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책, 무거운 책
가벼운 책, 무거운 책
  • 사설위원회
  • 승인 2009.11.12 18:29
  • 호수 1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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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가대 학보 198호에는 1999년과 2009년의 가대생 독서 경향을 보도한 기사가 실렸다. SF류의 판타지와 만화책의 대출 빈도수가 확연히 증가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경향은 우리 학교의 문제만도 아니고 새삼스러운 결과도 아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도 서울 소재 주요 대학의 독서 경향이 보고되었다. 《해리포터》시리즈, 만화책 《식객》, 《아내가 결혼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등이 순위에 올라와 있다.

70년대나 80년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도 판타지 소설과 만화책을 읽었다. 해리포터 류의 판타지는 없었지만 무협지는 당시도 애독서 중의 하나였고, 최근 독자층이 부쩍 늘어난 허영만의 만화나 가대에서 대출 순위 1위를 차지한 고우영의 《삼국지》도 많이 읽혔다. 그러나 이런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받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예 도서관에 구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양지(?)에서 대놓고 읽기도 힘들었다. 반면에 양지에서는 이념이나 사관(史觀)에 대한 무거운 책이나 사상사의 큰 맥을 잇는 고전과 씨름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70,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교수들에게, B급 문화의 영역에 속하는 만화나 판타지와 같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받아 탐독하는 현상이 놀라울 수밖에 없다. 즐기고 싶은 욕망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되는 밝은 시대에 사는 학생들의 자유가 부러울 수도 있고, 그러한 책을 내놓고 읽을 수 있는 용기가 부러울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다. 그런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생의 독서라면 아무래도 좀 특별한 무엇이 있을 필요가 있다. 대단히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독서 경향이 주를 이룬다는 것은 분명히 반성하고 넘어갈 일이라는 것이다.

대학은 주어진 교육 과정에 따라 틀에 박힌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다. 대학은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구체화시켜야 하는 곳이다. 이 과정을 통해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비판적 지성을 확보해야 하는 곳이다. 대학 시절에 가장 공들여 해야 하는 공부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고민해도 모자랄 큰 화두를 얻어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이 아름다운 대학생의 모습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 화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치열한 고민을 담고 있는 책들과 만나야 한다. 삶에 대한 고민은 책을 통해 해결되고, 해결과 동시에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대학생이 누릴 수 있는 참 행복한 특권이다. 그런데 감각적이고 오락적인 책을 보는 일은 그 고민을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것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고민이 너무 힘들어서 가벼운 독서를 통해 잠시 쉬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때 만화책을 보면 만화책 역시 단순한 만화로 읽히지 않는다. 요즘 대학생들의 독서 경향이 ‘잠시 쉬는’과정에서 온 경향이라고 믿고 싶다. 무거운 책과 너무 많은 씨름을 한 덕에 판타지와 만화책을 읽는 빈도수도 그에 비례해서 늘

어났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대학은 취업 공장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고, 우리의 도서관은 삶으로부터 도피하는 공간으로 변질될 위기를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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