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
분노,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
  • 심상현 기자
  • 승인 2009.11.12 18:58
  • 호수 1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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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 인간학연구소 제13회 심포지엄: '감정'의 인간학
▲ 서병창(인간학교육원) 교수가‘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노’를 주제로 발표 중이다.

본교 인간학연구소(이하 연구소)에서는 지난 1999년부터 윤리학, 사회학, 역사학, 종교학 등 여러 학문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인간의 본질적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그 결과로서 지난 9일 (금) 오후 2시~6시 미카엘관 미카엘홀 HB 107호에서 본 연구소가 주최한 ‘인간학연구소 제13회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번 심포지엄은 연구소가 올해부터 3년 동안 탐구할 소주제인 ‘일상생활의 감정’에 대한 첫 심포지엄으로서 ‘분노-감정의 인간학’을 주제로 다루었다. 이번 심포지엄의 순서는 ▷주제발표 1.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노 개념 ▷주제발표 2. 분노의 예술: 조나단 스위프트의 풍자문학《통이야기》(A Tale of a Tub)을 중심으로 ▷휴식 ▷주제발표 3. 분노의 기원에 대한 정신 분석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되었다. 30분간의 주제발표에는 약정토론 20분이 함께 진행됐다.

분노, 이성과 의지로 통제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 없이 분노한다. 분노할 때는 일시적으로 기쁘지만, 그 폐해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후회하게 만든다. 이런 후회는 막을 수 없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 답해주고 있다. 즉, ‘분노’라는 감정은 올바른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조절이 가능하다.

서병창(인간학교육원) 교수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책《신학대전》에서 나타난 ‘분노’를 주제로 발표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분노의 원인을 ‘경시’로 보았다. 상대의 옳지 못한 행동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분노를 느끼면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슬픔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보복하는 방식 등으로 분노를 표출함으로서 ‘올바름’을 실현하려고 한다. 분노를 표출하면 슬픔이 멈추고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분노가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분노로 인한 신체적 흥분은 이성적인 사고를 방해하게 만든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음에 따라 잘못된 결과가 일어나기 쉽게 만든다. 또한 분노는 이성보다 감성을 앞서게 만든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지나친 분노로 인한 합당하지 못한 보복과 상대방에게 대한 무례한 언행, 심지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폭력적 행동 등의 악덕을 유발한다. 따라서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고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사용해서 어떤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해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분노를 포함한 감정은 이성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성은 감성을 완벽히 통제 할 수 없다. 또한 이성이 감성에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감성이 이성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있다. 이 점에서 감성 역시 자율성을 갖춘 주체지만, 이성이 감성을 간접적으로 통제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성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즉 이성은 기수처럼 감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 따라서 분노는 감정이므로 이성의 판단으로서 제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성적 판단이 잘못되지 않도록 자기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어서 김이균(철학) 교수가 진행한 약정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에서 김 교수는 서병창 교수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분노가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하게 정의내리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리고 감정이 이성에게 철저하게 통제받는 듯한 표현 역시 이의를 제기했다. 김 교수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분노에 대해서 이성 뿐만이 아니라 감정 역시 적극적인 역활을 맡았다고 해석했으며, 이렇게 감정의 적극적인 역활을 주장한 것은 현대 신경과학의 관점과도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분노와 정서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이 시대에 다시 주목하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약정토론을 마쳤다.

분노의 또 다른 표현, 풍자

분노는 통제해야 한다. 하지만 분노를 풀지 못한 채로 쌓이면 ‘홧병’이 된다. 따라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살아가다보면 분노를 일으킨 대상이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없을 때도 많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 대해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분노의 표현 방법으로 ‘풍자’를 선택했다.

박주식(영문) 교수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풍자를 분노의 다른 표현으로 보았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펜을 잡고 집필했던 동기는 그가 표출하고 싶었던 분노였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영국인으로서 영국과 아일랜드 양쪽에서 구성원이 되지 못했기에 외부인으로서 겪었던 경험과 인간과 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에 대해서 강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극단적인 분노를 표출할 방법으로 풍자문학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풍자소설의 최고봉은《통 이야기》(A Tale of a Tub)다. 통이야기에서 그는 종교와 학문의 타락상에 대해 특유의 신랄한 독설과 풍자를 내뱉는다. 그의 풍자는 비유나, 과장, 아이러니 등의 방법을 통하고 있지만 그의 가장 특징적인 풍자 방법은 페르소나(persona)다. 그가 창조해낸 가상의 나레이터인 페르소나는 꼬집고자 했던 대상을 풍자하고 있다. 하지만 페르소나는 일정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소설 중반에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어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심지어 독자를 농락하는 인상마저 주었다. 이러한 난해성은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평가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어 교수는《통 이야기》에서 페르소나의 목소리에 대한 영미문학 비평가들의 분석을 설명하려 했으나 발표시간이 초과되어 발표하지 못했다.

