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은 부서지는데 파리에 있는 우리는 춤을 추는구나
리스본은 부서지는데 파리에 있는 우리는 춤을 추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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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9.29 22:38
  • 호수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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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학생회에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 합법적이지만 부정의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겨우내 불법을 면하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절차상 문제가 없는,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홀로 내팽겨친 이들이 감히 어느 누구에게 자신의 처지를 토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총학생회는 이 질문들에 이미 답했다. 불법이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었고 홀로 남겨진 12명이 왜 말할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상식의 부재고 공감의 부재다.

상식은 세상을 이루는 수없이 많은 약속, 공공선을 바탕으로 하는 총체적 결과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상식을 토대로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준비한다. 본교 용역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10년을 일했든, 5년을 일했든 매년 재계약해야 하는 탓에 계약이 만료되면 아무 말없이 떠날 수밖에 없다. 매년 재계약하는 탓에 1년차와 10년차의 연봉이 같은 구조, 눈치 볼 수밖에 없는 을의 위치는 여전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총학생회는 안타깝다며 절차상 문제가 없었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었다. 어쩌면 안타깝다는 말은 무엇인가 행사할 수 있는 주체, 학생으로부터 위임된 권력을 가진 주체가 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한 말일지도 모른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상식은 이렇게 지탱되고 있었다. “리스본은 부서지는데 파리에 있는 우리는 춤을 추는구나”라는 말마따나 우리는 그저 춤을 췄고 매일같이 그냥 살았던 것이다. 동시대 같은 공간에 존재했던 누군가는 삶을 겨우내 지탱하고 있는데 학생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그들은 매일 ‘그냥’ ‘그저 안타깝다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

총학생회는 홀로 남겨진 12명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아쉬워하기 이전에 왜 12명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는지부터 묻는 것이 순서다. 그게 그 목소리에 공감하는 첫 번째 순서고 마냥 어깨동무한다고 공감되지 않는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허리를 굽히면 볼 수 있는 민들레에게 소나무가 되라고 한 것은 아닌가. 한 번이라도 민들레를 보기 위해 허리 굽혀본 적 있나. 어쩌면,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민들레가 보이지 않는다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2001년 하버드대학교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농성했다. 청소·경비·식당 노동자들의 생활임금 개선이 그 이유였다. 40여 일간 멈추지 않고 투쟁한 끝에 생활임금 쟁취와 더불어 노동조합까지 인정됐다. 동시대 누군가는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감에서 공감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시대를 지탱하는 상식도 이러한 공감능력에서 출발함에 자명하다. 명심하자. 법을 무기로 세상의 잣대를 판단하는 것은 검사나 판사가 할 짓이다. 세상에는 합법이지만 부정의한 일이 너무나도 많다. 부정의에 눈감지 않는 것, 법적 테두리 안에 숨지 않는 것에서부터 어깨동무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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