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당선] 철까마귀들의 노래를 들어라
[소설 당선] 철까마귀들의 노래를 들어라
  • 김혜준 (국어국문∙4)
  • 승인 2016.11.29 16:29
  • 호수 2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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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푸르에서 온 핫산은 유조선의 격벽을 자르다 추락사했다. 알랭의 날씨는 유난히 더웠고 핫산의 작업복은 땀으로 질척거렸다. 무엇보다도 안전끈과 작업복의 접촉면에 스며드는 땀이 문제였다. 온도가 조금만 시원했어도, 혹은 작업복 원단이 조금만 덜 싸구려였어도 그가 안전끈을 느슨하게 풀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랭은 항상 그랬듯이 뜨거웠고 핫산은 싸구려 작업복을 입고 다녀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핫산의 다부진 갈색 몸이 십이 미터 아래의 갑판으로 추락해 으스러진다. 그에게 먹여 살려야 할 두 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과 병든 아내가 있다는 사실은 중력의 적용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가난한 해체업자 한명이 산산조각 나던 그 순간에도 알랭에선 열 두 척의 어선과 두 척의 경비정, 그리고 한척의 유조선이 해체되고 있었다. 그의 시체는 곧 치워질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누군가가 핫산의 부서진 몸을 작업복에 담아 철가루가 휘날리고 기름이 스며드는 한구석에 매장할 것이다. 몇 년 뒤에 핫산의 아들들도 배를 자르고 조각내러 아버지의 무덤에 올지 모른다.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일찍 오열하는 어머니와 딸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알랭의 일과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배들의 무덤 알랭은 무심하게 해체를 계속해나갔다. 지구가 자전하는 것처럼,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처럼.

그 낡은 유조선은 나이든 고래처럼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녹과 흉이 가득한 표면은 먼지가 가득해 원래 색을 알기 힘들다. 땅으로 끌어올려진 배는 지친 모습이다. 드러난 용골에 달라붙어 미라의 이빨처럼 빛나는 조개껍질들이 없었다면 누구도 이 늙은 배가 바다를 건너다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것 같다. 그 조개껍데기들은 지금 알랭의 뜨거운 햇빛 아래서 말라붙고 있었다. 인도의 촌구석 항구 알랭에선 세계 각지에서 온 폐선들이 해체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작달막한 베트남 어선이든 프랑스의 군함이든 모두 알랭에선 평등하다. 여기서는 어떤 배라도 하루에 50루피를 받고 일하는 해체 노동자들의 손에 잘려나가 고철로 팔려나간다. 그러나 배의 무덤 알랭에서도 낡은 한국산 유조선 유성호만큼 거대한 선박은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었다.
H조선소의 장상무는 땀을 훔치며 유성호의 시체를 올려다보았다. 인양선에 이끌려 부산에서부터 인도까지 끌려온 지 몇 달이 지나서야 간신히 유성호는 자신의 장례식장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 거체는 알랭의 가장 큰 해체장解體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성호는 사고가 있기 전 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가장 큰 유조선 중의 하나였다. 유성호가 가지는 의미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배의 해체라면 굳이 조선소에서 직원을 파견해 감독할 필요는 없다.
“왓 이즈 쉽즈 네임? (배 이름이 뭡니까?)”
장상무는 한참이 지나서야 질문을 알아들었다. 폐선들처럼 기름때와 흉터가 가득한 자그마한 인도인이 서류철을 들고 있다. 유성호의 해체를 전담할 현지인이다. 이 근방에선 몇 안 되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도인이기도 했다. 왓 이즈 쉽즈 네임? 꼬부라진 인도 억양은 알아듣기 힘들다. 인도의 촌구석 항구까지 사원을 보내면서 도대체 통역사 하나 구해주지 않는 회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장상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유성. 유성호.”
“유성. 이즈 잇 차이니즈 쉽? (중국 배입니까?)”
“차이니즈? 노, 노. 코리아.”
인도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서류에 뭔가를 끄적거린다. 남자의 시꺼먼 팔뚝을 타고 기름때 섞인 땀이 흘러 종이에 얼룩을 남긴다. 괜스레 불쾌한 기분이든 장상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유성호를 바라본다. 벌써부터 해체업자 무리가 말뚝과 산소 용접기를 이리 저리 나르고 있다. 어렸을 적에 자주 보곤 했던, 풍뎅이 시체에 몰려드는 개미 때가 떠오른다. 인도와 마찬가지로 해체업으로 유명한 방글라데시에선 그들을 철까마귀라고 부르곤 했다. 장상무는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걷어 올리며 질문했다.
“해체에 얼마나 걸립니까?”
“돈 노.(몰라요.)”
인도 남자는 어깨를 으쓱한다. 이렇게 큰 배는 자기들도 오랜만이라는 것이다. 몇 달, 길게는 일 년을 먼지와 철가루 가득한 항구 도시에서 지내게 될 거란 전망은 장상무를 더욱 짜증나게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마누라가 바가지 좀 긁겠는데, 장상무.’라며 비아냥거리던 김전무의 태도가 그제야 이해되었다.
장상무는 느닷없이 담배 걱정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해외 출장 때문에 정신이 없어 뉴델리의 공항 면세점에서 몇 보루 산 게 전부였다. 알랭에도 담배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가 즐기는 일본 담배는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생각이 더욱 담배생각을 간절하게 한다. 장상무는 셔츠 주머니의 담뱃갑에 손을 뻗다가 참는다. 아껴야한다. 언제 다시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서류 처리가 끝난 것인지, 인도 남자는 꼬깃꼬깃한 서류철을 접어 옆구리에 끼더니 손을 내밀며 말한다.
“하레사, 하레사.”
무슨 단어지. 영어는 아닐 텐데. 담배를 달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하다. 멀뚱히 흔드는 손을 바라보는 장상무에게 인도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단어를 반복한다. 손동작이 몇 번 오가고 나서야 장상무는 그것이 사내의 이름이라는 것을 안다. 장상무는 떨떠름하게 손을 내밀어 하레사와 마주잡는다.
“마이 네임 이즈 장규보. 나이스 투 미 츄.”
하레사가 웃는다. 이가 눈부시게 희었다.

