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돌봄청년, 아빠의 아빠가 되다
가족돌봄청년, 아빠의 아빠가 되다
  • 강수빈 기자
  • 승인 2023.08.04 0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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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버지의 삶을 관리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희생이나 배제 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가족돌봄청년 조기현 작가는 자신의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에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돌봄 위기 사회를 넘어 돌봄 사회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1992년생 조기현 작가는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의 대표로, <아빠의 아빠가 됐다>와 <새파란 돌봄> 등 가족 돌봄에 관한 책을 썼다. 2011년부터 아버지를 돌본 가족돌봄청년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조 작가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건설 현장에서 쓰러졌고, 초로기 치매를 앓게 됐다. 인터넷 강의 촬영, 대형 쇼핑몰 시설 관리, 건설 현장 노동자로 일하며 작가와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던 조 작가는 한순간에 ‘아빠의 아빠’가 된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를 보호자, 대리자, 부양 의무자, 가장으로 받아들였고 때로는 연민과 칭찬을 담아 효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2021년, 대구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50대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20대 청년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아버지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족돌봄청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원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2022년 2월 보건복지부는 ‘가족돌봄청년(영 케어러) 지원대책 수립 방안’을 발표했고, 이후 가족돌봄청년을 지원하기 위한 법안과 조례안이 계속 발의돼 왔다.

 

이미 영국은 ‘아동 및 가족법(Children and Families Act 2014)’으로, 호주는 ‘케어러 인정법(Carer Recognition Act 2010)’으로 영 케어러(young carer)를 규정하고 있다. 2단계 ‘선진수준 국가’에 속하는 영국은 영 케어러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이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다양한 지원 체계를 안내한다. 영국의 영 케어러는 지원 기관인 ‘Carers Trust’를 통해 △1:1 지원 △다양한 정보 및 조언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 등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호주는 영 케어러를 위한 온라인 플랫폼 ‘Carer GateWay’와 ‘Young Carers Network’를 운영해 △자조 모임 △상담 △온라인 교육 △긴급 지원 등을 제공한다. 이 외에도 해외에서는 수당 및 보조금을 지원하거나 학교와 협력하는 등 영 케어러를 위해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가족돌봄청년에 대한 정의조차 내려지지 않아 정책적 지원이 부족한 실정이다. 국회입법조사처의 ‘해외 영 케어러 지원 제도와 시사점’에 따르면, 이들에 대한 인식 및 정책 대응의 국가별 수준을 1~7단계로 구분했을 때 우리나라는 7단계인 ‘무반응 국가’ 그룹에 속한다.

 

지난 4월 26일, 보건복지부는 ‘2022년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의 결과를 공시했다. 가족돌봄청년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실시한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가족돌봄청년의 주당 평균 돌봄 시간은 21.6시간이며, 주돌봄자의 경우 32.8시간이다. 이들은 △가사 △함께 시간 보내기 △병원 동행·약 챙기기 △자기 관리 돕기 △이동 돕기 등의 돌봄 활동을 수행한다. 가족돌봄청년은 일반 청년보다 삶의 만족도가 낮고, 미래를 계획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답했다. 우울감 유병률 역시 61.5%로, 일반 청년보다 7배 이상이나 높게 나타났다. 주돌봄자로서 가족을 돌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을 뿐만 아니라, 생계비나 의료비 등 경제적 부담까지 지고 있는 것이다.

 

가족돌봄청년의 복합적 복지 요구를 반영해 보건복지부는 지난 5일 ‘일상돌봄 서비스 사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본 문서에서는 가족돌봄청년을 질병(중증질환)·장애·정신질환 등을 앓고 있는 가족을 돌보거나 그로 인해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만 13~34세의 청년으로 정의한다. 가족돌봄청년은 이달부터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기본(재가 돌봄 및 가사 서비스) ▲특화 서비스(지역 상황 및 수요자 맞춤형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보건복지부는 “그동안 돌봄 차원에서 소외되어 온 가족돌봄청년에게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모든 국민이 사회서비스의 고도화와 일상돌봄으로 필요한 서비스를 받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가족돌봄청년 조기현 작가는 돌봄을 받고 돌봄을 주는 일상이 우리 삶의 필수 요소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는 가족돌봄청년을 효자나 효녀로 칭하며 그들의 희생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돌봄’을 ‘노동’으로 인정해 가족돌봄청년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가족돌봄청년 당사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돌봄을 이야기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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