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병문화상 우수] "문디자슥"의 역설을 넘어서
[한센병문화상 우수] "문디자슥"의 역설을 넘어서
  • 김유수(종교∙2)
  • 승인 2016.11.29 20:36
  • 호수 2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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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경상도 사투리인 ‘문디자슥’(문둔 병자의 자식)이란 말은 욕설이라기보다 친근한 간투사로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말 중에 한센병을 지칭하는 그 말보다 더 부정적이 말이 있을까싶다. 사실 병에 걸린 신체를 지칭하는 말부터가 심한 욕설이다. 그런데 그 대상 뒤에 자식, 새끼라는 단어를 붙여 세대를 넘기어 거듭 욕하니 병들 중에서도 참으로 고단하고, 또 외적으로도 두드러지는 한센병은 오죽했을까?

얼마 전 한 공중파 시사프로그램에서 소록도 한센병자들의 뼈아픈 역사를 다뤘다. 전남 고흥 소록도에 있는 수용소는 명목상 한반도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지어진 근대 치료시설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수용의 목적이 더 주요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이 수용소에서 한센병 환자들에게 행해진 일본 정부와 우리 정부의 인권유린과 폭력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우생학적 이유라며 환자들의 정관을 절단하고 자궁을 적출했다. 강제로 낙태된 아이를 유리병에 담아 경고와 공포의 표상으로 만들었다. 프로그램은 잔인한 B급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충격적 사진을 보여주며 많은 증언들로 과거를 추적해 나갔다. 그리고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과 그들의 자식들의 깊은 상처를 되짚으며 과거 공권력의 잘못된 폭력에 대한 현재 공권력의 책임을 강조했다.

과거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폭압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보상했다. 하지만 현재 우리 공권력의 법률 대표는 방송에서 환자들의 진술이 착각과 과장이라 말했다. 일제시대 일본에 의한 행위를 광복 이후로 착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환자들이 당한 인권유린은 한국 정부와 관련이 없다“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수집된 수많은 증언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참 차분하고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일본” 정부와 대조되는 “우리” 정부 법률대표의 말은 차갑고 비정했다. 이러니 방송 후 많은 이들이 공분했다. 그들이 “착각”이라고 선 그은 한센병 환자들의 증언 속 강제적 낙태, 노동착취, 폭언, 폭행, 감금의 물리적 폭력은 치가 떨릴 만큼 잔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부분 보다 내게 그것들보다 더 잔인하게 비쳤던 부분은 한센병자들과 그 자식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었다.

한센병은 후손에게 유전되지 않으며, 사실 전염성도 그리 높지 않다. 또 무엇보다 한센병은 불치병이 아니라, 치료가 가능한 병이다. 그래서 병에서 완치 된 환자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과학적으로 사회생활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낙인이 되어버린 흉터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손가락질을 받았다. 더욱이 사회는 그 손가락질을 “문디자슥”들에게도 그대로 유전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한센병자의 자녀들을 미감아, 즉 아직 감염은 되지 않은 아이라 불렀다. 그러니 사회의 그 무서운 낙인과 손가락질에 한센병자들의 자녀의 대부분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는 사회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많은 아이들이 다른 땅으로 입양을 가게 되었고, 또 많은 아이들이 이 땅에서는 부모 있는 고아로 살아왔다. 그래서 죄 없이 죄인 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며 살아왔고, 그 아이들은 헤아리기 힘든 괴로움과 외로움의 세월로 자랐다. 그들의 그 한스러운 세월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내게 더욱더 슬프고 괴로웠던 점은 그 낙인을 찍은 주체가 이번엔 비단 거대 공권력뿐만 아니라 장삼이사의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우리가, 왜 그리 모질게 한센병 환자들과 자녀들을 손가락질 해왔는지 “정확한”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의 시점에선 과학적 몰이해를 가장 큰 이유로 보고 있다. 하지만 사실 사회에 큰 해가 없음에도, 다르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집착적인 탄압이 아직까지도 이 사회에 면면히 유전되고 있는 것을 보면 과학적 몰이해를 이 과거의 하나의 부가적인 요인으로 볼 순 있어도 주된 요인으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리고 그래서는 결코 안 될 것 같다.