부산 앞바다에서 유조선 한 척이 어선을 들이받았다. 항해 중에 누락된 화물을 발견한 그 유조선은 급하게 반전해 조선소로 향하던 참이었다. 선장은 지나치게 서둘렀다. 안개 낀 새벽 바다를 출항하던 어선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어선의 속도는 느렸고 간조의 영향으로 암초가 많이 들어난 상태였다. 선장은 나중에 레이더에 잡힌 어선을 암초와 착각했다고 증언했다. 갑자기 움직인 암초에 들이받힌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어선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충분히 충돌을 피할 수 있어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결국 삼십만 톤의 유조선은 새벽안개를 뚫고 튀어나와 자그마한 어선을 들이박고 말았다. 오징어들이 촉수를 날개처럼 펼치고 깨진 전등 파편 사이를 날았다. 어선은 순식간에 가라앉아 바다 위를 떠다니는 오징어들을 빼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새까만 먹물을 뚫고 생존자는 나오지 않았다.
유조선은 어선을 산산 조각낸 것으로는 그렇게 큰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어선의 잔해가 스크루에 휘말려 좌초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당황한 항해사가 조타수를 닦달하는 방향에 좌초는 난파로 확대되었고 부산 앞바다가 밤하늘처럼 물들었다.
뉴스에선 앞 다투어 올해 최악의 환경재앙이라며 뉴스를 쏟아냈고 전국에서 선량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으며 해외에선 기름때를 뒤집어쓴 바닷새들을 토픽으로 내보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온몸에 기름때를 뒤집어써가며 솔로 방파제를 문지르는 자원봉사자들을 치켜세우는 공익광고가 나왔고 이 위기를 단결해 극복하자는 감동적인 정치인들의 언사가 쏟아져 나왔다. 오징어잡이 어선의 유족들이 몇 명 몰려와 바닷가에서 통곡하는가 싶었지만 어떤 카메라도 그들을 주목하진 않았다. 마치 기름 유출 사태와 어부들의 죽음에는 유조선의 삼십만 톤과 어선의 십여 톤만큼 큰 가치의 차이가 있는듯했다.
사고를 일으킨 유조선을 건조한 H 조선소는 발 빠르게 해당 선박의 폐기를 발표했다. 선체에서 이상이 발견된 것은 아니었지만 스크루가 뒤틀려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각에선 노후화된 선체를 지나치게 운용해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이미 유조선 유성호는 인도의 작은 항구로 폐기되기 위해 떠난 후였다.

장상무가 유성호의 뒤를 따라나선 것은 사고가 발생한 후 한 달이 지나서였다. 알맹이만 남은 유성호의 몸뚱이가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에 들어섰을 무렵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한 달이나 늦게 출발했어도 장상무는 유성호보다 훨씬 빠르게 인도에 도착할 것이다. 유성호가 알랭이란 이름의 낯선 항구에 도달할 동안 먼저 도착한 장상무는 배의 장례식을 준비할 터였다. 상주라 생각하라며 상관이 어깨를 두들겼다.
H조선소는 유성호를 충분히 해체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하지만 유조선은 침몰했을 때만큼이나 해체할 때도 많은 유류를 유출하는 선박이다. 이미 충분히 기름을 흘려댔다고 생각한 경영진은 해외에서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사원 중에서 그 혼자 떠나게 된 것은 매스컴의 주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것인 듯 했다. 유성호 자체의 결함이 사고를 일으킨 것 아니냐는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어딜 가는데요?”
“인도래.”
“아아.”
뉴델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아내와의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아내는 왜 가는지, 언제 오는지 묻지 않았다. 장상무 같은 마케팅 부서의 인물이 왜 해체현장을 감독하러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장상무는 인도에서 머물 호텔의 연락처를 남겼지만 과연 아내가 그것을 들춰볼 생각이나 할지 궁금했다. 딸은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이었고 그런 딸을 위하여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교회에 다니며 기도를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장상무가 명왕성으로 출장을 간대도 그들은 아마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알랭으로 떠나기 하루 전, 장상무는 뉴델리의 호텔에서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대화된 수도의 야경은 서울과 그리 다를 것도 없었다. 간혹 터번을 쓴 시크교도들이 몰려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한 10년 정도 전의 명동 같다. 신성시되는 소들과 향내를 풍기는 브라만들을 기대했던 장상무로서는 맥이 빠지는 광경이었다. 한국에서 막연히 생각하는 후줄근함과 신비가 공존하는 개발도상국의 이미지와 다르게 인도는 빠르게 발전하는 자본주의 국가 중의 하나다. 자본의 효율적인 손길은 3억 3천의 힌두 신들이 기거하는 신비스런 땅도 고층건물로 채워놓는다. 간디가 소금을 구하기 위해 일천만 명과 함께 걸었던 흙바닥은 8차선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고 용병 세포이들의 항쟁이 있었던 광장에는 유리로 몸을 두른 근사한 정부청사가 들어서 있다. 자본이 있다면 어디나 서울처럼, 뉴델리처럼 될 수 있는 것이다. 힌두교의 창조신인 브라흐마가 흙더미와 숲과 온갖 동물들을 만들자 인도인들이 돈을 뿌려 그곳을 콘크리트로 덮었다. 그럴싸한 신화의 결말부라 생각하며 장상무는 쓰게 웃었다.

