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강요당했던 4∙3의 진상
침묵을 강요당했던 4∙3의 진상
  • 오명진 기자
  • 승인 2017.03.29 08:09
  • 호수 2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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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은 미군정 시기였다. 해방은 되었으나 친일파 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친일파가 반공을 내세워 횡포를 부리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미군정의 강제 쌀 공출이 실시되자 제주도의 민심은 폭발했다. 일제잔재교육, 파시즘교육, 양과자수입반대투쟁 등의 저항운동이 펼쳐졌던 것이다.

 1947년 3월 1일, 3만 여명의 제주도민은 3∙1절을 맞이해 제주북국민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에서 기념대회를 열었다. 대회가 끝난 뒤 행진이 이어졌는데, 이때 어린 아이가 기마경찰의 말에 깔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없자 군중은 분노하였고, 응원경찰은 분노한 군중에게 발포했다. 민간인 6명이 사망하였고, 8명이 부상당하기에 이르렀다. 제주도민들은 발포에 대한 항의로 민관 총파업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미군정은 이를‘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선동’에 의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군정수뇌부를 외지인(􂺰제주 출신)으로 교체하는 한편, 육지경찰과 서북청년단을 파견하여 파업 주모자 검거 작전을 시행했다.

 이에 맞서 벌어진 사건이 4∙3이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에 붉은 봉화가 타올랐다. 이들은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으며,‘탄압중지, 단독선거 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사실 4∙3 초기 상황 수습이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8년 4월 28일 제 9연대 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남로당 무장대 대장 김달삼의 평화협상이 추진되었던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미군정과 군 고위직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결렬되고 말았다. 회담을 추진했던 김익렬 중령은 결국 해임되었다.

 미군정과 빨치산의 대립이 유지되던 가운데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이 제주도에 파견되었고, 5ㆍ10선거가 치러졌다.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실시됐는데, 제주도에서는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의 투표수가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다. 이는 남한 내 유일한 선거 거부였다. 이로 인해 정부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며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개시해 나갔다. 예컨대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1948년 10월 17일 발표한 후,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마을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강제 이주시키는 명령을 내린 바가 있다. 이후 진압군은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중산간 지대를 초토화시키기 시작했으며, 중산 간 마을 95% 이상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집단 살상했다. 해안 마을의 주민들은‘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진압대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죽기도 하였다.

 1949년 3월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었고, 이로부터 마무리 진압과 회유 작전이 병용전개됐다. 한라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상대로‘귀순 시 사면’정책이 발표된 것이 이때였다. 4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의 방문 후 제주도에서는 5월 10일 재선거가 치러졌으며, 6월 남로당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고 무장대는 궤멸되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예비 검속’을 명분으로 제주도민들이 다수 희생되었고, 전국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4∙3 관련자들 또한 즉결처분됐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끔찍한 사건은 막을 내리게 된다.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는 약 30만 명이었는데, 4∙ 3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2만 5천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4∙3에 관한 논의는 군사정권 하에서 금기시되었고, 1979년 현기영이 4∙3을 다룬 소설집 <순이 삼촌>을 펴냈다가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4∙3에 관한 논의가 조금씩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2000년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ㆍ공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3년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기도 하였다. 2005년 당시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함께 제주도는‘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4∙3 평화기념관, 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 2017년, 4∙3은 69주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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