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게 맞아?
[칼럼] 이게 맞아?
  • 오하은 수습기자
  • 승인 2022.06.1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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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누어진 칼끝을 보고도 모른 척 눈길을 돌리는 사람들, 간호사 태움 문제에 대하여

일 하다 보면 진짜 이상한 사람 많이 만나.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더라.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의 수다가 길어지다 보면 빠지지 않고 꼭 나오는 이야기이다.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며 일탈에도 마지노선이 있던 때와 달리 사회 속 상식 밖의 행동들은 경악스러울 지경일 때가 많다. 중재해줄 대상이 부재하다는 것이 상황을 악화시킨다. 분명히 옳지 않아 보이는 일을 목격했음에도 나부터 살고 봐야지의 마인드로 외면해버린다. 모두가 변화를 원하면서도 마땅한 해결 없이 유지되어온 사회의 고질적 문제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2018년도 고 박선욱, 서지윤 간호사에 이어 작년 말 을지대병원 신입 간호사까지 매년 태움으로 인한 자살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지 못했던 크고 작은 태움 경험담들은 병원에 입사하기 전 SN* 시절부터 소문이 무성하다.

*SN: Student Nurse의 약자로 간호대 학생을 뜻함

 

태움이란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간호사계 은어로,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단어의 정의부터가 참 악하다. 이런 단어가 신입 간호사 교육을 의미하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한스럽다. 이미 관습으로 굳어버린 태움 문화는 철저한 병원 내 질서 유지를 위해 이어져온 일종의 불문율이자 암묵적 담합이다. 병원은 실수 없는 진료와 간호를 위해 불가피한 교육이라고 변명하지만, 지금의 태움은 쌓인 업무 스트레스를 쏟아내는 창구일 뿐이요, 갑질을 겸한 똥군기일 뿐이다.

 

간호사들은 과도한 업무량과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태움의 원인으로 꼽는다. 지난 2019년 고용노동부에서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간호사 이직률은 15.2%로 타 산업군 이직률에 비해 3배 이상이다. 열악한 근무 조건과 높은 노동 강도, 낮은 임금 수준 그리고 경직된 직장 문화와 인간 관계가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2018년 태움으로 인한 간호사 자살 사건이 산업재해로 인정되면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과 간호법 제정 등의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이직률과 자살률의 감소와 같은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 제도적인 규제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입이 쓰다. 우리는 병원 조직 내 각 일원으로부터 태움 문화의 중단을 위한 그 어떤 윤리적인 결단과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인가? 관계적인 문제의 해결도 제도적인 규제에 기대야만 가능한 것인가?

 

가난에 지친 부모가 귀가 후 하루의 스트레스를 자식에게 풀어놓는 가정을 상정해보자. 그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어 부모의 스트레스를 경감하고 결과적으로 자녀가 가정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해서 그 가정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가정폭력의 단절은 부모가 스스로 폭력 행위에 가책을 느끼고 변화를 도모해야만이 가능해진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매일을 중노동에 시달려도 자녀를 사랑해야 되는 거라고, 개인적인 스트레스 풀이 대상으로 여기면 안되는 거라고, 스스로 깨닫고 행동을 고치게 하는 것이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에 우선해야 한다. 가시적이지 않은 사람 사이 관계에 관한 문제일수록 법적인 규제보다 도덕적인 각성이 문제 뿌리의 변화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조직 내 한 개인의 ‘선한 분노’이다. 건전한 공동체 환경으로의 진전을 저해하는 대표적 원인은,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태움을 외면하기로 결정한 동료의 선택이다. 학창 시절 누군가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으면 개인적으로 맺어온 관계와 무관하게 물타기 하듯 괴롭힘에 동참하던 것의 연장이다. 벼랑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걸 보면서도 내버려두는 것이니, 방관이요 암묵적 살인이다. 벼랑 끝에서 밀지 않았다고 해서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다. 타인의 불행에 책임감을 느끼고 뻔히 자행되는 부조리에 대해 각성해야 한다. 결국 같은 공동체 구성원이기에 나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문제라 할 수도 없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해줄 사람이 있어야 뭐라도 변화가 가능해진다.

 

악습은 대물림된다. 절대로 엄마 아빠 같이 살지 않을 거라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성장한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을 학습하고 따라 하게 된다. 병원 내 강압적인 상명하복의 질서도 마찬가지이다. 관계의 기본인 역지사지가 더욱 절실히 필요한 이유이다. 이들은 분명히 약자의 입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세를 따라 관습적인 교육 방식을 택한다. 태움 대상자에게 특별한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유난히 화가 많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변화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병원은 수십년간 집단적 반인권 행위를 일삼아 온 것이다.

 

이에 더해 태움 대상자는 본인이 을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르치고 있는 저 사람이 갑이고 배우고 있는 내가 을이라는 생각부터 끊어내야 한다. 태움 문화 속에서 이 생각이 특별히 더 위험한 이유는, 을의 위치에 있던 신규 간호사가 언제까지나 신입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을 때에 갑질을 하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우고 있는 지금 을의 자리를 자처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도 평등한 위치에서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대화에 임해야 상대도 그 속에 내재된 동등함을 느끼고 배운다. 합당한 가르침이 아닌 감정적인 히스테리에 겁먹고 떨 것 없다. 그들이 변할 생각이 없다면 내가 변해야지 어쩌겠는가.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간호대학생들은 전문직 간호사로 발돋움하기 전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거행한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촛불을 들고 상기된 얼굴로 약속했던 조항이다. 병원 내에서 일을 하는 동안 환자를 만나는 만큼 수많은 의료진들과 소통하게 된다. 더 많은 시간 더 가까이 함께하는 만큼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대화에 임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의 범위에 함께 일하는 동료의 생명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한다. 어두컴컴한 무대 위 작은 조명 하나는 사물을 분간케 하고 작은 조명 여러 개가 모이면 백 미터 밖 관중에게도 빛을 비춘다. 한 사람이 낸 목소리가 수백명을 변하게 한다. 결국 조직을 기존의 문화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각 개인의 태도와 선택이다. 매일 아침 병원으로 향하는 걸음을 가볍게 하는 것은 조직 내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용기들로 말미암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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