도축당하는 가축이 가장 처음 겪는 고난처럼, 폐유조선의 옆구리에서 기름이 뿜어져 나왔다. 폐선의 해체는 철거와 도축 양쪽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일이다. 첫 작업은 동물의 피를 뽑는 것처럼 배에 남아 있는 유류를 밖으로 빼내는 일이다. 선박들의 유류고 바닥에는 늘 엔진이 들이마시지 못한 찌꺼기 연료가 남는다. 고층 빌딩보다 큰 유조선 같은 경우에는 대형 물류 창고만한 크기의 유류고와 톤 단위의 잉여 연료가 남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철까마귀들의 몫이다. 알랭의 관습이다. 하루에 8시간, 용접기의 불꽃을 뒤집어써가며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하고 알랭의 해체업자들은 50루피를 받는다. 원화로 약 천원이다. 인도 같은 저임금국가의 기준으로도 형편없는 금액이다. 그 값싼 인력은 전 세계의 폐선이 알랭으로 흘러들어오는 이유였다.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일하는 대신, 해체된 배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알랭의 것이 되는 것이다. 유독한 폐선의 처리 방안과 자국의 높은 인건비에 골치 아파하는 선진국의 선박회사들에게 알랭은 매력적인 처리방안이다.
장상무는 하레사와 나란히 양동이를 엎어놓고 앉아 유조선의 도축을 지켜보았다. 석유들이 쏟아지는 모습은 꽤나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빗줄기처럼 떨어지지만 점성이 있기에 바닥에 부딪쳐 물방울을 튀기지는 않는다. 대신 바닥에 새까맣게 떨어져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게 되기 전에 기름 줄기들은 해체업자들이 유조선을 빙 둘러 지어둔 천막에 부딪쳐 흐른다. 기름은 방울져 떠돌다 무리지어 가느다랗게 흐르다 천막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정성스럽게 받쳐둔 드럼통에 담긴다. 해체업자들이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지어둔 천막은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고려해 세워둔 듯 했다. 당장은 할 일이 없는 해체업자들은 검은 빗줄기가 두들겨대는 천막 아래서 잠시 누워 쉬거나 잡담을 나눈다.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것은 열 살 정도나 될법한 어린 아이 서너 명뿐이었다. 알랭 시가에서 놀러 나온 어린아이들 같았다. 새까만 빗줄기를 맞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제지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폐유에 가까운 기름이다. 위험하지는 않은 걸까. 장상무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저거 말리지 않습니까?”
“무엇을요?”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기에 담배를 피울 수 있던 하레사가 연기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들이요. 위험한 곳에서 놀고 있는데요.”
“놀아요? 아뇨, 아뇨. 노는 게 아닙니다.”
하레사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잘 웃는 사내였다. 장상무는 하레사의 손을 따라 검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손에 수건처럼 보이는 넝마들을 들고 있다. 더러는 목에도 몇 겹씩 둘러놓은 녀석도 있다. 소년들은 뛰어다니며 검은 비를 만끽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막에 닿지 못하고 떨어진 폐기름들을 손에든 넝마로 훔쳐내고 있었다. 그것들이 새까맣게 변해 더 이상 기름을 빨아들이지 못하게 되어서야 그들은 드럼통으로 가 넝마를 비틀어 짜냈다.
“저 아이들도 일합니까?”
“일해요. 알랭 사람은 모두 부지런합니다.”
“학교는 안갑니까.”
“학교? 아, 스쿨. 저 아이들은 돈 없어요. 학교 못갑니다. 그래도 일 잘해요. 어른처럼 용접이나 절단은 못하니까 기름을 줍고 다닙니다. 저 아이들은 그렇게 돈 법니다.”
장상무는 미묘한 위화감을 들었다. 하레사는 무척 당연한 것을 말하듯이 얘기하고 있었다. 사실 하레사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세계에서 오는 폐선의 절반이 잠드는 알랭은 그 명성에 무색하게 가난하기 짝이 없는 항구였다. 학교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나 있었고 병원은 적십자에서 운용하는 한 곳 뿐이다. 마을의 일거리라곤 폐선을 해체하는 일 외에는 거의 없었다. 소년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노동에서 면제되기에 알랭은 지나치게 가난한 도시였다.
하레사는 기름이 다 빠질 때까지 사흘은 걸릴 것이라 알려주었다. 장상무가 왜 그렇게까지 걸리느냐며 힐난하자 하레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석유는 브라흐마의 말이에요. 흘리면 안 되죠. 남겨서도 안 되고요.”
브라흐마는 힌두교의 창세신이다. 바다에 떠다니던 그가 외로움을 깨닫고 말을 하자 지구의 만물이 생겨났다고 한다. 태초의 바다를 떠다니던 유일의 창세신이 느낀 외로움은 얼마나 거대했을까. 그의 입에서 흙더미가 튀어나오고, 세상을 뒤덮는 숲과 모래와 강이 흘러나오고 동물 시체들이 엉겨 만들어진 석유도 튀어나왔다.
뭐라 대답하기도 애매했던 장상무는 아껴두었던 마일드 세븐을 꺼냈다. 신문지로 대충 말아 피우는 싸구려 담배를 물고 있던 하레사는 눈을 빛냈지만 장상무는 무시했다.

부유한 집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산다. 알랭에서 가장 부유한 집은 숙박업소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내는 장상무는 알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알랭에는 그처럼 선진국의 선박회사에서 온 손님이 자주 찾아온다.
뉴델리와 달리 알랭의 야경은 그다지 볼 것이 없었는데,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볼 것이 없었다. 도시의 야경은 전기가 들어올 때나 볼만한 것이다. 알랭의 거리들은 유성호에서 흘러나온 폐유들처럼 끈적거리고 새까만 어둠에 잠겨있었다. 네온사인이라곤 광장 한가운데 생뚱맞게 서있는 코카콜라의 광고판 하나뿐이었다.
장상무는 휴대전화를 꺼내들어 회사의 국제 번호를 누른다. 주마다 한번 있는 보고를 위해 장상무가 전화를 걸었을 때 김전무는 꽤 취해있었다. 주변이 시끄러운 걸 보아 회식 중이었나 보다. 업무 중 아닌가, 하고 고개를 잠깐 갸우뚱하던 장상무는 여기는 인도였단 걸 떠올렸다. 시차를 생각하지 못했다.
“어때, 장상무? 회사 돈으로 해외여행하고 좋지?”
김전무는 배알이 뒤틀릴 정도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회식장의 분위기는 꽤나 떠들썩했다.
‘좋긴 뭐가 좋냐, 자식아.’
“지낼 만합니다. 별 문제 없으시죠, 전무님.”
“뭐 여기야 늘 똑같지. 기자들이 이거 수상하다 저거 수상하다 난리를 치긴 해. 그래봤자 냄비 근성이 어디들 가나? 그런데, 코끼리 봤나? 거기선 진짜 쇠고기 못 먹고?”
‘코끼리는 무슨. 쇠고기는 지금 네가 처먹고 있는 거고.’
“코끼리는 못 봤는데 소는 몇 마리 봤습니다.”
“야! 얘들아! 장상무, 소타고 다닌단다. 재밌겠다!”
말을 듣기나 한 건지. 국제 통화 너머의 회식장에서 와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짜증이 치민 장상무는 보고를 간단히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배는 이제 해체가 시작되었다. 아마 몇 달은 걸릴 거 같다. 별 내용도 없는 보고였다. 장상무는 빠르게 끝난 통화 중에 찾아온 강렬한 짜증이 어디서 온 건지 의아했다. 그 근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인도 촌구석의 항구에 처박혀있고 김전무는 쇠고기를 먹고 있다. 그것 때문에 짜증이 난 것이다. 그러나 장상무의 좀 더 깊은 곳은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었다. 열 살짜리 아이들이 몸을 기름에 적셔가며 뛰어다니는 동안 김전무는 쇠고기를 먹고 있다는 것. 그것이 새삼스럽게 부조리로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장상무는 그것이 어처구니없는 트집이라는 것을 안다. 알랭의 어린이들이 가난한 것과, 김전무가 쇠고기를 사먹는 것은 서로 연관 관계가 없다. 선진국 국민의 안락한 삶이 죄악이라면 장상무부터가 거기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다. 장상무는 그렇게 되뇌며 체 피우기도 전에 절반이 타들어간 마일드 세븐을 깊게 빨아들였다.