약정토론은 안보옥(불문) 교수가 발표했다. 교수는 스위프트의 대한 비평을 잘 정리 했지만, 정작 분노 자체에 대한 발표자 자신의 구체적인 해석이 없다는 점과 스위프트의 풍자 특성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또한, 발표자는《통 이야기》저자가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저자는 자신이 사제로 몸을 담았던 성공회에 대해선 가톨릭과 개신교와는 달리 온건한 비판에 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점은 성공회를 비판하기 어려웠던 건지, 아니면 성공회가 부패하지 않았던 것인지 질문하며, 학문적인 면에서도 스위프트가 꿈꾸던 세계관과 이상은 어떤 것이었는지 의문을 던졌다.

어린 시절과 연관된 분노

‘사이코패스’. 근래에 일어난 대형 강력범죄들로 인해 이 단어는 범죄심리학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낯익은 단어가 되었다.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진 이들은 타인에게 분노를 거리낌 없이 표출한다. 사이코패스들이 가진 성격 장애처럼 다른 정신적인 문제 역시 분노를 유발한다. 이렇게 분노를 유발하는 정신적인 문제를 심리학에선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또한 분노의 기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창재(한국 프로이트 정신분석연구소) 소장은 분노의 기원에 대해 정신분석을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정신분석이 주목하는 분노는 만성적인 분노이며, 정신분석에서 만성적이라는 의미는 최소 10년 이상 지속됐으며 사망할때 까지 지속되는 것이라고 전제를 달았다. 이어서 분노의 기원에 대해 설명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들은 유아기에 여러 단계의 성장 과정을 겪는다. 성장 중 정상적으로 통과하지 못한 단계가 있으면 이 문제는 잠복했다가 성인이 된 이후에 정신적 문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분노를 유발하는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발달심리학 적으로 볼 때, 분노를 유발하는 정신적 문제는 신경증적 분노, 성격장애적 분노, 정신증적 분노가 있다고 분류했다. 신경증적 장애자들은 성장단계 중 이성 부모에 강한 애착을 갖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를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한 사람이다. 이들은 이성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해서는 안되는 짓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심하게 학대시킨다. 이로 인해 파괴적 성향을 가지게 되며, 이들의 분노는 남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다. 성격장애자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전에 겪는 어머니와 분리되는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사람이다. 어머니와 분리되는 과정에서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환상이 깨진다. 하지만 이들은 이 과정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애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들은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기에 상대방에게 분노를 전가하여 표현한다. 이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기를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을 도덕적으로 제어하는 초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약정토론은 조성호(심리) 교수가 맡았다. 조 교수는 빌표자와 다른 시각으로 분노의 기원을 살펴 보았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세월을 거치면서 변화해 왔다. 생존에 적합한 기능을 담은 생명체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분노의 기능은 잘못을 상대방에게 돌림으로서 거리낌 없이 공격하고 파괴할 수 있게 만든다. 이 기능은 윤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인류에게 생존에 적합했을 것이다. 가혹한 환경에 맞서 자신을 보존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공격, 파괴 등의 가장 극단적으로 대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노를 가장 잘 하는 개체가 유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명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분노는 원시시대와 달리 문명 질서 자체를 붕괴시킬 위험성이 커졌다. 원시시대에는 순기능을 해왔지만 문명시대에 와서 역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즉, 분노는 진화과정에서 불가피한 부작용인 것이다. 문명의 시기가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분노는 남아있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 중 ‘분노’가 무엇인지를 찾은 철학∙문학∙심리학에서의 이번 연구는 막을 내렸다. 철학자는 ‘분노를 제어 가능한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문학자는 ‘문학작품을 통해 분노가 문학으로 승화되었다’고 평했으며, 심리학자는 분노를 ‘어린 시절에 겪은 문제의 확장’이라 주장했다. 일상 속에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분노’라는 감정을 다방면으로 심도있게 분석한 이번 심포지엄은 유익한 그 의미에 비해 참여 인원이 40여 명이었다는 점에서, 또 시간의 제한으로 인해 논의가 충분히 전개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양한 방면에서 인간, 그 감성을 이해하려는 이 논의가 더욱 깊어지고, 그 결과가 사회로 확장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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