기 위하여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심장마비로 죽은 것 인양 사건을 은폐·조작하고자 했습니다. 나중에 고문치사 사실이 드러나자 그 고문 가담자를 축소하기까지 했습니다. 군사반란에 맞서 싸운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살육한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일입니다. 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 실에서 고문 살해된 박종철 열사의 한이 그해 6월 항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더러운 ‘공권력’의 모습을 비단 옛날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을 보면,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소불위의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두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국리민복이 아니라 극우 보수 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행사되는 ‘공권력’은 절대 국민의 편이 아니라 위정자의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국민을 향한 흉기입니다. 우리나라에 집회 및 시위의 자유가 존재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집회 및 시위의 원천봉쇄가 다반사입니다. 청와대를 향한 국민의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하여 시도 때도 소위 ‘공권력’이 동원되어 ‘불법집회, 불법시위 엄단’을 외칩니다. 국민에 의해 통제되고 국민을 위한 친절한 공권력은 없습니다. 오로지 ‘공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집회 및 시위’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경찰 차벽으로 막힌 채 청와대로 향하여 전달될 수 없는 분노의 함성만이 응답조차 없이 울려 퍼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소통 없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소통의 정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사회는 근본적 성찰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 하고 책임져야 할 국가의 역할, 그 책임감과 헌신성, 실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가 역사의 한 분기점으로 국민의 대오각성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국가’, ‘공권력’의 역할에 대한 재인식, 재검토, 대개조의 과제가 등장하고 있고 응당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제 위정자의 편에서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공권력’은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국민의 편에 선 공권력’만이 그 정당성과 존재의 필요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을 미행 사찰하는 공권력이 필요합니까. 청와대를 향한 유족들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통제하는 공권력이 정당합니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거리의 서명과 촛불시위를 억누르고 탄압하는 공권력이 언제까지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한다는 거짓 명분을 빙자하여 국민의 위에 군림하도록 가만히 두고 보아야 합니까.

위정자의 편에 선 ‘공권력’은 무책임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항의를 종북으로 몰아 탄압하기 일쑤입니다. 케케묵은 극우 보수 세력의 거짓 논리를 깨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주류의 자리를 꿰차고 국민을 겁박하고 호령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태가 때론 무섭고 때론 유치하고 야비하고 더러워서 국민들이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눈치 보며 피하고 무시하는 사이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극우 보수 세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비정상적인 공포의 통치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정상의 ‘공권력’을 정상으로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극우 보수 세력을 이 사회에서 추방해야 마땅합니다. 지금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우성과 필자를 비롯한 그 변호인들에 대하여 갖은 공격을 하는 그들이 극우 보수 세력의 민낯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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