브라흐마의 말들이 녹슨 드럼통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레사는 흰 이빨이 유난히 잘 드러나도록 웃고 있었다. 알랭으로서도 이번만큼의 풍작은 드문 일인 모양이었다. 도시에서 온 트럭들이 드럼통을 해체장 밖으로 나르자 본격적인 해체가 시작된다.
알랭의 철까마귀들은 큰 선박을 해체할 때면 백여 명이 넘게 모여든다. 손에는 밧줄과 말뚝과 가스 절단기가 들려있다. 가스 절단기가 철까마귀들의 부리고 밧줄은 날개다. 높이가 30미터는 되는 유조선의 옆구리에 사다리가 말뚝들이 고정되고 나면 철까마귀들이 그것들을 기준 삼아 밧줄을 타고 오르내리며 가스 용접기의 불을 뿜는다. 철까마귀들의 복장은 단출하고 억세다. 용접기의 열기를 방지하기 위해 석면 장갑을 끼고 금속 조각에 베이는 걸 피하기 위해 장화 정도는 신지만 안전장비는 보통 그게 전부이다. 개중에는 그것마저도 없어 맨발과 맨손으로 다니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 이들의 팔 다리에는 화상과 흉터 자국이 늙은 바위에 난 잔금처럼 가득했다.
철까마귀들은 가장 먼저 배에 남긴 기름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엔 에어컨이나 모니터 같은 전자 부품을 때어낸다. 배 곳곳에 깔린 전선과 구리선들도 남김없이 거둬간다. 외피와 장갑판은 가장 맨 마지막에 해체된다. 뜯겨져나간 금속판은 수백 킬로미터 너머의 용광로로 가 그곳에서 녹여진다. 녹여진 금속은 다시 선박을 만드는데 쓰인다. 알랭은 무덤인 동시에 산파의 집이기도하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서너 달 이상 걸리는 노동 집약적인 산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인 같은 중장비는 일체 없다. 오로지 순수한 인력으로만 행해진다. 조선소에서 근무하던 장상무에게도 유성호의 해체는 대단한 광경이었다. 가스 절단기의 마그네슘 불꽃은 먼 곳에도 또렷하게 보인다. 그런 불꽃이 길이가 이백 미터에 가까운 유성호 전체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빛난다. 이따금 쇠를 찢는 굉음 속에서도 또렷이 들리는 해체업자들의 고함과 함께 쓸모없는 기자재들이 유성호의 간판을 넘어 추락한다. 철가루가 휘날리고 진흙이 튄다. 보다 쓸모 있는 물건들은 밧줄에 정성스럽게 묶여져 내려온다. 좀 가벼운 물건 같은 경우엔 유조선 옆구리에 대 놓은 경사면 위로 직접 들고 내려오기도 한다. 유성호 옆에는 그런 방식으로 내부에서 꺼낸 전자제품이 우수수 쌓여있다.
한국제 모니터. 일제 환풍기. 중국제 에어컨. 대만제 케이블. 종류도 국적도 다양하다. 이따금 해체장에 트럭이나 개조한 삼륜차들이 들어오곤 한다. 알랭의 부품 상인들이다. 알랭에는 해체된 배에서 흘러나오는 중고품들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큰 시장이 있다. 그런 상인들과의 흥정 또한 하레사의 일이었다. 하레사는 해체장의 굉음을 이기기 위해 목청 높여 소리 지르고 손을 흔든다. 상인들의 모습도 철까마귀들 만큼이나 가지각색이다. 건장한 중년 사내가 있고 턱수염이 자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억세 보이는 여인이 있으며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노인이 있다. 육중한 견인차를 몇 대씩 끌고 오는 이가 있는가하면 작달막한 오토바이 한 대에 노모를 뒤에 태우고 온 비쩍 마른 청년도 있다. 청년은 그리 거래 경험이 풍부하지 않아 보인다. 하레사의 속사포 같은 말발에 제대로 대꾸조차 못하고 쩔쩔댄다. 어쩌면 상인이 아니라 어머니의 집에 놓아줄 가전제품이라도 싼 값으로 건져보려 온 마을 청년일지도 모른다.
장상무의 시선을 끈 것은 아이들을 열 명 남짓하게 태운 버스를 끌고 온 늙은 사내다. 견학이라도 온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아이들의 옷도 버스도 지나치게 남루하다. 장상무는 하레사에게 물어볼까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마른 청년과 논쟁 중이다. 장상무는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진흙바닥에 던져 끄고 일어나 버스로 다가간다. 버스를 운전해온 늙은 사내는 밖으로 나와 쪼그려 앉아있고 아이들은 버스 창에 얼굴을 붙이고 유성호의 해체를 보고 있다. 크고 검은 눈동자들이다. 그 눈들에 마그네슘 불꽃이 명멸하고 있다.
“아이들이 귀엽군요.”
장상무는 늙은 사내에게 영어로 말을 건다. 늙은 사내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영어를 할 줄 모르거나 아니면 경계하는 모양이다. 무안해진 장상무는 고개를 돌려 버스 안의 아이들을 본다. 아이 중 몇이 그와 눈을 마주친다. 오래 마주보는 아이는 없다. 여기서 좋은 옷을 입은 동양인은 북극곰만큼이나 낯선 존재다.
“미스터 장, 왜 그럽니까?”
거래가 잘 풀린 것인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하레사가 끼어들었다. 장상무가 흘낏 보자 상인들은 각자 타고 온 차량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또 아이들이 왔군요.”
“아이요? 아, 쁘라키쉬가 데려왔군요. 쁘라키쉬!”

여전히 장상무를 무시하고 있던 늙은 사내는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가온다. 하레사가 장상무를 몇 번 가리키며 빠르게 힌디어로 말하다 사내는 불쑥 손을 내민다. 장상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레사를 보자 그가 씩 웃는다.
“미스터 장을 소개했어요. 여기는 쁘라키쉬. 일하러 왔대요. 악수. 악수하제요.”
장상무는 떨떠름하게 손을 마주잡는다. 쁘라키쉬는 흔드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놓아버리곤 다시 해체장을 바라본다. 아이들의 눈은 줄곧 그들의 악수를 보고 있었다.
하레사는 빙글 빙글 웃으며 쁘라키쉬에게 서류를 내민다. 쁘라키쉬는 인상을 쓰며 받아들곤 힘겹게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하레사는 장상무에게 돌아온다. “쁘라키쉬는 좋은 사람이에요. 이번에도 일꾼들 많이 데려왔어요.”
장상무는 표정을 찌푸렸다.
“일꾼? 저 아이들 말입니까? 아이들이 할 만한 일이 아직도 있는 줄 몰랐군요.”
“배가 커서 일감이 많아요. 그래서 쁘라키쉬를 불렀어요. 선생님이었던 적이 있어서 아이들이 잘 따라와요.”
“선생이었다고요.”

