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성취될 수 있는가?
자유는 성취될 수 있는가?
  • 정병도 (신학과 5학년)
  • 승인 2024.01.0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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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바야흐로 '자유 상실의 시대'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자유’를 노래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극한의 이기주의가 외려 자유로움으로 포장되고, 무책임한 개인주의가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오늘날, 자유의 진의가 왜곡되고, 심지어는 외면당하고 있다. 오히려 편의와 경제성을 이유로 들어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자유마저 AI에게 증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Chat-GPT에 열광하는 우리 모습이 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자유를 성취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여러 측면에서 자유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정치와 자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가장 먼저, 자유라는 가치를 떠올려볼 때, 즉각적으로 연결되는 영역은 바로 정치적 차원에서의 자유이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자유란, 다양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의 종류로 이해될 요소가 아닌 오히려 인간이 조직되어 살아가는 삶의 양식. 곧, 정치 그 자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정치영역 안에서 드러나는 자유 형식은 ‘~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정치집단, 특별히 베버에 의해 근대 국민국가라는 개념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합법적으로 위임받은 집단으로 정립되기 전까지 정치영역에서의 자유는 단지 지배세력 및 기득권으로부터의 탈피인 동시에 제제를 받지 않는 의사표출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근대에 들어 다양한 정치체제 이론이 발달하면서 자유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자유까지도 탐구하려는 상호주관적 차원의 자유 개념이 논의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정치영역에서의 자유는 어떤 탈피의 대상을 상정하는 개념에 머무르고 있으며, 쟁취의 대상으로 이해될 따름이다. 

 

철학과 자유: 사유 대상으로서의 자유

 이처럼 정치적 영역에서 자유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유라는 주제를 둘러싼 철학적 분석으로 옮겨가게 된다. 철학적 영역 안에서의 자유는 ‘~에 대한 자유’로 단순화된다. 왜냐하면 철학적 사고란 언제나 하나의 대상 또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수행되기 때문에 합리적 해석과 논증을 위해서는 그 개념이 결부된 요소와 언제나 밀접한 관련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적 담론의 대상으로서의 자유는 해당가치의 내적 의미를 탐구해나가는 동시에, 그것이 통용되는 관계성을 분석하는 외적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다. 

 

 실상 자유는 철학적 사유주제 가운데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한 사람이 시민으로서 인정받고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자유인’이 되어야 했고, 이를 위한 학문이 발달했다. 중세 시대에는 자유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 존재인 신(神)과 결부되어 전개되었고, 그 결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체계적인 학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뒤이어 독일 관념론의 백미를 장식한 헤겔은 ‘자유에 관한 의식의 진보가 곧, 세계 역사의 지속적 과정이므로 인간의 완전한 자유는 철학의 목적이며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설명하며, 자유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철학적 관점 안에서 ‘대상을 요청하는 자유’는 단순한 불평등 관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정치적 의미의 자유보다는 진일보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의 기본적인 내적 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나아가 인간의 정신과의 관련성을 가지는 이른바 대상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신앙과 자유: 실천적 행위 조건으로서의 자유  

 자유를 성취의 대상으로 이해한다면,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미 성취된 자유 개념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시간의 흐름과 자유는 반비례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현실에서 자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지녀야 한다. 즉, 자유는 내가 성취한 후 행사하는 가치가 아니라, 내가 부여받은 권리이자 의무라는 것이다. 자유는 철저히 우리의 행위보다 철저히 ‘앞서서’ 그리고 ‘먼저’ 주어진 것이다. 비록 지금껏 인간이 역사를 거쳐내며 자유를 ‘쟁취’하고, ‘분석의 대상화’된 자유 개념에 집착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전환된 시선 위에서 ‘이미 주어진’ 자유의 ‘올바른 행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적 차원에서의 ‘~을 위한 자유’개념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리고 이자유는 필연적으로 나 이외의 다른 객체와 대상을 담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대자적(對自的) 차원의 자유라는 가장 충만한 의미의 자유개념으로 환원돼야 한다. 다시 말해, 자유는 하느님의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그 지고한 가치의 근원적 의미에 부합하도록 ‘타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그 행사의 방향이 나의 내면과 욕구가 아니라, 세상과 외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시 하느님을 향할 때 참된 가치를 드러낸다. 엄밀히 말해 그 행위의 윤리적이고 철학적 근거는 언제나 자유의 근본주인이신 하느님의 자유와 비교하는 작업을 해나갈 때 비로소 확보된다. 

 

그리스도인이 던지는 물음의 답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얻어져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는 필연적으로 타자를 향한 실천적 자유,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달성하기 위한 자유로운 행위라는 점이 부각 되어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 역시 이런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인간에게 존엄성을 획득하게 해주며, 진리와 선의 분별을 통해 복된 완전성을 확보토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가톨릭교회교리서 1730항 이하) 결국, 오늘날 언급되는 ‘자유상실의 시대’는 엄밀히 말해 성립될 수 없는 표현이다. 오히려 이 고귀한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자유의 성취와 상실 간의 관계가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진 자유와 온전한 자유 행사의 측면에서 고려해야 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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