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시간의 이해
[교수칼럼] 시간의 이해
  • 전인걸 요한보스코 신부
  • 승인 2024.01.04 17: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은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년, 패널에 유채, 207x209.5㎝,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작은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년, 패널에 유채, 207x209.5㎝,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신학교 교단에 서게 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1989년에 개봉한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 본 제목을 번역하면 ‘죽은 시인들 문학 연구 모임’정도가 될 것이다)이다. 키팅 선생님이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던 그 유명한 문구 ‘까르페 디엠’(Carpe Diem)! 전통과 규율에 도전하는 자유로운 시대정신을 표방하며 외쳤던 그 힘찬 문구의 울림에 한동안 너무나 벅찼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후에 ‘까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미래를 위해 희생하지 말고 현재의 쾌락을 즐겨라”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현실에 조금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시간은 홀연히 앞으로 나아간다. 한해 한해 년도가 바뀌듯이 불과 몇 달 전에 우리는 2022년도를 떠나보냈으며 올해도 3월을 지나 부활을 앞두고 있고, 다가 올 2학기도 지나가면 2024년이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시간은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지만은 않는다. 나를 중심으로 시간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로 오게 된다. 만약 친구와 1시간 뒤에 까페에서 만나 커피 한잔을 하기로 했다면 그 약속은 나를 향하여 시간을 줄여나가기 시작하고 그 시간이 오면 친구와 만나 즐거운 담소를 나누게 될 것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예약했다면 그 가수와 그 현장의 살아있는 음악들이 내게로 오는 것이며, 출산을 기다리는 임산부에게 출산 예정일은 이 전에는 없던 생명이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이 가진 특이점은 한번 흘러간 시간은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은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사실 우리 모두도 각자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면서 시간은 우리에게 역설을 남긴다.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나이를 먹지만 우리가 맞이하는 현재의 순간들이 우리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만물의 종말’이라는 글에서 “하루하루는 말하자면 시간의 어린이다. (…) 부모의 마지막 자녀를 막내아이라고 부르듯이 우리의 언어는 최후의 날(모든 시간이 끝나는 시점)을 가장 젊은 날, 즉 말일이라 부른다”고 이야기하였다. 칸트의 시간개념 안에서도 매일 같이 주어지는 하루하루가 우리 삶 중 가장 젊은 날, 가장 새로운 날이며, 시대 안에서 가장 새날이 언제인가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종말 바로 이전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로마 유학 시절, 방학을 맞아 이탈리아 수녀원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 곳 수녀원은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마조레 호수’(Lago Maggiore) 쪽으로 한 시간도 더 들어가야 도착하는 시골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은 교통편도 별로 없고,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편이 더 나을 만큼 구석진 곳이었다. 박사논문을 마무리해야 했기에 방학 때 어디 가볼 요량도 없이 두 달반을 그곳에서 쭉 지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1년에 한번 뿐인 방학인데 나중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생길 것 같아 로마로 내려가기 전에 몇일 여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짜놓은 계획 덕분에 그 기대감은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고대하던 시간은 다가왔고 결국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때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았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의 ‘대사들’(The Ambassadors, 1533년 작품)이라는 그림이 자못 흥미로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여느 그림들과는 달리 곳곳에 치밀하게 계산된 도상학적 장치들이 있어 이를 찾아가며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화려한 소품이 즐비한 고급진 장소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영국으로 파견된 프랑스 특사들이다. 왼쪽 사람은 프랑스 외교관(Jean de Dinteville)이고 오른쪽은 훗날 프랑스 주교가 된 성직자(Georges de Selve)이다. 당시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첫 번째 부인과 혼인무효를 요청한 상태였고 교황청은 이를 곱게 받아들이지 않은 상황이었다(결국 1534년에 헨리 8세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였고 성공회가 갈라져 나왔다). 이들은 그 파국을 막기 위한 프랑스 국왕의 특사 자격으로 영국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이 그림 안에는 다양한 알레고리가 숨겨져 있다. 줄이 하나 끊어진 악기는 당시 종교분열의 혼란한 정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성가책에는 교회 통합을 위한 기도로 일컬어지는 ‘오소서 성령이여’(Veni Sancte Spiritus)의 악보가 담겨 있다고 하니 이 그림 제작을 의뢰한 사람의 바람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 시계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상징하는 1533년의 성금요일의 날짜와 시간을 가리키고 있고, 이 그림의 왼쪽 상단에는 커튼 사이로 살짝 가려진 십자고상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그림의 압권은 그림 중앙 하단부에 그려진 이상한 물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하학을 이용하여 형상을 변형해 그리는 ‘왜상’(Anamorphosis) 기법으로 그린 것이기 때문에 정면에서 바라보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림 오른쪽에 서서 사선 방향으로 내려다보면 발견되는 이 물체는 다름 아닌 두개골이다. 서양 미술에서 해골은 죽음을 상징하는데 화가는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라틴어 격언의 의미를 그림에 넣음으로써 당시 권력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메멘토 모리’는 고대 로마 시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인들이 시내에서 개선 행진을 할 때 노예들이 마차 뒤에서 이들을 향해 끊임없이 외쳤던 말이라고 한다. 세상의 성공에 취해 있는 군인들에게 현재에 도취되지 말라는 경각심을 주었던 그 일화를 홀바인은 이 그림을 통해 다시 한번 상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시간관념은 더욱 특별하게 받아들여진다. 늘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던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매일 매일 주어지는 하루는 그분을 위한 준비의 날이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준비로 인해 그들 하루하루의 삶의 목적과 방향이 이미 변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성들여 준비하고 대비하는 삶은 그간 고정되어있던 시간의 의미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격언도 단순한 유희가 아닌 가치 중심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미래를 미리 받아들여 지금 이 순간에 생명력을 불어 넣게 하라는 것이다. 

 

 2013년에 개봉한 영국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시간 여행을 하는 주인공은 영화 말미에 깨달은 시간의 중요한 법칙을 소개한다. 그는 같은 하루를 두 번 사는데 하루는 그냥 평소처럼 살고, 한번 더 사는 하루는 같은 날 무의미하게 지나갔던 순간들에 집중해서 산다. 그리고 그는 그냥 그렇게 지나갈 수 있는 순간에 생각과 행동을 달리해 봄으로써 자신이 행복해 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인생의 한장면 한 장면 마다 무표정하게 지나가지 않고, 사람들에게 미소 짓고 상냥하게 사람들을 맞이하면 찰나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 같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하루의 의미는 개인의 안위가 아닌 주변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음에 생겨나고, 그 하루하루가 쌓여 토양이 바뀌고 세상이 변화되어 나가길 바래본다. 끝(finish)을 향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기에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