선생이란 작자가 이런 곳에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인가. 그것도 일을 시키기 위해서. 하레사는 그런 작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장상무는 저번 보고 때 묵혀두었던 불쾌함이 간질간질하게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저 아이들은 무슨 일을 합니까?”
하레사의 설명은 장상무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선박은 건물과 비슷한 점이 많지만 움직여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지는 물건이다. 배에는 건물처럼 환풍구와 배선 따위가 있지만 이는 보통 건물보다 훨씬 협소한 공간에 설치된다. 이런 곳을 지나가는 전선이나 케이블은 보통 해체업자들은 회수하기 어렵다.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이런 곳으로 기어들어가 그것들을 긁어온다는 것이다. 하레사는 아주 쓸모 있다며 연신 웃었지만 장상무는 탐탁찮았다. 선박 해체는 알랭에서 알아서 도맡는 것이 관례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고용주는 H 선박회사다. 배를 폐기하는데 미성년자를 썼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다른 방법은 없냐며 따지려하는 찰나 그들 사이로 불쑥 끼어든 쁘라키쉬가 서류를 내밀었다. 하레사와의 짧은 대화 뒤에 쁘라키쉬는 버스에 손짓을 해 아이들을 내리게 했다.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 소녀들은 그저께 흐른 석유들을 훔쳐내던 아이들보다도 훨씬 어렸다. 제대로 씻지 못해 새까만 피부 위에서 흰자위만이 하얗다. 쁘라키쉬는 별 말도 없이 아이들을 모이게 하더니 해체장을 가로질러 유성호로 나아갔다. 장상무는 잠시 그 뒷모습을 흘겨보았지만 늙은 인도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배를 자르고 있어. 엄청 시끄러워. 번쩍 번쩍거리고. 틀림없이 몸에 안 좋을 거야. 요즘 석면 때문에 난리잖아? 우리나라 배는 보통 내장재로 석면 쓰거든.”
“그래요?”
“음식도 맛이 없어. 여긴 맥도날드도 없나봐.”
“네에.”
“희망이 바꿔줄 수 있어?”
“집에 없어요. 학원 갔으니까.”
“그래?”

이주일 만에 하는 아내와의 통화는 사막 내지르는 외침처럼 건조했다. 너무 넓어서 메아리도 안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장상무는 무언가 역정이라도 내보려다 포기했다. 한 것도 없는데 너무 피곤했다.
“희망이 공부 잘하라고 전해줘. 끊을게.”
“알았어요.”

전화는 아내 쪽에서 먼저 끊었다. 장상무는 신경질적으로 셔츠 앞섬을 뒤졌지만 나온 것은 빈 담뱃갑뿐이었다. 아껴 쓴다고 쓴 것이 결국 한 달도 버티질 못했다. 별 것도 아닌데 눈앞이 컴컴해지는 기분이었다.
장상무의 담배가 떨어지는 동안 유성호는 삼십만 톤에서 이십이만 톤 정도가 되었고 쁘라키쉬는 세 번 정도 아이들을 더 데려왔으며 하레사는 철까마귀들과 술자리를 두 번 가졌다. 붙임성이 좋은 하레사는 장상무에게도 몇 번 참여를 권했다. 도대체 뭐로 만든 건지도 모를 술병을 본 장상무가 질색하는 걸 본 뒤로는 그러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하레사와 해체업자들이 피우는 담배도 무엇으로 만든 건지 모를 물건이었다. 식사도 철가루가 날리는 해체장의 진흙바닥에서 맨손으로 하는 이들이다. 억세고 투박한 사내들이었다. 장상무 같은 이가 그런 식으로 산다면 한 달도 못 지나 길게 뻗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 지금처럼 담배가 없는 상황이라면 아마 일주일도 못 갈 것이 분명하다. 장상무는 때 아닌 금연을 실천할 생각은 없었다. 내일이라도 시장에 가서 담배를 구해볼 작정이었다. 하레사한테 적당이 돈을 쥐어주고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내팽개쳐 두었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아내가 다시 전화를 건 것일까. 그러나 액정에 뜬 것은 하레사의 번호였다. 전화를 펼쳐들자 장상무는 거의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진 하레사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마니푸르에서 온 핫산이 죽었다. 갈비뼈처럼 드러난 유성호의 건현을 자르다 아래의 갑판으로 추락했다. 날씨가 더워서 밧줄을 느슨하게 맸던 거 같다고, 갑판에 서있던 하레사는 그렇게 보고했다. 핫산의 시신은 누군가 가져온 방수포에 덮여있었다. 몇몇 철까마귀들이 주변에 어두운 표정으로 둘러 서 있었지만 나머지는 다시 유조선에 달라붙어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레사는 잠깐 장상무의 눈치를 보다 손짓으로 지켜보던 이들 중 몇을 불러냈다. 그들이 방수포로 핫산의 시체를 감싸고 밧줄로 동여매 운구하는 동안 장상무와 하레사는 둘 다 말이 없었다.가스 용접기에서 나오는 소음이 유난스럽게 피부를 때려대는 것 같았다. 먼저 입을 땐 건 장상무였다.
“회사에서 핫산의 가족에게 보상할 겁니다.”
하레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품을 뒤져 예전의 싸구려 담배를 꺼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장상무에게 한 개비를 건넸다. 장상무는 별말 없이 그것을 받아 입에 물었다. 하레사는 성냥을 그어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다들 그렇게 말해요. 그런데 제대로 돈 받은 사람이 없어요.”
“다들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죽은 사람들. 회사는 돈을 잘 안줘요.”
“저희는 그러지 않습니다.”

