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자격을 말해볼까 합니다
감히 자격을 말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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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0.15 19:07
  • 호수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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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대변인'이라는 것이 있다. 밀(J.S.Mill)의 자유론에서 등장하는 이들은 올바른 판단을 위해 비판을 한다. 민주 사회로 적용을 하자면 자칫 다수가 놓칠 수 있는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모두가 눈을 감고 넘어갈 때 바른 소리를 하는 소위 '불편한 자'들이다. 불편한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바른 사회는 이들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악마의 대변인이라는 존재들은 그 사회에서 늘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지식인이었고 '정의'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자칭 '아테네의 등에'라고 부른 소크라테스, '프랑스의 반역자'라고 불린 사르트르가 있다. 이들 악마의 대변인들은 그 사회가 여전히 '바름'을 추구하는 한 끊임없이 사회와 소통을 하며 정의를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만약 바른 사회가 흔들린다면? 다시 말해 공동체의 구성원이 서서히 비판에 무감각해지고 소위 공동체의 리더들이 '불편'을 감수하지 못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바름'과 '정의'가 사회에서 옅어져 가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때, 사회를 위해 악마의 대변인의 존재 이유가 성립될 수 있을까.

비판을 받는 사람들은 그 비판을 받을 자격을 갖춰야 한다. 굳이 자격이라고 하는 이유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왜 책임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 판단에 대해 신중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항상 정신이 밝게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판을 받는 사람들은 공동체, 더 가까이에는 이 학교의 구성원이자 이 학교를 이끄는 주체들이다. 주체가 더 이상 주체가 아니게 될 때 그들은 그 자격을 상실한다. 극단적이라 여길 수가 있다. 하지만 이건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이건 '바름'과 '정의'가 걸린 문제이고 그 주체가 살았던 그리고 앞으로의 주체가 존재할 '바른 사회'가 걸린 문제이다.

'사회'라고 해서 거창하게 느껴졌을지도 몰라 본교로 논의를 가져와 보겠다. 본교는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교수들이 있다. 각각의 교수는 각 분야에서 본교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훌륭한 악마의 대변인이다. 그러나 교수들은 어느샌가 학교의 눈치를 보고 있다. 단적인 예로 학보사에서 취재를 하면서 겪는 고충 중에 "교수 섭외의 어려움"이 있다. 교수들이 말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자격이 되지 않는다', '바쁘다', '……' 등이다. 그나마 섭외가 되더라도 '민감한' 얘기면 익명으로 해달라는 말은 꼭 등장한다. 그러나 악마의 대변인은 '눈치' 봐가며 한마디 하는 자리가 아니다. 학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학생들도 분명 본교의 구성원으로서 주체에 해당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지난 총학생회 선거의 투표율은 51%를 간신히 넘겼다. 단대 투표율의 상황도 비슷하다 전체 투표율 평균이 53%에 불과하다. 나름 학생들의 여론이 형성된다는 대나무 숲조차도 연애 얘기이고 학교 공지, 학사 정보를 찾으면 나오는 내용들에 관한 질문들이 대부분이다. 학생사회가 죽었다고 누가 말하지만 객관적으로 말하면 자살한거다.

개선 가능성은 가능성을 움켜쥔 주체의 몫이다. 악마의 대변인이 존재해봤자 주체가 외면하면 그만이다. 자격 미달에게는 악마의 대변인조차도 사치다. 이 글을 읽고 불편했다면 지금이라도 주체로서의 자격을 재고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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