교황 바오로 2세는 “과학은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잘못된 믿음(종교)을 정화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분명 오랫동안 전해질 깊은 울림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성과 합리성의 정수로 보이는 과학은 그 자체의 힘만으로 사회를 정화하기에는 너무나 도구적이다. 예컨대 근대에 흑인은 대부분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때에 흑인이 인종적으로 멍청하고, 더럽고, 병을 옮긴다는 주장을 뒷받침 해주던 당시의 과학적 주장은 옳았다. 또 한때 나치는 과학적 우생론을 바탕으로 집시, 유대인은 인종적으로 열등하며, 장애인과 병자들도 생물학적으로 열등하기에 자연에서 곧 멸절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인류사의 획을 그은 학살을 자행했다. 근대성을 맹신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과학적 이성과 합리성이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폭압하는 도구로 사용된 위와 같은 사례가 역사엔 너무도 많다. 그러니 도구적인 과학에 대한 무지만을 한센인 병자들에 대한 그 무지막지한 폭력의 원인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모든 것을 그 도구의 탓으로 돌린다면, 그 도구는 또 다른 몰이해의 동력이 되어 비극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다른 면에서 그 과거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자면, 많은 인간사회에서 특정 집단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것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포착하고, 범주화하여 구분한다. 그리고 울타리 밖으로 이질적 존재를 배척한다. 울타리 안에서 집단의식에 취하면 집단의 결속력은 행위의 논리적 당위가 된다. 그래서 배타행위를 행사함에도 과정상에 죄책감도 크게 느끼지 않는다. 또한 다수의 사람들이 똑같이 행동해 주고 동조해 준다면 집단 내 개개인에게 합리적 이성이 발휘될 여지는 아주 좁아지게 된다. 그래서 과거 나치나 현재 여러 나라들의 극단적 성향의 사람들의 비이성적 행동과 증언을 보건데, 이 늪에 깊이 빠지면 이성적으론 분명한 사실조차 고려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배타의 기준을 선정함에 있어 그 기준들은 합리적인 조건이 필요 없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 하나만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면 된다. 그래서 지역과 언어, 인종과 종교 등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이 무서운 배타의 기준이 되는 상황을 우리는 아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성별과 장애, 질병마저도 이러한 배척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납득하기 힘들 만큼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극히 무선적이고, 보편적이어서 우리 모두 동등하게 언젠가 그 특징에 해당될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될 수 있으며, 누구든 극심한 병에 걸릴 수도 있다. 성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현재 눈에 보이는 당장의 상태만을 기준으로 미래의 자신에게 해당 될 수도 있는 특질들을 배척의 동력으로 이용하는 것은 분명 자멸적이다. 하지만 우리를 자멸로 이끄는 이 독한 병은 발병과 변이가 잦고 직효약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작금의 전 세계에서는 다르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배척이 만연하고, 그에 반작용인 테러리즘이 횡행하며 또 그에 반작용인 증오가 가득하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에선 성별혐오 커뮤니티가 뜨겁게 싸운다. 어떤 이들은 5.18과 세월호 희생자들의 상처 위에 불을 지펴 증오의 의식을 치른다. 다들 서로 입장만을 이야기하며,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정의롭고 명백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증오를 퍼붓는다. 그렇게 증오와 악의 고리는 끝없이 회전하고 있다. 한센병보다도 더 지독한 이 배타와 증오의 병은 인류와 우리사회를 썩히고, 좀먹고 있다. 자멸의 구렁텅이로 이끌고 있다.

내가 이러한 모습을 강조함은 비극적 과거와 그것이 반복되는 현실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자는 것이 아니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가는 우리의 절망적인 역사를 비탄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 인류의 진보를 “믿고”있다. 이는 비단 기술과 과학의 발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막연하게나마 나와 많은 이들이 자유와 사랑을 누리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이 꿈의 그 교차점에서 인류는 불의에 공분하고 합의를 거치고 우리 사회의 거대담론을 이야기하여 법과 제도를 세워 왔다. 그래서 우리의 진보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차점을 만들기 위한 이해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나와 우리의 생각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그 불안한 상태로 끊임없이 이해를 시도하는 태도이다. 어떠한 사건과 상황에서건 이러한 이해가 결여되면 공분은 소모적인 투쟁으로만 끝이 난다. 그래서 힘든 투쟁 이후에도 다시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마련이다.

한센병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과거 태도는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그래서 이 사회에 사는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미안함과 불편함을 느낀다. 이에 우리는 과거의 공권력을 욕하고, 과거 사회를 비난하면서 불편감을 끝내버리려 한다. 하지만 이 불편감을 지엽적인 요소의 탓으로 돌리고 논의를 끝내 외면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비극적인 과거를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아픈 사건들을 찬찬히 여러 방식으로 돌아보고 지금을 살펴봐서 과거의 상처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문디자슥’이라 손가락질 했던 부끄러운 과거의 역설을 넘어서는 첫 걸음이다. 이것은 하나의 의무이며 이 의무는 과거 우리 사회로부터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최소한의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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