하레사는 뿌리까지 타들어간 성냥을 흔들어 끄곤 중얼거렸다.
“작년에도 삼백명이 넘게 죽었어요. 그런데 돈 받았단 사람 못 봤어요.”
장상무는 놀랐다. 선박해체가 위험한 직업이란 소리는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짐작도 못했다.
늙은 얼굴 하나가 뒤의 통로에서 드러났다. 그 뒤로는 어린 얼굴들이 옹기종기 따르고 있다. 쁘라키쉬였다. 그는 고개를 올려 하레사와 나란히 선 장상무를 보고 다시 고개를 내려 핫산의 핏자국을 본다. 쁘라키쉬의 늙은 얼굴에 새겨진 주름마다 수심이 가득했다. 그의 뒤에선 아이들의 눈이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는 방수포에 쌓인 시체를 보고 있다. 놀란 눈, 슬픈 눈, 아무것도 모르는 눈이 핫산의 시체를 본다. 쁘라키쉬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들의 시선을 차단한다. 소년과 소녀들이 다시 배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팔을 내린다. 그런 쁘라키쉬와 눈을 마주친 장상무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딱히 책망을 담아 장상무를 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시선이 마치 송곳 같다.
‘아니다.’
장상무는 심호흡을 한다. 이것은 나와 관련이 없는 일이다. 나는 그저 고용주일 뿐이다. 서울에서 회식을 하며 쇠고기를 씹는 김전무처럼 나는 이 일과 무관하다. 장상무는 그 시선에서 도망치기 위해 하레사에게 말을 건다. 상관없는 사람답게 핫산의 죽음과 전혀 관련 없는 소재로.
“담배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까? 일본 거나 한국 걸로요.”
“있소.”

하레사의 대꾸가 아니었다. 다소 어눌한 하레사의 그것과 달리 유창한 발음이었다. 놀라 고개를 돌린 장상무와 눈이 마주치자 노인이 한번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대려다 드리리다.”

상태가 좋지 않은 도로를 달려가느라 낡은 버스는 연신 헐떡거리며 배기가스를 토했다. 해체장으로 이어진 알랭 시 외곽의 도로는 해변가에 접해있어 조수석에 탄 장상무는 먼지 낀 창틀 너머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알랭 해안의 바다는 먼 과거에 본 만화 영화에 나왔던 코끼리 무덤을 연상시켰다. 해체되다 만 배들이 매머드의 상아 같은 잔해를 하늘로 치켜 올린 체 흩어져있었고 그 몸에서 흘러나온 폐유들이 해변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쁘라키쉬와 장상무를 제외하면 버스 안의 이들은 대부분 잠들어있었다. 아이들에게는 퍽 고단한 하루였을 것이다. 딱히 거절할 구실이 없어 따라오긴 했건만 장상무가 올라탄 이후로 쁘라키쉬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버스가 툴툴거리며 시내에 들어설 때까지 그랬다. 쁘라키쉬는 잠시 차를 멈추고는 잠든 아이 하나를 깨웠다. 아이의 집 앞인 모양이었다. 노인은 아이가 피곤에 전 몸을 끌고 남루한 아파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장상무는 그동안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런 것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쁘라키쉬는 시내를 돌며 아이들을 집 앞까지 데려가고 있었다. 마지막 아이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에는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영어를 잘 하셨군요.”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결국 장상무였다. 늙은 인도인은 잘 닫히지 않는 버스 문을 손으로 밀어 닫고 운전석에 도로 앉아서야 대답을 했다.
“전공이었소.”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었군.’

장상무는 생각한다.
버스가 다시 출발한다. 향하는 곳은 알랭에 단 하나 있는 큰 시장이다. 금속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부품을 종류별로 취급하는 대형 상점들도 여럿 보였다. 너저분하고 어수선하단걸 제외하면 큰 조선소의 물류창고 같았다. 드문드문 야채나 생필품 따윌 팔고 있는 좌판들이 눈에 띄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탓인지 상인들이 다 떨어진 갓을 단 백열등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불을 밝혀도 밤은 빠르게 기어와 시장을 삼킨다.
“중국인이오? 아니면 일본인인가?”
쁘라키쉬가 물었다. 장상무는 익숙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픽 웃었다.
“한국 사람입니다.”
“배가 크더군.”
“유조선이니까요. 사고를 안냈으면 몇 년은 더 썼을 겁니다.”
“무슨 일을 냈나?”
“어선을 들이박았습니다. 좌초는 덤이고.”

쁘라키쉬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 침묵이 돌아왔다. 버스가 좁은 골목을 힘겹게 돌았을 때 그가 다시 말했다.
“몇 년 더 쓸 물건이 아니던데. 몰랐던 모양이군.”
무슨 소리일까. 장상무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입니까?”
“오늘 하층에 들어가서 봤소. 배의 건현들이 죄다 휘었소. 엔진 실은 아예 내려앉았더군. 보진 않았지만 아마 축도 휘었을 게야. 그것도 몇 년은 되었겠더군. 못 쓸 놈을 계속 굴렸던 게 뻔히 보여.”
“아니 그럼 그게….”
“폐기해야 할 배를 한참이나 더 억지로 굴리다가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야 수습하려고 급히 해체한 거요. 여기서 일하다 보면 자주 보는 일이지.”

문득 인도로 출발하기 전에 지나가듯 본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사건이 터지면 늘 뒤따라 나오는 흔해빠진 음모론이었다. 유성호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어선을 들이받은 이유는, 어선이 신호를 무시했고 새벽 바다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체가 뒤틀린 선박은 조타가 늦게 먹힌다. 타륜을 돌려도 배가 회전을 따라가지 못한다. 무게 중심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순식간에 전복된다.
장상무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자국에서도 할 수 있는 해체를 먼 인도로 보낸 것도, 거기에 장상무라는 내막도 모르는 마케팅 부서의 인물을 보낸 것도 이제 이해가 되었다.
장상무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버스를 몰던 쁘라키쉬는 어느 좌판 앞에서 버스를 멈추었다. 시가레타, 시가레타를 반복하는 걸 들어보니 담배도 취급하는 모양이다. 쁘라키쉬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뭐라 말하는 동안 장상무는 입술을 씹으며 고민했다. 이제 와서 해체를 중단하면 회사가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게 유성호 자체의 문제라고 해도 회사에서 신경 쓸 리 없다. 계약금과 공사 일정은 이미 알랭에게 전달되었다.
“하레사도 아마 알고 있었을 거요. 그도 전문가니까.”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겠지. 해체가 중단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우린 돈을 못 받을 테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쁘라키쉬는 대꾸하는 대신 그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없어서 안달을 하던 물건이지만 장상무는 전혀 뜯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쁘라카쉬는 먼 곳을 보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선생을 그만 둔지 아시오?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아서였소. 묻자하니 학교에 올 돈이 없다더군. 우리 아이들은 굶어가며 학교에 오느니 철까마귀들이 흘린 걸 주워 먹는 게 낫다는 걸 배웠지. 그래서 난 선생질을 그만 뒀소. 입에 음식을 넣어주지도 못하는데 머리에 가르침을 담아줄 수 있는 선생은 없소.”
“그랬군요.”
“여기 사람들은 일찍 죽지. 석면을 맨손으로 뜯어내고 철가루를 들이마시니까 당연해. 다들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폐가 망가진다오. 특히 당신들 같은 부자 나라에서 온 배를 해체하다 많이들 죽는다오.”

쁘라키쉬는 그다지 원망이 담긴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담담했다.
“선진국에서는 요즘 배를 많이들 처분하지. 기름 값이 비싸져서 그렇다나.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거야. 그래서 죽는 사람은 더 많아졌지. 당신들은 자기 나라에서 해체하기 꺼림칙한 것들을 우리한테 보내니까. 지난번에는 화학 탱크가 실린 배를 해체하다 다섯 명이 질식했소. 나는 그 배엔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았어. 불길했거든.”
“하지만 유성호에는 데려오셨잖습니까.”
“요세 그 아이들은 하루에 한 끼도 못 먹고 있었소. 어느 누가 그걸 무시할 수 있겠소? 하지만 이제 더는 안 돼. 나는 이제 그 배가 어떤 상태인지 알았으니까. 지금이야 멀쩡하지만 해체가 더 진행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오. 이제 내 아이들을 거기 데려갈 일은 없을 거요.”
“나는 몰랐습니다.”
“이제는 알지.”

장상무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랭에서 왜 사람이 죽는지. 안다는 것은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쁘라키쉬도 입을 다물었다. 장상무를 숙박소 앞에 내려줄 때까지.
“나는 몹쓸 인간이요. 그래도 위선자는 아니오. 나는 아이들이 굶는 걸 모른 체하고 계속 선생질을 할 수도 있었소. 대신 나는 아이들에게 일거리를 가져다주기로 했지. 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오. 안다는 것은 행동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지. 브라흐마가 자신이 외롭다는 걸 알게 되자 세상을 만든 것처럼.”
장상무는 알랭의 밤에 삼켜 사라지는 버스의 미등을 한참 바라보았다. 전화기를 펴든 그였지만, 끝내 그는 김전무에게 결국 전화를 걸지 않았다. 쇠고기를 씹어대는 김전무처럼 장상무는 알랭과 무관해지고 싶었다. 그는 힘겹게 휴대전화를 접었다. 나는 그저 고용주일 뿐이다. 일 년에 삼백 명이 죽는 철까마귀들과 무관하다. 당장 내려앉을지 모르는 유조선 안을 기어다니는 아이들과도 무관하다. 나는 브라흐마가 아니라 그냥 장상무다.

유성호의 해체가 시작 된지 한 달 째 아침에 그 일은 일어났다. 이제 유성호는 삼십만 톤에서 십칠만 톤이 되어있었다. 외피의 대부분이 뜯겨져나간 유조선엔 처음 시작할 때보다 더 많은 해체업자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하레사는 여전히 바쁘게 상인들과 교섭했고 쁘라키쉬는 장상무와의 밤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장상무는 여전히 행동하는 브라흐마가 되고 싶지 않았고 알랭을 바쁘게 위장 안에 들어온 선박들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장상무가 햇빛을 피하려 자재들을 쌓아두던 천막 아래에 걸터앉아 있을 때였다. 굉음과 함께 유성호의 한쪽 옆구리가 허물어졌다. 해체를 시작하기 전부터 스스로를 분해상태로 몰아넣고 있던 격벽들이 결국 중력에 백기를 들었다. 쇠가 지르는 비명이 장상무에 뇌리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새겼다. 근처에 있던 해체업자들이 비명을 지르자 쇳조각 섞인 광풍이 날아와 그들을 후려쳤다. 유성호의 상갑판이 무너져 하갑판을 덮치는데 고작 3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3초 동안 스물세 명이 죽었고 백 명이 넘는 결손 가정이 생겼고 열 명이 팔다리를 잃었으며 한 명의 소년이 짓뭉개졌다. 쁘라키쉬가 버스를 태워주지 않자 앙상한 두 다리로 해체장까지 걸어와 유성호의 뱃속을 뒤지던 소년이었다. 장상무는 그 소년의 얼굴을 안다. 모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어제도, 그저께도 계속 소년의 모습을 보아왔던 것이다. 건장한 철까마귀 사이에서 내일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듯 바쁘게 뛰어다니는 조그마한 소년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다.
하레사는 발 빠르게 행동했다. 그는 사고 현장을 피한 철까마귀들을 급히 모아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시 외곽에 있는 소방서에도 연락을 걸었다. 소방차보다도 쁘라키쉬의 낡은 버스가 빨리 도착했다. 비번이었던 해체업자들이나 몇 번 봐서 눈에 익은 상인들이 타고 있다. 그 중에는 노모를 모신 오토바이를 타고 왔던 청년도 있다. 구조 현장은 어떻게 보면 평소의 해체장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모두가 배에 달라붙어 가스 용접기로 마그네슘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다만 거기에는 스물 세 명의 시신과 한 명의 뭉개진 아이가 있을 뿐이다.
장상무는 유성호의 옆구리가 무너졌을 때 이후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상무의 눈은 비틀거리며 잔해 사이를 걷는 늙은 노인에게 박혀있다. 쁘라키쉬는 잔해 사이로 삐져나온 어린 팔뚝과 손을 발견하고 무릎을 꿇는다. 입에서 나오는 건 쇳가루를 토하는 것 같은 절규다.

유성호의 붕괴가 그럭저럭 수습된 건 사흘이 지난 뒤였다. 장상무는 초췌한 얼굴로 앉아있는 하레사에게 처음으로 물었다.
“배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하레사는 지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담배를 찾으려 셔츠 앞섬을 뒤지자 장상무가 자신의 것을 내밀었다. 하레사는 깨끗한 흰색의 담배를 문다.
“쁘라키쉬가 얘들을 데려오지 않은 이유가 그겁니까.”
“괜찮을 줄 알았어요, 미스터 장. 이런 일은 여러 번 했으니까.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어요. 다 나 때문입니다. 미스터 장한테 이런 일은 못 맡는다고 했어야 했어요. 그래도 우리 돈 너무 없어요. 일거리를 가릴 형편이 아니에요.”
“…해체를 중단하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회사한테 연락을 해봐야 하겠죠.”

하레사는 불도 붙이지 않는 담배를 잘근 잘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상무는 뭐라고 위로를 하려다가 그것이 소름끼치는 위선이 될 것이란 걸 깨닫고는 그만두었다. 장상무는 뒤로 돌아 떠나려다가 머뭇거리는 태도로 물었다.
“핫산은 어떻게 됐습니까. 보상이 나왔나요.”
하레사는 여전히 얼굴을 숙인 체로 고개를 흔들었다. 철까마귀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개새끼야. 장상무가 사고 소식을 보고했을 때 김전무의 첫마디였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느냐. 마치 장상무가 직접 손바닥으로 유성호의 옆구리를 밀어 넘어뜨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김전무에겐 유성호가 해체를 시작하기 전에도, 부산 앞바다에 엎어지기 전에도 한참 전에 이미 못쓸 물건이었단 사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몇 명이나 죽었는데?!”
“…스물 세 명입니다. 사고 전에도 추락한 사람이 한명 있습니다. 보고 드렸을 텐데 아직도 보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상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냐? 아직도 기자들이 사고 왜 일어난 거냐고 지랄 떠는 중인데 이거 알려져 봐. 우리 다 좆되는거야. 너 누구 감방 가는 꼬락서니보고 싶냐?”
“그래서 지금 어쩌라는….”
“계약서 있지? 그거 빨리 다 걷어. 인도 놈들한테 준거까지 다 해서 얼른 다 걷어와. 그리고 해체업자들 명단도 다 가져와. 국제 변호사한테 갖다 줘야하니까 얼른. 이거 빨리 묻는다. 묻어버려야 해. 내일이라도 당장 귀국해. 너 거기서 일한 적 없는 거야. 인도 놈들끼리 멋대로 사고 낸 걸로 해.”
“무슨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사람이 한둘 죽은 줄 아십니까?”
김전무는 쌍소리를 내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장상무는 휴대전화를 벽에다 집어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는 싸구려 침대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참 뒤에 김전무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진정도 되고 잠도 좀 깬 것인지 그의 어투는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닌 거 다 안다. 인도인들이 죽은 것도 참 유감스런 일이다. 그런데 어쩌겠냐. 그들에게 보상을 주면 회사는 끝장이다. 돈이 아깝다는 게 아니다. 배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인정해버리는 꼴이란 말이다. 우리 살자. 다 같이 살자. 한번만 넘어가자. 알고 그런 게 아니지 않느냐?
‘나는 알고 저질렀습니다. 나는 방관했습니다. 방관은 주도보다도 끔찍한 죄입니다.’
장상무는 끝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는 알았다는 말로 김전무를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창문으로 보이는 폐유 같은 야경을 노려보았다. 장상무는 내일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았다. 그는 김전무가 시킨 대로 계약서를 들고 서울행 비행기를 탈 것이다. 그것들을 소송을 담당할 변호사에게 넘겨버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사막 같은 가정으로 돌아가 아내와 딸을 베두인 족처럼 돌보는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레사도, 쁘라키쉬도, 철까마귀들도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그에겐 직업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가족이 있었다. 그에겐 더할 나위없는 정당성만이 있다…. 장상무는 담뱃갑을 연다. 구하기 힘들었던 담배. 인도를 떠나면 길가에 있는 편의점에서도 구하기 쉬워질 담배. 그 담배를 누가 주었던가.
안다는 것은 행동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지.
장상무는 벌떡 일어서 눈을 사방으로 돌렸다. 그러나 깊은 주름마다 수심을 새긴 쁘라키쉬는 그곳에 없었다. 장상무는 다시 앉지 않았다. 잠시 서 있던 그는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곤 옷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끈적거리는 어둠이 그를 휘감아 다시 숙소로 밀어 넣으려 애쓰지만 장상무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뉴델리는 한 달 전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고 효율적이었다. 조금 있으면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장상무는 서류가방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곤 시계를 보았다. 11시간의 비행 끝에 한국에 도착하면 그곳은 새벽일 것이다.
김전무가 연락을 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나흘 전에 휴대전화를 던져버린 후로 그것을 다시 들지 않았다. 장상무가 알랭에 남기고 온 유일한 물건인 그것은 지금쯤 숙소의 바닥에서 쇳가루 섞인 알랭의 먼지를 곱게 뒤집어쓰고 있을 것이다.
장상무의 서류가방에는 김전무가 원한 계약서가 들어있지 않다. 그 곳에 있는 것은 누르스름하고 곳곳에 기름을 먹은 설계도 한 장이다. 장상무가 알랭에 왔을 때 하레사에게 건네 준 유성호의 설계도다. 얼마나 여러 번 들춰보았는지 가장자리가 날캉날캉하다. 그 설계도 위로는 지난 나흘 내내 하레사와 장상무가 찍은 붕괴 부위의 사진이 붙어있다. 설계도 곳곳에는 매직펜으로 붕괴 부위와 상황을 상세하게 적어 놨다. 죽은 스물 네 명의 철까마귀와 한명의 아이의 이름도 적혀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청년이 건네준 낡은 녹음기에 담긴 해체업자들의 증언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도 들어있다. 거기엔 울먹거리는 목소리와 분노에 찬 목소리가 담겨있다. 철까마귀들의 쇳소리 섞인 노래다.
장상무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누르스름한 설계도와, 유성호의 비밀이 담긴 사진과, 철까마귀들의 노래를 전 세상에 들려줄 것이다. 장상무는 알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악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악의 공범자다. 장상무는 공범자가 되는 대신 행동하기로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겨우 한명의 사원과, 먼 이국에서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외치는 노동자들의 증언이 거대한 선박 회사에게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장상무는 그 불확실함에 신경 쓰지 않았다.
문득 담배 생각이 났다. 그는 쁘라키쉬가 사주었던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져본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생각해보니 그는 그 구하기 힘들었던 담배를 떠나기 전 하레사에게 주어버렸었다. 새하얀 담배를 받아 들은 하레사는 오랜만에 웃었다. 온몸이 새까맣고 녹슨 것 같은 조그만 몸뚱이에서 치아만큼은 손에든 담배만큼이나 하얗다.
뉴델리 공항이 바로 앞이었다. 곧 내려야 할 것이다. 그는 내리기에 앞서 낡은 녹음기를 꺼낸다. 마치 알랭처럼 지저분하고 흠집투성이인 녹음기를 운전석에 내민다. 장상무를 공항까지 데려온 쁘라키쉬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부서진 몸을 안고 울며 돌아가던 노인. 그러나 그는 증언은 따로 하지 않았다. 장상무는 슬쩍 웃으며 녹음기를 한번 흔들었다. 쁘라키쉬는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늙은 철까마귀의 노래가 알랭을 닮은 녹음기에 담긴다.

“당신은 이제 우리를 압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당신은 이제 압니다. 그걸 알아주시오. 당신은 이제 우리를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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